소설리스트

검신귀환-160화 (160/300)

#160화

“…어.”

단 사 초식 만에 팽우혁이 뻗어버리자 남궁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팽우혁이 누구인가.

이미 옛적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후에 하북팽가를 이끌어 나갈 재목이라 불렸다.

이미 동년배 가운데 그 적수는 없었고, 입관 심사에서 차석에 오른 남궁휘조차 그와 싸워 감히 백 초 이상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천후가 나선 지 단 한 초식 만에 저리 뻗어버리다니.

무언가 휘황찬란한 초식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물 흐르듯 연이어 휘둘러지는 세 개의 초식을 막아낸 그는 뒤이어 펼쳐진 네 번째 초식에서 가볍게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손날을 쭉 뻗었을 따름이었다.

그것은 오호단문도의 세(勢)를 모조리 와해시켰고, 총 두 번의 변화를 보이며 팽우혁의 요혈을 타격했다.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

“난 여섯 번으로 봤네. 중간에 허초를 한 번 섞지 않았는가.”

“허초라기엔 조금 맹한 느낌이거늘.”

“에이, 그래도 한 초식은 버틸 줄 알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은 모두 웃음을 토해냈다.

“자네, 솔직히 말하세. 힘 조절 실패했지?”

심지어 선우연의 경우엔 은근한 눈길로 놀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더 가관인 것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 천후의 모습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 무심코 힘이 더 들어갔네.”

“…허어.”

남궁휘는 옅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신이 볼 수 있었던 것은 고작 두 번의 변화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적어도 다섯, 혹은 여섯 번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니 경지의 얕고 깊은 차이가 감히 가늠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리 압도적이라니.’

내공도, 병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수도(手刀)로 초식의 형을 겨루는 것임에도 이리 수준이 나뉘다니.

남궁휘가 움직임을 멈춘 채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장난기가 오른 선우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손가락을 들어 쓰러진 팽우혁의 몸을 쿡쿡 찔렀지만, 그는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향이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 같은데, 술이 깨면 가관이겠군.”

“…네, 네?”

갑작스러운 말이었는지 주예향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몸서리쳤다.

그러자 옆에 앉은 위천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몰랐느냐? 그렇게 티를 내었거늘.”

“아, 네. 정말로 몰랐어요.”

주예향은 정말로 새삼스럽다는 시선으로 팽우혁을 바라보았다.

만난 지 고작 몇 시진도 채 되지 않았거늘, 어디에서 자신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그 표정에서 살짝 불안함을 느낀 남궁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향아, 혹시…….”

“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집안 내력 때문에 눈이 상당히 높거든요. …오라버니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면 절대 허락해주지 않겠다고 하셨고.”

사실 덧붙인 이야기는 살짝 과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제법 좋은 핑계가 될 것 같아 그렇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모두가 헛웃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향이가 혼인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교관님 보다 나으려면 같은 오절 수준의 고수라도 불러와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그들은 교관님과 비교해 다 나이가 있지 않은가. 굳이 비교하자면 유망한 신진 고수 정도?”

“…저기 쓰러진 녀석 말인가?”

모두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우스갯소리인 것을 알지만, 동생을 아끼는 주호의 모습을 익히 보아왔으니 혹시?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그러던 중 선우연은 손짓으로 남궁휘를 불렀다.

잠시간 넋을 놓고 있던 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릿빠릿한 움직임으로 달려가자, 선우연은 쓰러진 팽우혁을 가리켰다.

“예, 옛!”

“돌아가는 김에 데려다주게.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퍼질러 자면 입 돌아가니.”

“…알겠습니다.”

겸사겸사 그만 가보라는 축객령이었다.

그 정도도 못 알아들을 만큼 눈치가 없진 않기에 남궁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곤, 쓰러진 친우의 몸을 들쳐 매었다.

‘…후유,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자신이 생각했던 학관 생활과 한참은 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그는 흘깃 의식을 잃고 쓰러진 팽우혁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참 고생이 많겠군.’

아쉽게도 자신들의 밤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

남궁휘가 팽우혁을 들쳐업고 떠났음에도 술자리는 그대로 이어졌다.

이제 막 분위기가 달아오른 차라 그만둘 이유가 없었으니.

“음.”

주예향도 새로이 내어온 술의 향긋한 내음을 맡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쯧쯧, 저놈 성격은 여전하군.”

창밖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모습을 본 선우연은 혀를 찼다.

그러자 호기심이 동한 당천유는 마찬가지로 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예전에도 저랬는가?”

“몰랐는가? 같은 세가 연합이면서.”

“나야 뭐, 그간 두문불출하지 않았나.”

제 동생을 중독시킨 무형지독의 연구를 위해 정천학관에 오기 전까지 그런 모임은 일절 참석하지 않았던 당천유였다.

나지막한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선우연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듯 피식 웃었다.

