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 친구, 안 본 사이에 낯짝이 상당히 두꺼워졌어.”
단철량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간 생각해보면 너무 겸손한 면모가 있었다.
나이가 젊은 신진 고수들은 다 저마다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쳐나지 않았던가.
나이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면모를 보였기에 그 대범함이 살짝 아쉬웠으나, 지금과 같은 새로운 모습을 보자니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참으로 다사다난한 연말이기 짝이 없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다사다난.
그 단어만큼 딱 어울리는 말이 없기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이쪽의 이야기를 먼저 하겠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자네의 조언대로 믿을 수 있는 이들로 연락망을 구축했네. 다들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물밑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구심을 지니고 있더군.”
“그렇겠지요. 그 누구보다 강호를 오래 살아왔던 분들이시니.”
“그들 가운데선 배신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그렇습니까.”
“아무렴, 수십 년을 굴러먹은 노인들이니. 하지만 그들이라 할지라도 검절이 신비 문파의 일원이라면 그들도 깜짝 놀랄 것이야.”
단철량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천학관의 교관으로 유명한 검절이 중원을 아우르는 사신문의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역시 간자를 색출해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군요.”
“그렇지. 자네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곳이라네. 그리고 무림맹 내부에도 있을 수 있으니 말이야.”
“남궁세가의 경우도 있으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그 무리를 솎아낼 방법이 있다고 했지.”
“예. 저는 당장이라도 가능하지만, 맹주님께서 안 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말 그대로 애로사항이 많지. 순식간에 해치우지 않으면 그들도 눈치채고 공식적으로 반발을 해올 걸세. 색출해낸다고 가정하면 정말로 순식간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지.”
“목록이라도 미리 작성해야겠군요.”
“허나, 자네가 맹 전체도 모자라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 쪽을 전부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실 가장 좋은 것은 직접 발품을 파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눈치채거나 반발이 일어나기 전에 순식간에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으니.
혈천신교나 사흉수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면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될 것이 분명할뿐더러 마교의 칼날이 턱밑까지 닥쳐온 상태에서 다른 것이 신경을 쏟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나중에 수뇌들이 모일 자리를 마련하겠네. 설마 그럴 린 없겠지만, 결탁한 이들이 있을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단철량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그러곤 자신의 탁자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흘깃 바라보더니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산서에서의 일을 좀 듣고 싶네. 자네가 보낸 서신에 간략히 적혀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접 듣는 것이 좋지 않겠나.”
“…고생이 많으셨나 봅니다.”
“별것 아니라네. 며칠간 철야로 보고를 받고, 직접 사찰도 좀 나서고, 황실 관리한테 좀 들볶이고…….”
별것 아니라고 했지만, 쌓인 것이 많은지 단검으로 푹푹 찌르듯 말을 내뱉었다.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건데, 사실 그리 큰일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주호는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황제가 나선 것 때문에 단철량이 직접 산서에 행차한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 한 일이라곤 하나 번거롭게 만들었으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황명이 내려왔으니 어쩔 수 있겠나.”
“그것도 다 옛말인가 보군요.”
“사실 황제가 나선 것은 무고한 백성이 죽은 것보다 제 체면이 상했기 때문이지.”
성내에서 건물 몇 채가 무너져 내리고 무고한 백성 수십이 휘말려 죽거나 다쳤다.
황제의 분노는 무림인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바.
단철량이 굳이 직접 나선 것도 그 의혹을 해명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산서로 향한 것이 마교와 사도맹이 은밀한 회동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해서였습니다.”
“그 가운데 검마가 걸려든 것이고?”
“예. 전서에 적어놓았던 대로입니다. 마인들은 사도맹주가 중독된 것이 자신들의 소행이며, 해독을 대가로 정마대전이 일어났을 시 그들 쪽에 붙기를 요구했습니다.”
“흠…….”
단철량은 긴 신음을 내뱉었다.
어느 것 하나 흘려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천망독이라는 것엔 더 단서가 없었는가?”
“서신에 적어놓은 것이 끝입니다. 그 이후부턴 발각되어 전투가 시작되었는지라.”
“입신지경의 고수마저 중독시킬 독이라.”
“…가능한 일입니까?”
입신지경.
말 그대로 인간을 초월해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비유적인 말이었지만, 주호는 선뜻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자신도 어지간한 독에 저항력이 있는바.
순식간에 독효가 퍼진다고 하여도 충분히 몰아낼 자신이 있었다.
“세상에 절대는 없네. 이것 역시 아주 어렵고 힘들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단 노인께서도 조심하십시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연락을 받고 그것부터 가장 먼저 조사했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고.”
