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58화 (158/300)

#158화

팽우혁은 지금껏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외모가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어울리기 위해선 내적인 수준이 맞아야 했지만, 이때까지 그에게 다가온 여성은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

‘모두 내 외모나 가문의 후광을 바라볼 뿐.’

진실된 사랑이라는 것도 딱히 원하지 않았으며 애초에 기대도 없었기에 욕심도 없었다.

차라리 가문이 짝지어준 상대와 정략결혼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주예향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소저께서는 어찌 무림인이 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가 알기로 주가장은 상계 가문이었는데.”

팽우혁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보통 그런 성향은 출신 가문에 따라 크게 좌지우지되는바.

설령 무공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호신용으로 익히거나, 곁가지로 건드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정천학관에 합격할 정도라면 제법 본격적으로 수련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오라버니 영향이 컸어요. 오라버니도 약관이 되자마자 무림인이 되겠다며 무작정 가문을 뛰쳐나가셨으니…….”

“검절께서?”

처음 듣는 비사에 당소혜의 눈이 반짝거렸다.

평상시 주호의 분위기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기풍이 고고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러한가 생각했지만, 또 주예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지는 않은 듯싶었다.

“덕분에 예향이가 많이 고생했어.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되었으니까.”

“결말이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겠소, 하하.”

팽우혁은 사실 검절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입관 심사 전 이곳에서 수석교관으로 있는 팽대환이 그에게 주호에 대해 이것저것 알려주긴 했지만, 알게 무엇인가.

하지만 그가 주예향의 오라버니라는 것만으로도 관심도가 급증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주 교관님을 보면 그쪽도 예사롭지 않은 핏줄인가봐. 향이도 제대로 수련한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 수준까지 오를 정도잖아? 이제 몇 년만 지나면 네 오라버니처럼 고수가 되는 거 아니야?”

“정말이오? 고작 몇 달 만에 그 정도 성취라. 대단하시오.”

팽우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예향으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었기에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이자, 그는 또다시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넋을 잃었다.

“어? 향이 아니더냐.”

그때 주위를 지나던 교관 중 누군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 담교관님.”

주예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올리자, 담우양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잘 즐기고 있느냐. 그렇지 않아도 네 오라비가 동생 쪽을 잘 봐달라고 그러던데…….”

담우양의 눈이 당소혜와 팽우혁을 향했다.

같은 여성은 당소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팽우혁은 경계해야만 하는 대상.

본능적으로 그 시선을 느낀 팽우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권을 했다.

“섬서검협을 뵙습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하, 반갑네. 여기선 일개 교관일 따름이야. 그렇게 예를 취하지 않아도 되네.”

팽우혁은 물론 섬서검협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름만.

검절도 신경 쓰지 않는 판국에 그 아랫 경지의 고수들은 눈에 차지도 않은 팽우혁이었지만, 주예향과 친분이 있어 보이자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극진한 예의를 갖추었다.

“하여튼 방해는 여기까지 하지. 잘들 즐기게.”

담우양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리를 떠났다.

***

주호는 연회장과 따로 구분된 공간에서 교관들과 자리를 하고 있었다.

다만,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일급 이상의 교관들로 그 면면이 강호에서 높은 명망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 친구가 딱 화산검수들을 가로막으면서 하는 말이…….”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남사일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남사일은 주호와 함께 화산에 갔을 당시 있었던 싸움에 대해 신이 난 표정으로 설명하는 중이었다.

제 사문의 치부임에도 불구하고 열과 성을 다해 말을 토해내는 것이, 정말로 감명받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교관들은 전부 지긋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그 이야기에 집중했다.

‘후우…….’

물론 주호로서는 부끄러운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사실 손님의 자격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요, 자소단을 얻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움직여 무례까지 범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남사일의 이야기를 듣는 교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다.

“하긴, 주 교관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도 하지.”

