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입관 심사의 날이 밝았다.
하남 시내는 심사를 보러 온 후기지수와 동행한 이들로 혼잡한바.
학관 내부 역시 곧 있을 입관 심사를 위해 준비 중이었다.
“정말, 회의에 나오지 않았을 때는 정말로 난처했다네. 다행히 수석교관님께서 나서 주셨기에 망정이지.”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이른 아침, 날이 밝자마자 학관을 찾은 주호는 담우양의 푸념에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단철량과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단숨에 입신지경을 돌파하는 것 같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며칠간 자신을 관조하며 그간 쌓아두었던 의문을 정리해나갔다.
길어야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으나, 이토록 오래 걸리리라는 것은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뭐, 어찌 되었든 이리 나왔으면 되었네. 얼른 수석교관님께 가보게나. 출근한다면 곧바로 찾아오라 일러 놓으셨네.”
“알겠습니다.”
담우양의 말에 주호는 곧장 수석교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교관을 총괄하는 자리인 만큼 그는 이른 시각에도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바.
그러던 중에도 주호가 찾아오자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왔구먼. 늦지 않아서 다행일세.”
“도중에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괜히 수고를 끼치는 바람에…….”
“괜찮네. 그럴 수 있는 법이지.”
팽대환은 관대히 이해해주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깨달음이란 인생의 기로에 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정천학관의 입관 회의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게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소득은 있었는가?”
“덕분에 적지 않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만일 팽대환이 그 중간에 강제로 자신의 사색을 방해했다면 상당한 손해를 입었을 터.
하지만 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자네가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나. 참, 자넬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닐 세.”
팽대환은 손바닥만 한 작은 무언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작년 입관 심사 때에 교관임을 뜻하는 표식과 같은 것이었지만, 그 위에 새겨진 내용이 사뭇 달랐다.
일급(一級).
“…이건.”
정천학관 일급 교관패.
매화선풍검 남사일이나 수석교관인 팽대환과 같은 등급이었다.
유력 문파의 장로나 혹은 저명한 고수들이 위치한 자리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년의 일로 교관들이 적지 않게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인해 은퇴한 것은 알고 있겠지?”
“예. 그래서 올해 역시 다수의 신임 교관을 뽑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와 같은 기수였던 사급 교관들은 전부 삼급 교관으로 승진 예정이라네. 사급은 새로 들어온 이들로 채워지겠지.”
“그렇다곤 하나 일급은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주호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팽대환은 거리낄 것이 무에 있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신진 고수 중 위명이 자자한 검절(劍節)이네.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가 꺾은 풍운검 그 친구는 올해 천무학관의 이급 교관으로 승진했다고 하더군. 그러면 검절은 당연히 일급이지.”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가벼이 말해오지만, 복잡한 정치적인 계산으로 도출해낸 결과이리라.
아무리 수석교관이라곤 하나 팽대환 혼자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니 관주인 설우진의 입김이 들어갔을 터.
물론 학관 내에서 더는 자신의 상대가 없었다.
설우진과 싸워도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파격적인 인사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남교관님의 적극적인 추천도 있었네. 뭐, 어찌 되겠나. 위에서 하라면 해야지.”
“…감사합니다.”
주호는 얌전히 그 표식을 받아 가슴에 부착했다.
일급 교관이라 적힌 그것을 보아하니 여러 감정이 들었다.
무림맹 말단 무사에서 어지간한 문파의 장로와 맞먹는 정천학관 일급 교관의 자리에 오르다니.
“일급 교관은 입관 심사에 직접 관여할 필요는 없네. 관리 감독 겸으로 심사장 전체를 담당하면 되는 것이야.”
“그렇습니까.”
“자네가 제일 젊기에 아마 얼굴마담으로 자주 나서게 되지 않을까 싶군. 아, 사흘 차부터는 교관의 임관 심사도 있다네.”
“작년의 수석교관님처럼 말입니까.”
직접 심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옥석을 걸러낼 작업은 중요했지만, 그 지루한 반복 작업을 다시 하는 것은 그로서도 기피하고 싶었으니.
“그래도 자네가 있으니 든든하군. 업무가 많이 밀려 심사까지 세세히 챙기기는 버거웠거늘.”
팽대환은 탁자 위에 쌓인 서류들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잘 부탁하네.”
“맡겨 주십시오.”
***
입관 심사가 시작되었다.
문이 열리자 수많은 인원이 학관 안으로 들어왔고, 곧 준비로 부산스러웠던 내부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아압-!”
설치된 연무장 위에선 몇 명의 입관 후보생이 교관을 상대로 치열한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밑으로 가족 혹은 같은 사문 소속의 무인들이 자리해 연신 응원을 건넸다.
“…….”
주호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내부를 돌아다녔다.
거진 일 년 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작년 이때쯤의 자신은 비동에서 나온 직후 마교와 사도맹의 지부를 박살내던 것을 끝내고 고향에 들렀다가 교관 심사에 응시하기 위해 하남에 온 직후였을 터다.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데 이런 감상이라니.’
마치 집으로 돌아온 듯한 친숙한 느낌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교관님!”
그렇게 심사장을 돌아다니고 있을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손을 흔들고 있는 선우연을 비롯해 아는 얼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경하러 왔느냐.”
