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주호는 전날과 같이 느긋한 모습으로 심사장 내부를 돌아다녔다.
열띤 분위기였지만, 아직 도를 넘는 이는 없었다.
소란이라도 일어나 그것에 휘말린다면 입관 심사에 불이익이 생기니 다들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어렵지 않게 합격하겠구나.”
주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절정에 달아오른 비무를 바라보았다.
주예향은 처음엔 긴장한 것인지 조금 경직된 모습이었으나, 이내 비무에 집중하며 제 기량을 끌어올렸다.
간간이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초식은 교관에게 작게나마 감탄을 자아낼 정도.
당소혜처럼 압도적인 무위를 보이며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분명해 보였다.
‘향이가 관생이라.’
주호는 문득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저 핏덩이가 언제 이렇게 자라 검을 휘두르고 있단 말인가.
비동에서 돌아온 직후 무인이 되고 싶다고 말해왔을 땐 정말로 놀랐다.
하지만 예전의 자신처럼 한때의 치기가 아니라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으니.
“……?”
멀찍이서 동생의 심사를 지켜보던 와중, 주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심사장 안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이런 상황과 마주하게 되면 근처에 있는 이들의 상태창을 확인하는 것은 이제 거의 무의식적인 습관에 해당하는바.
대부분은 별문제가 없었으나, 극히 일부 가운데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섞여 있었다.
‘혈천신교?’
수십에 한 명꼴로 혈천신교의 끄나풀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교나 사도맹에서 나온 이들 역시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혈천신교의 이름이 주는 무게는 그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시험장 내부 전체 인원은 이백 남짓.
그중 특정 문파의 소속 무인 넷과 시험을 보는 후기지수 여덟이 혈천신교의 소속이었다.
다행히 구파일방이나 오대 세가 같은 명문 중엔 없었으나, 제각기 지역에서 제법 끗발이 날리던 유력 문파들이 섞여 있지 않은가.
주호가 눈여겨본 것은 주예향과 엇비슷한 시각에 심사를 시작한 목강휘였다.
절강의 유력 문파인 목천세가의 소가주로, 무공은 준수했고 외모 또한 수려했다.
대체 그런 곳의 소가주가 무엇이 부족해 혈천신교와 손을 잡은 것일까.
주호는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자신보단 훨씬 사정이 나은 그들이 아닌가.
하지만 이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곤 슬쩍 제 후기지수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산, 천후.
“……”
그 은밀한 전음에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악비산과 천후가 슬쩍 눈을 돌릴 찰나, 주호가 말을 이었다.
-반응을 보이지 말고 듣도록. 심사장 내부에 혈천신교의 인원 몇몇이 섞여들었다. 당장 정리하기 힘드니 인지만 하고 있도록. 혹여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이가 있다면 바로 보고하고.
악비산과 천후 둘 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심사에 집중하는 와중이라 눈치채지 못한 듯싶다. 그렇기에 주호는 몸을 돌리며 천후에게 한 줄기 전음을 날렸다.
-천후, 너는 오늘 일이 끝나는 즉시 지부로 가서 알려라. 화근은 미리 뽑아두는 것이 좋겠지.
-알겠습니다.
천후의 입술이 달싹이며 대답이 들려왔다.
악비산은 아직 사신문의 체계에 익숙지 않기에 그를 호명한 것이었다.
곧 주예향과 당소혜의 심사가 끝났다.
당연하게 나온 합격 통보에 두 소녀가 축하받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찰나.
“음.”
주호는 목강휘가 슬쩍슬쩍 그녀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 딴에는 은밀히 하는 듯했으나,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니.
곧 주예향과 당소혜가 필기시험을 신청하기 위해 내원으로 들어가자 목강휘 역시 그 뒤를 따라갔다.
“…….”
두 눈을 가늘게 뜬 주호 역시 발을 내디뎠다.
