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이건.’
천후는 가늘어진 눈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남궁연이 휘두르는 검의 완성도가 한층 더 정밀해졌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악비산의 무위였다.
백호신공을 익힌 덕분인지 이전보다 한층 더 무거워진 기세를 보였다.
아직 숙련도가 조금 부족한 듯 간간이 실수가 보였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였다.
이때까지의 모습으로 보아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창술을 완벽하게 체득할 터.
‘나도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제법 좋은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와.”
주예향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격정적인 비무에 몇 번이고 감탄을 보였다.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매번 색달랐다.
검을 쥐는 손, 벼락같은 일격, 도저히 막아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공격을 회피하거나 기어코 막아내는.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기에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이러면 조금 자신이 없어지는데.”
당소혜가 살짝 의기소침해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것이?”
“솔직히 선배들이라고 해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줄 알았거든.”
“그런가?”
“응, 우리 오라버니는 예외지만.”
당소혜는 천후와 같이 연무장의 가장자리에서 비무를 관전 중이던 당천유를 바라보았다.
당가의 신동, 독의 귀재.
비록 자신 때문에 한동안 정체되었다곤 하지만, 걸림돌이 사라졌으니 이제 다시 그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리라.
하지만 본디 재능을 지닌 것은 극소수일 뿐, 학관의 모두가 제 오라버니처럼 재능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고작 한 해 먼저 태어난 것으로 선배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코웃음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무를 보니 그 생각들이 싹 사라졌다.
“…그래도 우리 오라버니가 최고니까.”
당소혜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두 소녀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천강. 어떻게 생각하나.”
“…어지럽군.”
선우연과 위천강 역시 살짝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로만 놀고먹었다고 했지, 실상은 열심히 수련하지 않았던가.
나중에 모였을 때 남궁연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무공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남궁연과 악비산의 무위는 이전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매서운 것이었다.
특히 위천강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니.
‘천마신공을 쓰지 않는다면 승부를… 아니, 두고 볼 것도 없이 패배인가.’
이전까지는 발아래로 두고 있던 이들이었다.
당장 자신과 자웅을 겨룰 수 있는 것은 천후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천마신공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악비산이나 남궁연에게 패배하는 것은 확정된 사실로 보였다.
“우연, 자네는 변치 말게.”
“…그러지. 우리는 끝까지 함께 가세.”
천마신교의 소교주와 화산의 소신룡이 우애를 다지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비무가 막바지에 들며 남궁연의 승리로 기울어질 찰나.
턱.
제 어깨에 걸쳐지는 팔에 선우연과 위천강이 흠칫했다.
바로 직전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수려한 외모를 지닌 남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시작했는가.”
“…아, 교관님. 깜짝 놀랐잖습니까.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위천강이 타박하자 선우연이 합세한다. 그것에 주호는 씩 웃으며 제자들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너희들의 수련이 게을렀던 것은 아니고?”
“그,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눈앞에 있는 남궁연과 악비산의 모습을 보아하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려왔다.
“…어? 교관님?”
막, 제 승리로 비무를 끝낸 남궁연은 선우연과 위천강의 머리를 양팔에 끼고 쥐어박고 있던 주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둘은 몸을 버둥거리며 벗어나려 했지만, 밧줄에라도 포박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
주호가 웃으며 그들을 놓아주자 그제야 켁켁 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심사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바쁜 일정은 이제 전부 끝났다.”
“오라버니!”
주호가 악비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찰나, 한쪽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예향이 달려왔다.
품 안에 그녀를 안아준 그는 거칠게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내 고개를 들어 당천유의 팔에 달라붙어 있던 당소혜를 바라보았다.
“둘 다 합격을 축하한다. 소혜는 삼위를 했더구나.”
“오, 그렇게나?”
“당연한 결과다. 소혜가 얼마나 우수한데. 몸을 추스를 시간만 조금 더 있었더라면 능히 수석을 했을 텐데.”
모두가 축하를 전하는 가운데 당천유는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살짝 아쉬움을 표했다.
“못 말리겠군.”
“그러게나 말이야.”