“작년 천무 학관과 함께 연회를 했을 때, 그 풍운검인지 풍우검인지 하는 녀석을 작살내 버리지 않았던가.”

“한 성격허이.”

더러는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여오기까지 했으니.

그들 각자가 정천 학관의 일급 교관으로 초빙될 정도로, 안목이 뛰어났다.

그렇기에 예전부터 주호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바.

아직 스물일곱에 불과했지만,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그들의 생각은 모두 비슷했다.

주호가 언제까지고 학관의 교관으로 소속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듣기로 무림 맹주 쪽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했지만, 무림맹은 문파가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사문으로 끌어들여, 무림맹으로 파견하는 형식으로 활동하게 한다면 제법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이 친구, 고작 일 년만인데 많이 달라졌군.”

설우진은 오랜만에 공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교류 대회 당시 학관을 습격했던 적혈마검과 자웅을 겨룬바.

그 와중에 백중지세를 이루다 동귀어진의 일격을 당해 심한 서로 심한 내상을 입었다.

그렇기에 이전까지 은거하며 상처를 치료했고, 올해 학관이 다시 열리는 것을 기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를 가진 것은 오랜만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였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마교는 이전의 있었던 소란의 원흉이 자신들이 아니라며 잡아떼었지만, 그 자리에 있으셨던 분들은 모두 알고 계시겠지요.”

그 말에 모두 침중한 낯빛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준비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갑작스러운 습격이었다.

일 년 차 신입 관생들이 교류 대회 중이던 당시, 그들은 여느 날처럼 강의 중이었다.

그러던 찰나에 마교가 습격을 가했고,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로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무림맹의 발 빠른 지원이 아니었더라면 그 몇 배는 더 피해가 컸을 터.

실제로 일급 교관 중에서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잠시 교편을 내려놓은 이도 있었다.

“새로운 해가 밝았지만, 올해 역시 미증유의 위험을 준비해야 합니다. 듣기로는 무림맹에선 마교와의 전쟁을 이미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무림맹이 말입니까.”

교관 중 한 명이 되물었다.

대부분 신음을 토해냈고, 발이 넓어 이미 알고 있던 일부는 가슴이 답답한지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학관은…….”

“그렇지 않아도 그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맹과 협의하고 있는 부분인데,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학관 자체에서도 조직을 개편하려 합니다.”

“조직을 말입니까.”

“물론 희망자에 한해서입니다. 각자 사문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전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마교는 전 중원이 힘을 합쳐 상대해야 할 정도로 강대한 적이었다.

이전 역사를 보아도 무림맹을 중심으로 정도 무림의 연합군이 결성되지 않았는가.

학관의 무력도 어지간한 문파에 못지않았다. 그러니 무림맹 산하의 조직으로 자체 무력 조직을 개편할 생각이었다.

“과연,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요.”

“좋은 것 같긴 하다만, 남는 이들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 문제로군요.”

“일단 학관 자체에 속한 이들만 헤아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후기지수뿐만 아니라 그들 사문이나 문파가 참전을 원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굳이 위험한 일에 발을 내디딜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위치한 하남의 방비만 해도 충분할 터.

‘난세에는 영웅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호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학관의 위명은 여느 문파에 비해 절대 낮지 않았다.

만일 무력 조직을 개편할 시 그 휘하에 들어와 명성을 얻고 업적을 세우려는 이들이 많을 터.

그저 학관과 인연을 쌓아 나중에 이득을 보고자 하는 곳들도 다수 있을 것이다.

“정천학관뿐이 아닙니다. 천무학관측 역시 같은 생각이라 합니다.”

이어진 설우진의 말에 우려를 표하던 이들 역시 그렇다면, 이라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가장 좋은 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시대에 흐름 가운데 전쟁이 없었던 적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다들 마음을 굳게 먹는 것이 좋을 것이요.”

“그렇지요. 그래도 오늘만은 즐깁시다.”