“네. 둘 다 내일이 심사니까요. 어떻게 돌아가는지 견학하는 것도 좋을…….”
남궁연이 화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찰나, 그 시선이 주호 가슴팍에 있는 표식으로 향했다.
일급(一級).
곧 그것을 읽은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일급 교관이 되신 겁니까.”
옆에 있던 악비산이 미소를 지으며 말해왔다.
마치 응당 그랬어야 했다는 표정에 주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파격적인 인사긴 하나, 교관님 명성이 그러하니 없을 이야기도 아니군.”
“학관 측에서 결단을 내렸군요. 하긴 요새 천무학관이랑 자주 비교되긴 하니 차별점이 필요했겠지요.”
위천강과 당천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해온다. 천후와 철대환은 제 성격처럼 축하드린다며 짤막한 말을 전해왔다.
“…검절 주호?”
“일급 교관이 되었다네.”
“최연소가 아닌가. 엄청 파격적인 인사군.”
동시에 주위의 이목이 쏠렸다.
입관 심사 와중이었기에 그 불길은 화악 하고 번지지 않았지만, 점차 시선의 농밀함이 높아져 갔다.
현재 세간에서 내로라하는 신진 고수 중 검절이란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정천학관 측도 그것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홍보한바.
일급 교관이라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한 것 역시 주목도를 끌어모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천천히 보고 가거라.”
점차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주변 분위기에 주호는 살짝 눈짓하며 말했다.
“…오라버니, 밤엔 숙소로 돌아오시나요?”
“개관 전까지는 그곳에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주예향과 당소혜는 입관 전까지 이전 숙소에서 머무르게 되는바. 그렇기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호는 그 이후로도 심사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입관 심사 첫날인 만큼 혼란스러운 와중이기에 혹여나 소란이 날까 싶어 그런 것이었다.
다행히도 소란은 없었지만, 마주치는 교관마다 흠칫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급이라니. 그러면 이제 자네에게 존칭을 써야 하는가? 아니, 합니까?”
특히 담우양은 씩 웃으며 놀리기까지 했으니, 그 말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그래도 서로 직급의 구분이 있거늘. 사적인 자리는 몰라도 공적인 자리에선 구분해야 한다네. 내 다른 이들에게도 일러 놓을 터니 자네도 그리 알고 있게나.”
“새겨듣겠습니다.”
강호는 출신과 배분을 중요하게 따졌다.
하지만 담우양의 말대로 직급 역시 무시할 수 없는바.
이, 삼급 정도의 한 단계 차이면 모르겠으나, 일급 교관은 학관을 대표하는 위치였다.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선 서로 구분하는 것이 맞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시진 뒤.
새파랗던 하늘이 어느덧 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오늘은 이 정도로 끝인가.”
입관 심사일은 열흘.
첫날에 무려 사백 명이 넘는 인원을 심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첫날이라 그런 것인지 교관들은 기운이 넘쳤다.
이 이후에 저마다 술 약속을 잡으며 뿔뿔이 흩어지기 마련이었으니.
“자네도 어떤가. 승진 기념으로 가볍게 한잔하는 것이?”
담우양 역시 은근하게 권유해왔다.
입관 심사 일정 동안은 지나친 음주를 지양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렇기에 대부분 가볍게 한 잔씩 하고 쉬러 간다고 말해왔지만, 주호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동생이 기다려서 말입니다.”
“아, 내일 입관 시험을 본다고 했지?”
“예. 입관 심사 동안엔 외부 숙소에 있을 예정입니다. 대신 일정이 전부 끝나면 제가 크게 한턱낸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동생에게 힘내라고 전해주게. 다른 이들에겐 내 잘 말해놓지.”
“부탁드립니다.”
주예향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전부 돌아간 뒤였다.
주호는 마지막까지 학관에 남아 정리를 끝냈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가 돼서야 숙소에 돌아갔다.
“……?”
원래 숙소에 묵고 있는 것은 사신문에 있었던 다섯이었다.
천우희가 임무로 자리를 비운 이상 넷밖에 남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내부는 왁자지껄한 이야기 소리가 울려 퍼지는 와중이었다.
“…너희들.”
“아, 오셨습니까!”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씩 웃으며 주호를 맞이했다.
“교관님이 승진하셨는데, 기념 연회라도 조촐하게 열어야 하지 않습니까.”
위천강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식탁 위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음식과 술이 차려져 있었다.
“너무 과하다곤 했는데…….”
남궁연이 주호의 눈치를 봐오며 난처했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다들 분위기를 타서 그러한 것인데, 그녀 혼자 막아서긴 힘든 일이었다.
“이러지 않아도 괜찮거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주호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자자, 얼른 들어오십시오.”
“맞습니다. 응당 챙겨야 하지요.”
선우연의 말에 악비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들의 손에 잡혀 자리에 앉혀졌고, 왁자지껄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슬쩍 옆으로 다가온 주예향이 그를 불러보았다.
주호가 고개를 돌리자니, 그녀는 살짝 술에 취한 표정으로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안 했지만?”
“강호로 나오겠다고 마음먹은 건 잘한 일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주호 역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