아직 학기가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동생을 싸고도는 그 모습에 위천강과 선우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개관 후 다른 남자들이 제 동생에게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떤 반응을 할까.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분기탱천한 그 모습이 훤했기에 살짝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오라버니, 저는요?”
“향이도 잘했다.”
주예향의 순위는 삼백위 정도.
신입 관생 전체가 천 명이니 평균을 뛰어넘었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그녀는 상가의 자재라 그런 것인지 필기시험에서 두각을 드러낸바.
무인이 아니라 상인으로 갔었어도 제법 성공할 듯싶었다.
“자, 그러면.”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마침 전원 한 명도 제외하지 않고 자리에 모여 있는바.
그렇기에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다 함께 비무라도 하지 않겠느냐. 그때는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다 함께, 요?”
그 품에 안겨 있던 주예향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주위에 있는 후기지수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으니.
“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교관님, 오늘은 저희끼리 가볍게…….”
“조건은 그때와 같다. 딱 너희와 동수로 상대해주지. 만일 내 옷깃을 스치기라도 한다면.”
“…한다면?”
의미심장한 어조에 누군가 그 말을 따라 했다.
그러자 주호는 서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숨겨두었던 절초 하나를 가르쳐주마.”
“…….”
일곱 명의 후기지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물론, 그 당사자만이겠죠?”
“그래. 대신 두 명 이상이면 각기 다른 초식을 알려주도록 하지.”
주호 정도의 고수가 절초라 말할 정도의 무공이었다.
필시 예사롭지 않은 것이 분명할 터.
“…너희는 물러나 있거라.”
벌써 전신에 잔뜩 힘이 들어간 악비산이 주예향과 당소혜에게 말했다.
다른 이들 역시 사뭇 비장한 태도로 그 옆에 선바.
“오너라.”
주호는 오만한 태도로 손끝을 까딱였다.
물론, 그 일곱이 주호의 옷깃조차 건드릴 수 있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
입관식 날이 밝았다.
연회장 내부엔 올해 새로이 들어온 입관생들로 가득했고, 저마다 들뜬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다가올 학관 생활을 기대했다.
행사 자체는 예년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작년 마교의 습격으로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는 제사, 그리고 수석 입관생의 발표였다.
뚜벅.
적지 않은 소음이 일어나는 가운데, 한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더러는 그 수려한 외모와 범상치 않은 기세에 감탄을 내뱉었지만, 대부분은 그 남자가 누군지 깨닫고 두 눈을 크게 떠왔다.
“그 명성이 자자한 검절인가.”
“마교의 고수와 공전절후한 싸움을 벌였다지.”
“출신은 평범한데, 뒷배가 비범하다네. 듣기로는 무림맹주와 긴밀한 사이라는 소문도…….”
천 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만큼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곧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퍼졌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요소가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개중엔 사실 무황의 비동에 들어가 그 유산을 얻은 것이 아니냐는, 사실에 가까운 가설도 있긴 했지만, 전부 한두 번 듣고 흘려 넘길 우스갯소리였을 따름이었다.
“수석 입관생을 발표하겠습니다.”
주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좌중은 곧 침묵에 잠겼다.
일각에선 왜 수석교관인 팽대환이 아니라 그가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하북팽가 팽우혁, 앞으로.”
“와아아아아-!”
수석 입관생이 발표되자 장내는 곧 환호가 가득 찼다.
하지만 전부가 축하를 보낸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수석일 것으로 기대했던 일부는 실망했고, 일부는 수석교관인 팽대환이 입김을 넣은 것이 아닌지 의혹 어린 시선을 보냈다.
“…….”
팽우혁은 좌중 사이를 걸었다.
걸걸한 성정을 자랑하는 팽가의 대다수와 달리 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단상 위에 올랐고, 변함없는 태도로 상을 수여 받았으니.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주호의 인사에도 그저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여 대답하는 것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단상을 내려왔다.
‘지루해.’
팽대환은 하품을 억누르며 죽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지가 멍청이들투성이였다.
살면서 이토록 지루했던 적이 있었을까.
가문의 명령 때문에 수석 입관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학관에 오면 조금은 달라질 줄 알았거늘.’
그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다만, 한없이 게으른.
자극이 있어야 움직였고, 본능과 이성의 싸움에선 항상 본능이 우위를 차지했다.