“첫 만남부터 대단했지. 다들 그래도 표면상으로는 하하호호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녀석만 홀로 뚱하니 앉아 있었네. 누군가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냐고 물었는데, 뭐라고 했었더라. 생산성 없는 이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나. 가문의 어르신들이 시켜서 체면치레만 하러 나왔다고 하더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체면치레조차 되지 않거늘.”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철대환이 쓴웃음을 짓자, 선우연이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유별나지만 어쩌겠는가. 소위 명문이라는 이들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으니. 나도 작년까지는 똑같았으니 제 얼굴에 침 뱉기지만, 안타깝기 그지없군.”

그 말에 악비산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교관님 밑으로 배정되면 좋겠군. 그렇다면 정신머리는 확실하게 뜯어고칠 수 있을 텐데.”

“정신머리만 고쳐지겠는가. 무공도 증진이 될 테니 팽가놈 입장에서는 일거양득이겠지.”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밤이 늦을 때까지 이어진바.

그러던 중 당천유는 느닷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팽우혁이 향이에게 관심이 있는 거라면, 남궁휘 그 자식은…….’

등골이 싸늘해짐에 슬쩍 제 동생을 바라보자 무슨 일이냐며 살포시 미소를 지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천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지중지하느라 잊고 있었지만, 당소혜에겐 영악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 쉽사리 다른 이들에게 휘말리지는 않을 터.

‘…그래도.’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그렇기에 당천유는 품속에 든 단장산의 병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도 몇 번인지 모를 각오를 다졌다.

***

정천학관의 개관이 당도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학관 입구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이들로 가득 찼다.

아직 정식 개관까지는 조금 시간이 있는바.

새로이 선임된 사급 교관과 삼급 교관으로 승진된 이들이 바삐 움직이며 관생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물론, 모두가 그리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호는 학관의 내원에서 다른 교관들과 느긋이 다과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호가 맡게 된 과목에 관해서였다.

“그래도 제게 이 강의를 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뭘 그런가. 나보다 자네가 더 잘할 거라고 믿네.”

원래 남사일이 담당했던 실전의 이해 과목을 주호가 맡게 되었다.

주호의 우려에 남사일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교관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농을 던져왔다.

“떠넘긴 것 아니오? 매번 자기는 직접 가르칠 수 없어서 아쉽다고 불평했잖소.”

“나도 들었네.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럴 만도 한데.”

“크흠.”

짓궂은 놀림에 쓴웃음을 짓던 주호는 그 내용에 고개를 들었다.

“헌데, 제가 직접 가르치면 안 되는 겁니까.”

“형평성 때문에 그러네. 나는 이것저것 얽혀 있는 것이 많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지. 뭐, 자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니 내키는 대로 하세.”

시원할 정도로 명쾌한 대답이었다.

실전의 이해는 신입 관생들의 필수 과목인 만큼 그 규모가 크다.

작년에도 남사일과 다른 일급 교관이 반절씩 인원을 나누었고, 올해는 그것에 더해 세 명이 삼분할로 나누어 학생들을 맡았다.

즉, 주호의 담당 인원은 삼백 명이 조금 넘었다.

“그나저나, 남 교관. 자네와 무림맹이 공조해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누군가가 화제를 바꾸었다.

일부는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다수는 처음 들은 것인 듯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소문도 빠르군.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할 참이었어.”

남사일은 올해 교편을 거의 내려놓았다.

맡은 수업도 비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니, 학관의 일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유인즉, 전반기엔 무림맹과 연계해 활동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작년, 마교의 습격 이후로 학관에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라는 평이 있었다네. 그래서 상층부는 무림맹과 합작해서 그쪽을 충족시키면 어떤가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네. 실제로 무림맹과 작전을 펼치면서 경험도 쌓게 할 생각이야. 물론 그런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지.”

남사일 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신원이 확실한 교관들을 비롯해, 졸업 예정인 관생을 대상으로 무림맹에 입맹을 희망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체험을 시행할 예정이었다.

무림맹 역시 현재 공식적으로 인원을 확충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 대비에 들어간바.

작금의 합작 역시 유사시를 대비한 정천학관의 조직도를 개편하기 위한 준비나 마찬가지였다.

“전반기에는 아마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질 테고, 후반기에는 학관의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 잡겠지.”

“제법 괜찮은 이야기군.”

“매화선풍검 성격에 많이 참았다 싶네. 워낙 틀에 박힌 걸 싫어하는 이다 보니.”

“…누가 보면 내가 날뛰기를 좋아하는 줄로 알겠군.”

“그렇지 않은가.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네만, 자네 소싯적에…….”

이야기의 시간대가 점차 과거로 향함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니, 요즘 들어 더욱 체감하게 되는 말이었다.

“…주 교관님.”

그때, 사급 교관 중 누군가 은밀히 그에게 찾아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괜찮네. 아직 젊은 자네가 고생해야지.”

남사일이 우스갯소리를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트린다. 그것에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를 숙인 그는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지?”

“학관의 뒷문으로 교관님을 뵙고자 하는 이가 찾아왔습니다.”

“나를?”

소식을 전해준 교관에게 고맙다며 짧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이내 뒷문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이는 특별한 것이 없는 행색이었으나, 상태창의 정보로 사신문 소속의 무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청룡을 뵙습니다. 시급한 사안이라 지부장님을 대신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사안이라는 것은?”

“마교의 무력 조직 다수가 대천산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말에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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