다행히 그러한 낌새는 없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사도맹은 현재 완전히 반으로 갈라진 상태라지. 부맹주를 중심으로 한 친맹주파와, 신흥 세력은 사도칠패를 중심으로. 어찌 되었든 어느 한 군데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 이상 그 분열은 계속되겠지.”
“어느 쪽이 승리하리라 보십니까.”
“사도맹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철혈패검의 입지는 절대적이었네. 하지만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어.”
“그렇다면…….”
“그렇다 할지라도 당장 결착이 나진 않겠지. 사도칠패는 머리가 너무 많아. 지금 당장은 서로 같은 배를 탔다고 할지라도 막상 사도맹을 차지하면 등 뒤에 검을 찔러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거든.”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협력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욕심 많은 놈들이 서로 웃으며 손을 잡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네. 최소 그 절반은 갈려 나가겠지.”
단철량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사도맹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뭉친 단체. 당장은 적대 세력이 있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겠지만, 수틀리면 가장 먼저 배신할 이들이리라.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걸세. 자네가 검마를 죽였으니.”
마교의 제안은 결국 사도맹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친맹주파는 자신들의 기둥 중 하나인 검마가 꺾였으니 큰 손해를 본바.
사도칠패가 득세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황을 보면 사도칠패 쪽에 마교나 혈천신교의 입김이 닿았음은 분명하겠지요.”
“그렇지. 나였더라도 그러했을 테니까. 실제로 사도칠패가 세력을 부풀리는 과정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급진적이었어. 필시 어딘가의 지원을 받지 않았더라면 성립할 수 없던 것이야.”
“…철혈패검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친맹주파의 가망은 없는 것이군요.”
“당장은 존속하겠지만, 시간문제겠지.”
단철량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무엇을?”
“무림맹 쪽에서 친맹주파를 지원하는 겁니다.”
“계속해보게.”
사도칠패에 마교나 혈천신교의 입김이 닿아 있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이상 그들과 양립할 순 없다.
그렇다면 친맹주파를 지원해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한다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흠.”
단철량은 그 말을 곱씹었다.
검토할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옛적부터 은밀한 연락망이 있었지. 당장 급한 건 그들일 테니, 그런 관점으로 한 번 연락해보겠네.”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하월벽이 부탁한 사안을 전달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점심때는 훌쩍 지났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안이 사안이라 그런 것인지 벌써 두 시진은 넘게 지나있는바.
창밖으로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은 이미 정오가 한참 지났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면.”
“그러면 가볍게 식사라도…….”
“가볍게 한 수 나눠보는 것도 좋겠군.”
“…어째 항상 이런 흐름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급격하게 꺾인 이야기의 궤도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작년, 교관으로 일할 때도 간간이 시간을 내어 들릴 때마다 매번 이러곤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단철량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싫은가? 현역 무림맹주와 대련할 기회는 그리 흔치 않은데 말이야. 당장 밖으로 나가도 원하는 이가 수두룩한데.”
“…제가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구먼.”
단철량은 미룰 것 없이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눈으로 뒤덮인 정원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나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겨울이 한창인지라 얼어붙은 나뭇가지는 이파리 한 장 없이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단철량은 잠시 멈칫거리더니 이내 손을 거두곤 검대에 매인 검을 뽑아들었다.
“어째서 오늘은 검을 쓰십니까?”
주호는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전까지 이래야 멋이 산다는 말과 함께 나뭇가지를 꺾어 들지 않았던가.
“…크흠.”
단철량은 말을 아꼈다.
나뭇가지로 상대하기엔 주호의 경지가 너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낭패라도 볼까 싶어 걱정이 든 것이었다.
“이제 자네도 어느 정도 경지를 이루었으니 그에 맞는 예우를 보여야 하지 않겠나.”
“그런 것치고는 대련할 때마다 신나게 몰아세우셨던 것 같은…….”
“누가 그랬단 말인가.”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단철량 앞에 섰고, 이내 신검을 빼 들었다.
‘과연.’
겨울바람보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기세를 느낀 단철량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가끔 있었다.
세상이 내린 듯한 운명 같은 존재가.
상계 가문 출신으로 무림맹 말단 무사가 한계였지만, 기연을 얻어 세상을 좌시하는 고수가 되었으니.
하지만 강호는 넓었다.
지금 시대에 주호와 비슷한 기연을 얻은 이 역시 여럿 있을 터.
하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기연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그런 부류에 속한바.
심지어 자신에게 기연이 찾아왔는지도 모르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주호는 달랐다.
겸손할 줄 알았고, 자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수그렸다는 것이 아니었다.
단호할 땐 단호했고, 나서야 할 땐 나서주었다.
양지에선 혁혁한 공을 세우며 검절(劍節)이라고까지 불리지 않은가.
음지에선 강호의 신비 조직인 사신문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니.
세상은, 바라는 자를 세우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