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50화 (150/300)

#150화

‘검마(劍魔)라. 분명 머지않아 탈각에 이를 고수였지.’

단철량은 주호와 마주 서며 산서에서 쓰러진 비운의 고수를 떠올렸다.

사도맹의 맹주인 철혈패검 철무악과 형제로, 제 형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사도맹의 거두.

강단이 있는 사내였다.

맹에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싶었지만, 그런 고수가 주호의 손에 명운을 달리했다니.

주호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을 터다.

강호 역사상 이렇게 젊은 나이로 입신지경의 문턱까지 도달한 이가 있을까.

“그럼 가겠습니다.”

단철량의 머릿속에서 이어진 찰나의 생각은 나지막한 주호의 말에 끝을 맞이했다.

그가 그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주호는 천천히 발을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쉭-!

신검이 허공을 베어 가르며 단철량에게로 닥쳐왔다.

검기니 검강이니 요란한 것은 없었다.

대게 초고수들의 싸움은 그러한 법이었다.

가볍게 검을 몇 번 휘둘러보는 것으로 서로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곧 거친 금속음이 맹주전 가운데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소란에 이끌려오는 이는 없었다.

밖은 백호단이 지키는 와중이었고, 소리가 난다고 할지라도 맹주전 안을 들여다볼 간 큰 이는 없었으니.

“…….”

주호는 옅게 호흡을 내뱉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신경 하나하나를 곤두세웠다.

검마와 싸울 때보다 더욱더 진심이었으며, 여력을 남기지 않은 채 현재에 전념했다.

쉬이익-.

신검에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불필요한 감각이었으니.

오로지 눈앞에 선 단철량만에게 집중하며 그의 움직임을 아주 미세한 것까지 감각에 담았다.

그의 검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사고가 극한에 이른지라 느리게 보이는 듯했지만, 어느새 검 끝은 자신의 지척에 도달한 뒤였다.

스륵-.

주호는 내디딘 왼발을 비틀어 몸을 돌리고, 그 회전을 가미해 손목 위에 담았다.

찰나에 이루어진 기습과도 같은 발경.

일련의 과정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효율을 극대화 한 것이었으나 주호는 미간을 좁혔다.

‘살짝 밀렸다.’

제삼자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였다.

검과 검을 맞댄 서로만이 느낄 수 있었을 터.

검에 내공을 담지 않았다.

순수한 육체의 힘과 기술로만 겨루는 대련.

단철량의 육신은 노인의 것과 같이 노쇠하진 않았으나, 그것으로 끝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육신은 한참이나 젊은 덕분에 폭발적인 탄성을 자랑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밀렸다는 것은 초식이나 기술의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흡.”

주호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스스로 부족함을 알아차렸다는 것이 고무적인 일이었다.

손에 더욱 힘을 빼는 것으로 근육을 이완시켰고, 한 점으로 가는 폭발력에 집중했다.

선택과 집중.

무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바.

휘릭.

칠성에 다다른 청룡신공의 초식이 허공에 수려하게 펼쳐졌다.

경지에 오르니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결이 느껴진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초식이 맥박치며 생동하는 것을 느꼈고,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인식을 받았다.

“흠.”

그런 주호의 모습을 본 단철량의 눈이 빛났다.

기세뿐만이 아니라 검의 본질을 파악하는 구조가 달라진 듯했다.

‘검객(劍客)이기에.’

검객이란 검을 든 이를 말했다.

그들은 성장하면서 여러 경지를 구축했고, 검기니 검사니 검강이니 하는 것은 그것의 부산물이었다.

즉, 그 어느 것이든 검을 좀 더 날카롭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흔히 신검합일(身劍合一)이란 말이 있었다.

검을 자신의 연장선이자, 곧 신체 일부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는 경지였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정답은 아니었다.

검은 명백한 신외지물(身外之物).

베고자 하는 의지를 도와주는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그것은 꺾인 나뭇가지가 될 수 있었고, 얇디얇은 종이가 될 수 있었다.

대장간에 방치된 이가 빠진 낡은 검 역시 그러할 지고, 주호가 든 신검이라 불리는 검 또한 그러할 것이었다.

즉, 검을 들었다고 해서 검객이 아니었다.

베고자 하는 의지로 들었기에 검이 되는 것이었으니.

많은 이들이 그것을 놓쳤다.

그렇기에 목표로 한 바에서 멀어지고, 설사 도달하더라도 자신의 과오를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중심에 놓았을 때가 돼서야, 진정으로 그 본질을 깨달은 것이니.

“그것을 어검(御劍)이라 하느니라.”

그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허공에 검을 띄워 적에게 날린다고 해서 이기어검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검의 의념을 품지 못한다면, 그저 검을 날렸을 뿐인 비검술(飛劍術)이 되었다.

물론,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고수가 어검의 묘리를 이해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더욱이 어검은, 입신지경이라 적힌 푯말이 걸린 길을 걸어가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우웅-.

신검이 울음을 토해냈다.

마치 자신이 처음으로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듯했다.

그 날카로움은 검기나 검강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호는 무아지경에 잠겨 검을 휘둘렀고.

캉-!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세워졌다.

“축하한다. 입신지경으로 드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구나.”

단철량은 강호에 새로운 별이 떠오른 것에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

“…언제 나오려는 걸까요.”

주예향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입관 시험은 하루 전날까지로 다가왔다.

