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백혈귀창 사일혁은 제 귀창을 손안에서 굴렸다.
바로 직전부터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은밀하게 이곳을 포위하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위강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을 알지 못한 듯싶었다.
‘의도적으로 놓아준 것인가.’
참으로 한심스럽게 그지없는 자태였다.
“이 방만한 죄는 나중에 물을 것이다. 그리 알도록.”
“…예.”
자초지종은 밖에 있는 녀석들을 붙잡아 알아보면 되리라.
마랑이니 뭐니 해봤자 결국 절정 고수에 불과한바.
그 밑에 있는 흑살대 역시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걸리는 건 사도맹이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인데.’
지금 당장은 어디에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사신문이 이때까지의 체제를 바꾸어 자신들의 정보를 무림맹과 사도맹에 노출한 것은 아닐까.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였다.
일 년 사이 그들과 몇 번이나 충돌도 있었고, 얼마 전엔 혼돈이 직접 청룡과 마주했다고 하지 않은가.
더는 자신들의 힘으로만 막을 수 없다는 경각심을 느낀 그들이 활로를 찾아 나선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 우두커니 서 있는 것도 그러니 앉아.”
“…아, 예.”
지부장이 제 수하들과 함께 습격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이,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앉아 있던 사일혁이 손짓했다.
목위강은 얌전히 그 앞에 앉았다.
제 세력을 파탄내고 지부의 위치를 노출했으니 어떤 벌을 받을까.
신교에서 운영하는 지하 노역장이 중원 곳곳에 깔려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것으로 가게 되는 걸까.’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그래도 학관에 다녀야 하니 그전까진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었을 때.
쿠당탕탕-!
지부의 문을 부수며 누군가가 날아들었다.
“지, 지부장님?”
목위강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구르고 있는 이가 익숙한 얼굴임을 깨닫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툭.
그 직후 목이 잘린 시신이 문가에 쓰러져 내렸다.
이윽고 지부장은 겨우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고, 뒤쪽에 있던 사일혁을 향해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귀창께서 나서 주셔야 할 듯싶습니다.”
“흠.”
사일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남 지부에 속한 고수가 적지 않다.
적어도 흑살대 하나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기억했지만, 상대의 전력이 예상외였던 것인지 벌써 이쪽까지 밀린 듯했다.
뚜벅.
“…….”
안쪽으로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목위강은 전신의 털이 쭈뼛 솟아오르는 듯했다.
익숙한 기시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농밀한 살기를 풀풀 흘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똥개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사일혁은 피식 웃으며 턱 끝을 들었다.
자신감에서 기인한 행동이었지만, 마랑은 그런 그를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백혈귀창이로군.”
“…허어?”
사일혁은 나지막한 의문성을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혈천신교의 존재를 간파한 것은 그럴 수 있다.
목위강의 신원이 노출되고 지부의 위치까지 발각된 것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단번에 자신의 신상까지 파악하다니?
‘가벼이 여길 일만은 아니었군.’
가벼운 기합과 함께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건물 내부라 창을 휘두르는 데 제약이 많았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는 경지는 아니었다.
절그럭.
그를 백혈이라 불리게 해주었던 새하얀 귀창이 손에 들렸다.
단 한 수에 팔다리를 자르고 말 그대로 숨만 붙여둘 생각이었다.
“…….”
주호는 마랑의 얼굴 너머로 자신 앞에 선 사일혁을 바라보았다.
[상태창]
이름: 사일혁
별호: 백혈귀창
직업: 혈천신교 칠혈성(七血星)
나이: 마흔둘
소속: 혈천신교
무공: 파천분뢰창
경지: 초절정(五/十)
호감도: 下下
이전에 싸웠던 청혈도제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다.
산서에 가기 전의 자신이었더라면 용호상박의 싸움을 벌일 수 있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런 월척이 걸려들 줄은 몰랐군.’
사도맹과 마랑의 거죽을 뒤집어쓴 것이 정답이었는지 상대는 자신을 가볍게 여기는 듯했다.
스릉-.
주호는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사일혁의 몸 역시 살짝 앞으로 구부려졌을 때.
번쩍-.
목위강은 제 앞을 가로지르는 섬광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귀청을 찢는 천둥소리나 폭풍 같은 기세는 없었다.
그저 실낱같은 바람에 머리카락 몇 가닥만 너풀거렸을 뿐.
“…….”
적막이 내려앉았다.
목위강은 천천히 눈을 뜨자 보이는 풍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조금 전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에 검과 창을 휘두른 자세로 교차해있었다.
다만, 사일혁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기에 자신들이 이겼거니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어디 심장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자신의 계획을 망친 그놈을 시신이라도 짓밟아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돌리려 할 찰나.
저저적-.
사일혁의 이마로부터 시뻘건 혈선이 생기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손에 주억거리던 귀창 역시 끝에서부터 조각조각 균열이 일어나며 불길한 소리를 내뿜었으니.
“…아.”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고통으로 바뀌었다.
생명의 빛이 꺼졌다.
곧 몸이 갈라지며 형체가 무너져 내리던 사일혁과 마지막 순간 눈을 마주치고 있던 목위강은 분명 그렇게 느꼈다.
“으, 으으으.”
바닥에 주저앉은 목위강은 전신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귀창에 관해선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혈천신교 내부에 자리한 고수 중 칠혈성이라 불리며 수위에 꼽히던 강자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일초지적도 되지 못했으니 자신은 범접조차 하지 못할 경지의 고수가 분명했다.
“지, 지부장님…….”
목위강은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필사적인 얼굴로 제 상관을 찾았다.
무언가 활로가 없는 것인가, 그렇게 물으려 했을 때.