내원은 심사의 합격자만 들어올 수 있는 곳. 그렇기에 심사장보단 한산했고, 지나다니는 사람 역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안쪽을 들어간 주호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저 멀리에서 떠들고 있던 목강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날, 당 소저와 주 소저를 만나게 되어…….”
무엇이 그리 신난 것일까.
그 앞에 선 당소혜는 웃는 낯이었지만, 명백히 경계가 가득한 눈이었다.
주예향 역시 긴장한 눈치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두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오죽했으면 그 뒤쪽에 있는 제 오라버니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꽈아악.
성큼성큼 그쪽을 향해 뛰다시피 걸어간 주호는 목강휘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부에선 응당 정숙해야 함이다. 쫓겨나고 싶더냐.”
일반 관생이 치근덕거린다고 하더라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혈천신교의 끄나풀이 제 동생에게 수작을 걸다니.
주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며 말하자, 그를 알아본 목강휘의 머리털이 일순간 쭈뼛 솟아올랐다.
“아, 그게…….”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리며 이마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명백히 그를 알고 있는 눈치. 하지만 이내 태도를 수습하는가 싶더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올렸다.
“검절을 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심사에 통과해 들떠버리는 바람에.”
“이해하는 바이니 한 번은 넘어가 주겠다. 주의하도록.”
“옙.”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교관이다. 만나는 이마다 일일이 별호로 부를 셈인가?”
“…명심하겠습니다!”
목강휘는 기합이 바짝 든 태도로 대답했다.
직후 주호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지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난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 있기에 뒤쪽에 있던 당소혜와 주예향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발걸음을 옮겼다.
“…….”
주예향은 제 오라버니를 향해 아는 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에 지켜보는 이목이 너무 많았기에 배시시 웃는 것을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
떠나간 이들을 보며 주호는 턱을 쓰다듬었다.
정체를 숨긴 채 학관에 잠입하려는 혈천신교의 끄나풀을 청소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었던 찰나에 방금의 일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조금의 수고는 들겠지만, 결과를 생각한다면 거리낄 일은 아닌 듯해 보였다.
***
입관 심사의 닷새째 밤.
전체 일정의 절반가량이 끝났다.
필기시험을 비롯해 기타 절차를 생각한다면 아직 일정이 조금 남아 있었으나, 일차 심사에 합격한 이들은 벌써 자신이 학관생이 된 것처럼 들뜬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하남 외곽.
정천학관과 제법 거리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는 객잔에 모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자, 오늘은 즐기시오! 무사히 학관에 입관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내 한턱 크게 내는 것이니!”
목강휘는 얼큰하게 취한 모습으로 술이 가득 찬 잔을 허공 위로 들어 올렸다.
그에 화답하듯 객잔 내부에 있는 후기지수들이 왁자지껄하게 환호를 질러왔으니.
그 면면 모두 각 지역에서 제법 한가락 하는 문파의 출신이었다.
같은 정도를 걷는 것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들은 몇 해 전부터 은밀하게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이 있었다.
“목형, 심사 때에 당가의 여식과 같은 차례가 아니었소? 마주친 적이 있소이까?”
“당연히 보았지. 말문까지 텄네. 오랫동안 병마에 누워있던 것 치고는 미색이 상당하더군. 그 옆에 있던 소저도 제법이었지.”
“그 옆이라? 또 누가 있었소?”
“그, 있지 않은가. 주가장의 주예향이라고.”
“…주가장이라면.”
“그래, 청룡의 본가지.”
“위에서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최대한 드러내지 말라고 했었는데.”
“뭐, 우리가 신교의 무공을 익혔는가, 무슨 표식을 지니고 있는가. 받아먹은 영약도 이미 소화된 지 한참인데 어찌하겠는가. 날고 긴다는 고수들이 모인 무림맹도 이쪽의 존재 자체조차 눈치채지 못했거늘.”