경직되었던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하게 돌아갔으니, 그렇게 밤은 깊어져만 갔다.

***

올해 입관생들을 축하하는 연회가 끝을 맞이했다.

합격 판정과 동시에 다들 숙소가 배정된 상태였기에 대다수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돌아가는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여운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일부는 재차 술자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밖으로 향했다.

“…….”

당연하게도 팽우혁은 많은 이들의 권유를 받았다.

하북팽가라는 명문 출신과 수석입관생이라는 이름은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그에게 치근덕거렸지만, 팽우혁은 웃는 낯으로 그것들을 모두 권유했다.

그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단 하나, 주예향일 따름이었다.

“…음.”

팽우혁은 원래 연회 같은 것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가문의 체면치레, 그리고 수석입관자로서의 입지가 있기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지만, 본래는 시간만 채우고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 반대가 되었다.

어떻게든 주예향과의 자리를 이어나가고 싶었으나, 평소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니 상대 쪽에서 의아하게 여겨올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턱.

“이보게,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날 찾아오지 않는다니, 이건 좀 섭섭한데.”

“…휘?”

그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세가의 후기지수인 남궁휘였다.

이번 입관 시험의 차석으로, 팽우혁과 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성격인 호쾌한 성격이었다.

“어이쿠, 당 소저도 함께 계셨군요. 오랜만입니다, 쾌차하신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요.”

“고마워요, 남궁 소협.”

그는 물론 당소혜와도 안면이 있던바.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그것을 받아주었다.

“헌데 그 옆쪽에 계신 아리따운 소저분은……?”

“주가장의 주예향입니다.”

이미 한 번 있었던 일이기에 주예향은 이전보다 더 가벼운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

하지만 남궁휘로서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주가장이라면 혹시 검절의…….”

“제 오라버니세요.”

주예향의 사뭇 자랑스럽다는 듯 말하자, 남궁휘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뜨였다.

그러곤 황급히 포권을 취하며 정중한 자세로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남궁세가의 휘라 합니다. 저희 가문이 검절께 많은 은혜를 입었지요.”

“저에게 이러시지 마세요. 오라버니의 공인걸요.”

주예향은 들은 이야기가 적지 않기에 겸양을 떨지 않았다.

다만, 그 공적을 제 오라버니에게 돌렸을 뿐이었다.

“…….”

팽우혁은 살짝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남궁휘를 바라보았다.

평소 경망 된 행실로 인해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친화력이 좋은 이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다음에 나올 말은…….

“그러면 어떻소이까. 이렇게 인연을 텄고, 아직 달도 밝은 가운데 저희에게 아리따운 소저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기회를 주시겠소이까.”

“어머나.”

그 유려한 언사에 당소혜는 사뭇 부끄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눈은 이전과 다름없이 덤덤할 따름이었으니.

“향아, 어쩔래?”

“나는…….”

당소혜의 물음에 주예향은 입을 오물거렸다.

술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와서도 몇 잔 마셨으며, 생각 외로 쌘 것인지 그리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학관에 오기 전 가문 사람들에게 모두 남자를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들었던바.

특히 두 오라버니는 학관에서 접근하는 이들은 모두 빌어먹을 놈들이라며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누누이 경고했었다.

‘…조심하면 괜찮겠지?’

소혜도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으리라.

첫 연회이고 안면을 트는 자리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가도, 될까요?”

“물…….”

“물론입니다, 소저.”

남궁휘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팽우혁이 먼저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

남궁휘는 그런 제 친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그 무뚝뚝하던 모습과는 정 반대가 아닌가.

이런 적극성이 넘치는 모습은 그를 알게 되며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오호라.’

곧 남궁휘의 눈이 빛났다.

주예향을 바라보는 팽우혁의 두 눈에 꿀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지 않은가.

“…….”

동시에 마찬가지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당소혜와 시선이 마주쳤으니.

이내 그 둘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재밌는 밤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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