“…어?”
분명 그 옆에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있던 지부장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그가 흘린 핏자국뿐.
이미 옛적에 홀로 도망친 것인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음.”
백혈귀창을 일 검에 베어버린 주호는 잠시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곽무혁의 조치가 제대로 먹힌 것인지 일정 수위 이상의 힘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적해(赤海)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생포할 것을 그랬군.’
원래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심 걱정이 들었기에 최소한의 힘만 사용했고, 가차 없이 베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으, 으으.”
그런 그의 귓가로 목위강의 신음이 들려왔다.
주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보내자 더욱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니.
푹-!
주호는 들고 있던 검을 그 가랑이 사이에 꽂아 넣었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겁에 질린 것인지 그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한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주호는 입을 열었다.
“뭐, 네놈은 당장 죽이지는 않으마. 저 녀석을 대신해 캐물어야 할 것이 많으니.”
공포에 떠는 목위강에겐 그것이 저승사자의 미소와도 같이 보일 따름이었다.
***
“헉, 헉…….”
담석월은 이제껏 이리 열심히 달려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발을 놀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낮까지는 별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대계의 진행을 파악하기 위해 본단에서 칠혈성 중 한 명인 백혈귀창을 보낸 것만 제외하곤 평범한 날이었다.
칠혈성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휴가차 나온 것이니 적당히 계집을 붙여주고 좋은 터를 마련해주면 알아서 놀다가 돌아갈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목위강, 그놈 한 명 때문에 모든 것을 그르쳐 버렸다.
‘나는 무조건 살아 돌아가야 한다.’
하남 지부 전체가 밀려도 상관없다.
후에 상황이 잠잠해진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지부를 세우고 사람을 모으면 되는 일이니.
하지만 그가 사로잡히거나 죽게 된다면 대계에 큰 차질이 생겼다.
그렇기에 본단에서도 칠혈성이나 되는 정도의 고수를 파견해 진척을 확인한 것이었으니.
‘지원을 요청했으니 머지않아 올 터. 그때까지만 버티면.’
이미 하남성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얼핏 보면 마구잡이로 도망친 것 같았지만, 그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간 더 간다면 신교의 안가가 자리하는바.
사도맹에게 허점을 찔린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으나,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안가까지 쫓아오기는 어려우리라.
쉬시식-.
그때 수풀 주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그를 추격해온 흑살대의 고수들인 듯싶었다.
‘시팔.’
담석월은 속으로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 발을 놀렸다.
조금이라도 숨을 고르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으나, 멈춰 선다면 그것으로 붙잡힐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얼마가 나온 거지? 수십? 아니면 백?’
하지만 그것도 한계를 맞이했다.
거목 위에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자 자신의 흔적을 수색 중인 이들이 가득했다.
못해도 수십은 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담석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찬 검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목숨만 부지하면 되었다.
팔 한 짝 정도는 내어줄 각오로 뚫고 나가면 그들도 섣불리 자신을 붙잡지 못하리라.
타닷-!
각오를 마친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저기 있다!”
“뒤쫓아-!”
동시에 호각 소리가 뒤따르며 수많은 기척이 뒤를 쫓았다.
그렇게, 그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대계를 흐리는구나.”
담석월은 초췌해진 얼굴로 목위강을 욕했다.
마랑에게 당한 상처 역시 작지 않다.
걸을 때마다 내장이 꿈틀거리는 듯한 통증을 품은 채 이곳까지 도달한 것도 용하다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이 끝일 듯싶었다.
‘하다못해 사도맹의 소행임을 알리고 싶지만.’
신교도 바보가 아닌 이상 조사를 하면 흑살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인력과 시간이 소비되겠는가.
“오너라. 적어도 두셋은 나와 함께 갈 각오를 해야 할 것이야.”
담석월은 검을 들었다.
신교의 무인으로서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리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천지가 뒤흔들렸다.
“으아아악-!”
“무, 무슨!”
포위망 일부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스물에 달하는 인원이 일순간에 짓이겨졌고, 처참한 상흔만이 지상 위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하암.”
“……!”
담석월은 그 가운데 하품을 하며 걸어오는 잿빛 머리의 남자를 보곤 두 눈을 크게 떴다.
“…도철님께서 나오실 줄은.”
“지부장이 너지? 가자. 혼돈이 데려오란다.”
그는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담석월 앞에 섰다.
“일 끝내고 안가에서 쉬고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르칠 뻔했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됐고, 가자.”
도철의 재촉에 담석월은 고개를 끄덕이곤 포위망이 무너진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 주위에 있던 흑살대 고수들이 주춤하며 움직이려 할 찰나, 도철은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차 좋게 끝내자. 피곤하거든.”
천지를 아우르는 그 막대한 기세에 그들은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반면,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주호는 신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도철, 사흉수의 일원인가.’
백혈귀창 같은 쭉정이와는 다른 진짜배기 고수.
방금 사신문의 무인들을 휩쓸었던 한 수는 예전에 자신이었더라면 상처 없이 막아내기 힘들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예상외의 피해로군요. 이건 좀 뼈아픈 일입니다.”
그 옆에 있던 비월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실수하는 척하며 포위망을 풀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주하던 이가 생각보다 중요 인물이었는지 예상치 못한 지원이 등장해버렸으니.
“…서둘러 부상자를 수습하지.”
사흉수 중 한 명인 도철의 존재는 그들이 세운 계획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이내 갈등을 접었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긴 싸움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사도맹을 사칭해 그들에게 혼선을 준 것만으로도 계획을 달성했다.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는바.
나무보단 숲을 바라보는 것이 더 멀리 보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