목강휘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자리에 있는 후기지수들은 각자의 이유로 신교에 입교했다.
누구는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누구는 제 윗사람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누구는 부족한 무공을 메울 방법을 찾기 위해.
그렇게 최소 삼 년부터 오 년까지 모임을 가져왔지만, 지금껏 무탈하게 유지되었다.
“참, 청룡과도 마주했네.”
“검절이라. 어땠습니까.”
“확실히, 살벌하더군. 청혈도제가 당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도제니 뭐니 해도 결국 그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아닐세. 내가 듣기로는 산서의 일 역시 청룡과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있었네.”
“뭐? 그건 또 어디서 들었는가.”
“산서 지부에 지인이 있네. 거기서 듣기로는…….”
목강휘는 열띤 분위기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이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혈천신교.
이름은 마교 같이 종교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힘을 숭배하는 문파였다.
신교는 자신들에게 신세계를 약속했다.
단지 약속에서 그쳤더라면 정도를 걷는 몸으로 사악의 무리와 결탁하지 않았을 터.
목강휘의 경우엔 눈엣가시 같던 그의 형을 처리해 주었다.
그 덕분에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소가주가 되었고, 가문의 지지를 얻을 수 있던바.
그에게 있어 혈천신교라는 이름은 저 세외의 사마외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이었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주변에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후기지수들을 포섭했고,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뭐, 이제 시작일세. 내 윗선에서 듣자 하니 입관 심사가 끝나면…….”
목강휘가 어깨를 으쓱이며 윗선과의 연결 고리를 자랑하려던 찰나.
우당탕탕-!
밑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 객잔 자체가 혈천신교의 하남 지부 소속 건물로 사용되는바.
밑층엔 혈천신교 소속 무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터였지만, 싸움이라도 일어난 것인지 부산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쯧. 좋은 날이니 조용히 마시라고 했거늘. 내 다시 가서 일러두겠네.”
목강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풀어놓았던 검을 들었다.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한 발자국 걸쳤을 찰나.
후욱-.
짙은 피 냄새가 늦겨울의 바람을 타고 그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다른 이들 역시 그것을 맡은바.
갑작스러운 일에 모두 얼굴을 굳히며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 거기 누구 있느냐?”
끝이 갈라진 목강휘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을 찰나,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장내 가운데 울려 퍼졌다.
뚜벅, 뚜벅.
신기하리만큼 선명한 소리였다.
목강휘는 황급히 뒷걸음질치며 제 주위에 있던 후기지수들 사이로 물러났다.
곧 흑색 가면을 쓰고 있는 괴한이 올라와 장내에 있는 스무 명의 후기지수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쳤다.
철컥.
그러더니 이내 가면을 벗어버리곤 고개를 들어 흉흉한 눈빛을 보였다.
“여기에 모여 있었구나, 이 버러지 새끼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숨이 막힐 듯한 살기가 전신을 짓눌렀다.
그 가운데 목강휘는 괴한의 얼굴과 그 몸에 자리하고 있는 요소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 늑대처럼 흉흉한 눈빛.
입가부터 이어져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자상과 검 위에 달린 붉은 수실은, 그로 하여금 어렵지 않게 상대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게 해주었다.
“흐, 흑살대(黑殺隊)? 흑살대의 마랑(魔狼)이 어째서 이곳에…….”
“흑살대? 사도맹의 추살부대인 흑살대를 말하는 것이오?”
“마랑이라면 흑살대의 대주 아닌가. 그가 어째서 이곳에…….”
쿵.
마랑의 패검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박혀 들었다.
흑살대가 사도맹의 친맹주파인 것은 세력도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인바.
마랑은 입가를 비틀며 고개를 들었다.
“혈천신교라. 사도칠패와 결탁해 마교를 사칭하며 우릴 속여 넘기고 검마님을 음해했다지. 감히 우릴 건드리고 성히 넘어갈 수 있을 듯싶으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