주호 역시 교관으로서 심사 역을 맡았지만, 무림맹에 다녀온 뒤로부터 쭉 방 안에 틀어박힌 뒤였다.

물도 음식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그저 그 안에 머무를 뿐이었다.

이틀 전에는 학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정천학관의 수석교관이라는 팽대환까지 다녀간바.

그는 주호의 상태를 보더니, 나중에 나온다면 자신이 왔었다고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아마 무슨 기로일 테지.”

“…지금도 충분히 강하신데 여기서 더 얼마나 강해지시려고 그러는지.”

선우연의 말에 당천유가 사뭇 두렵기까지 하다는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일행보다 늦게 출발한 당천유는 바로 전날 하남에 도착한바.

하지만 그는 혼자의 몸으로 오지 않았다.

“향아, 네 오라버니가 그렇게 잘생기셨다며.”

“그렇긴 하지. 직접 보면 깜짝 놀랄걸?”

당소혜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형지독에 중독되어 침상 생활을 하던 그녀는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가의 가주인 당정학이 천금을 쏟아부어 원기에 좋은 약재며 영약이며 모두 사들여 제 딸에게 먹였다.

그렇게 몇 달간 재활에 힘썼고, 지금은 완벽하게 회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었다.

두 소녀의 대화를 보고 있던 선우연은 제 친우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말했다.

“자네, 고생 좀 하겠군. 향이는 그래도 교관님의 비호가 있지만, 소혜는 저리 이쁘장하니 치근덕거리는 놈들이 많을 테지 않은가.”

“…집적거리는 놈들은 최소 사흘은 피똥싸게 만들어줄 것이네.”

당천유는 이미 상정해둔 바라는 듯 복통을 유발하는 독인 단장산이 담긴 병을 만지작거리며 귀기 어린 눈으로 답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한 동생이었다.

마음 같아선 일 년 더 요양하면서 준비를 했으면 좋겠지만, 올해로 딱 약관에 이르는 나이인 것이 문제였다.

적기에 입관하고 싶다며 애원해오는 것을 차마 당정학과 당천유 부자는 뿌리칠 수 없었다.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중독되어 침상에 누워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그들이 하남으로 떠나기 전의 밤.

당정학은 은밀히 제 아들을 찾아가서 말했다.

“아들아, 당가의 가주로서 네게 명을 내리마.”

“말씀하십시오.”

“소혜에게 접근하는 무지렁이들을 전부 찢어발겨라. 뒷감당은 내가 하겠으니.”

“…명 받들겠습니다.”

당천유는 아무래도 그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서 단장산 정도로 타협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향이가 똑 부러진 것 같아 다행이야.”

“그건 그럴세.”

당소혜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몰랐다.

행여나 얼굴만 반반한 녀석에게 마음이라도 빼앗겨버린다면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음,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네. 네 오라버니 덕분에 내가 겨우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금방 나오실 거야.”

동년배에 서로 구김살 없이 사랑을 받고 자라온 둘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후기지수들의 관심은, 곧 내일 있을 입관 심사로 옮겨졌다.

“교관님이 나오시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뭐, 학관 측도 이해해주지 않겠나. 검절 정도 되는 고수의 깨달음 과정이니.”

“수석교관님과 친분도 있으니 괜찮을 거예요.”

“아니면 우리가 대신 심사역을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건 그것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이야기지만.”

선우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실력으로는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아무래도 여러 문제가 있었다.

특히 구파일방이나 세가연합 같은 명문 정파 쪽에 나도는 은밀한 이야기나 암묵적인 이해관계도 있지 않은가.

교관끼리 쉬쉬해도 새어나가 잡음이 생기는 판국에 관생까지 연루시켰다가 문제가 일어난다면 학관 측에도 골치가 아플 것이 분명했다.

“뭐, 이 둘이라면 어렵지 않게 통과하겠지.”

악비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할 찰나.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말이 끊겼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

며칠 만에 방에서 나온 주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듬성듬성 자란 수염이 삐죽 솟아 있었다.

눈가는 짙은 음영이 잔뜩 낀 상태. 눈빛만은 생생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모의 빛은 숨길 수 없던바.

“…와.”

예상보다 더 수려한 외모에 당소혜가 작게 입을 벌렸다.

“오라버니!”

주예향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달려갔다.

다른 이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먼저 가던 그녀가 움찔하며 멈춰 서는 것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윽, 냄새.”

“…많이 심하느냐.”

주호는 민망한 표정으로 제 몸의 냄새를 맡았다.

어느 정도 날 거라곤 생각했건만, 저리 경기를 일으킬 줄은 몰랐다.

“얼른 씻고 오세요. 아, 밤이라 차가운 물밖에 없을 텐데.”

“그건 괜찮으니 되었다.”

남궁연의 말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우면 차가운 데로 하면 되었고, 필요하다면 열양지기로 데우면 그만이었으니까.

“…후우.”

주호는 오랜만에 느긋이 홀로 시간을 즐겼다.

단철량과의 대련에서 얻은 화두는 지금껏 막힌 물길을 단숨에 뚫어버렸다.

그렇다고 단숨에 입신지경에 오른 것은 아니었으나, 천천히 그것을 곱씹으며 나아가면 큰 소득이 있을 터.

“…어찌 되었건, 좋구나.”

오늘 하루는 만끽하기로 한 주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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