여차하면 사마외도로 빠지기 좋은 성격이었지만, 천성이 게을렀기에 그런 위험도 비켜나갔으니.
“팽소협, 축하하오. 아, 나는 강소문의 소가주로…….”
“팽형, 역시 수석을 차지할 줄 알았소.”
“팽형…….”
“팽소협…….”
연회가 시작되자 수많은 이들이 축하를 건네왔다.
명문으로서의 체면이 있었기에 적정선까지는 그것을 받아 준 팽우혁은 이내 술잔을 들고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다.
“하…….”
어찌 이토록 영양가 없는 이들이란 말인가.
지닌 실력의 일부만 사용했을 뿐인데 손쉽게 수석 자리를 차지했다.
그것까진 이해할 수 있다.
모종의 이유로, 혹은 자신과 같이 귀찮음을 느껴 성적을 내기 싫어하는 이들이 있을 터니.
하지만 그의 주위로 다가오는 이들은 모두 속이 빈 쭉정이 같은 놈들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가문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밖에 없는 버러지들.”
명문이 왜 명문인가.
스스로 빛날 수 있기에 그 이름을 지닌 것이 아닌가.
하지만 재능도 부족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 이들에겐 내세울 것이 그것뿐이었으니.
그때, 누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또 성가신 상대인가 싶어 슬쩍 인상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의외의 인물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소혜. 몸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면서 찾아오지도 않은 거야?”
“우리도 이제 남녀가 유별해진 나이다. 섣불리 움직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도니 자중해야지. 어차피 학관에서 보지 않는가.”
“남의 눈에 신경 쓰는 성격이었던가?”
“딱히?”
“귀찮았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말하네.”
팽우혁은 오늘 처음으로 웃음을 토해냈다.
그녀와는 같은 세가 연합의 명문으로 어릴 적부터 안면을 터온바.
그렇다 할지라도 친분을 가지는 것은 예외였지만, 당소혜에겐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제법 말도 잘 통했고 알고 지내도 손해 볼 것은 없기에 연을 이어오던 와중, 모종의 사정으로 병상에 눕게 되어 그간 두문불출했으니 내심 아쉬웠을 따름이었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듣기로는 삼위를 했다지?”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말이야.”
“기대하겠다. 나머지는 전부 눈에 차지 않는 녀석들 천지라.”
“여전하네.”
그 냉소적인 태도에 당소혜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몇 년도 전이지만, 어째 나이를 먹어도 바뀐 것은 없는 남자였다.
“…그보다 그 옆에 계신 분은?”
팽우혁의 시선이 당소혜와 함께 온 뒤로 조용히 음식만 먹고 있는 여성에게로 향했다.
보통은 이쪽이 부담스러워질 정도로 진한 호감을 드러내거나,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애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당소혜가 이야기를 나누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가 아닌가.
그렇기에 조금 흥미가 동해 묻자, 당소혜는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인사해, 얼마 전에 사귄 친우인 향이야. 검절 알지? 그분의 동생.”
“아아.”
팽우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절의 동생이 입관했다는 것은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검절 본인이 특별한 것이지 그 가문이나 다른 요소에선 찾아볼 만한 것은 없었던바.
다만, 소개해준 당소혜에 대한 예의로 슬쩍 포권을 올리며 인사했다.
“팽가의 팽우혁이라 하오.”
“…아, 주가장의 주예향이라 합니다. 반가워요.”
막, 음식을 먹던 주예향은 자신에게로 화제가 돌려지자 움찔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동년배 남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선바.
그렇기에 살짝 주저하는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하자, 팽우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 팽 공자?”
“너, 왜 그래?”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질 않자 주예향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당소혜 역시 지 잘난 맛에 살던 팽우혁이 굳어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으니.
‘…어디서 이런.’
팽우혁은 주예향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마른하늘 위로 날벼락이 내리쳤고, 늘어져 있던 신경 줄이 끊어질 듯 팽팽히 당겨졌으니.
주가장의 주예향.
마치 한 떨기의 수선화 같은 자태이지 않은가.
때 묻지 않은 순백의 미(美).
화려하게 꾸민 것도, 억지로 내뿜으려는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팽우혁은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