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하남의 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만큼 길가에 눈이 쌓일 겨를이 없었다.
그 가운데 오랜 여정을 끝으로 하남에 돌아온 이들이 있었으니.
입관 시험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주호 일행은 사신문을 떠나 하남으로 되돌아왔다.
주호와 남궁연, 그리고 악비산은 학관 내부에 숙소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천우희와 주예향은 외부인인바.
그렇기에 사신문에서 마련한 객잔의 숙소에 기거하며 여독을 풀었고, 하남에서의 둘째 날이 되었다.
“후우.”
아직 날씨는 한겨울인지라 찬 바람이 일었다.
입김을 내뱉으면 새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추위 속, 주예향은 이른 아침부터 객잔 뒤편 공터에서 수련에 삼매경이었다.
사신문에서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지만, 시험의 날짜가 다가올수록 긴장이 드는 것인지 부쩍 말수가 줄어든 그녀였다.
그렇기에 스스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인지 평소 하던 것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이며 검을 떨쳤다.
“남궁 소저는 어때 보이오.”
“글쎄요. 이렇다 할 이변이 없다면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 같은데.”
숙소의 이층.
남궁연과 악비산은 창밖으로 보이는 주예향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주호와 천우희는 사신문의 일 때문에 훨씬 더 이른 시각에 나선바.
아침 식사 이전까지 돌아온다고 했기에 느긋이 시간을 보냈다.
곧 동이 완전히 텄을 때, 주예향의 수련이 끝남과 동시에 주호 역시 숙소로 되돌아왔다.
“어? 천 언니는요?”
“일이 생겨서 나갔다. 인사를 못 해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군.”
“그런가요. 아쉽네요.”
주예향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곧 그들은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어제 하루는 여독을 풀기 위해 한껏 휴식을 취했다.
이제 아흐레만 지나면 입관 심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주호 역시 심사관으로 그 자리에 배정되었다.
더군다나 작년에 있었던 마교의 습격으로 교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사망하거나 상처를 입어 은퇴했다.
그러니 작년처럼 새로운 교관도 많이 뽑을 것이기에 심사하는 동안 많이 바빠질 예정이었다.
“…….”
이전이라면 식사 중에도 활발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눴을 주예향은 며칠 사이 그랬던 것처럼 조용했다.
‘정신이 심사에 쏠려 있군.’
입관 심사는 작년과 같이 무공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차로 무공을 겨루고, 이차로 이론 및 여러 가지 적성 시험을 치르는바.
주호는 걱정하지 않았다.
워낙 명석한 아이인지라 일차만 통과한다면 그다음은 일사천리일 것이리라.
하지만 너무 과한 긴장을 안고 있는 것도 해가 되는 요소였으니 적당히 풀어줄 생각이었다.
“향아. 며칠 여유가 있으니 학관 구경이라도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학관 구경이요?”
그 말에 잠자코 식사 중이던 주예향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표정만 보아도 구미가 당김을 나타냈다.
이전에 왔을 땐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있었던지라 힘들었지만, 지금은 휴관 중인데다가 주호의 입지가 올라간 상황.
동생에게 학관 구경을 시켜준다고 해서 뭐라 할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그래도 될까요?”
“물론.”
주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직후 무언가를 퍼뜩 떠올렸다.
‘…이런.’
아침 식사 이후 무림맹에서 단 노인 아니 맹주님과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 의견을 꺼낸 것이었지만, 그것을 간과하고 있었으니 낭패일 따름이었다.
그 옆자리에 있던 남궁연은 주호의 미묘한 반응을 눈치챘다. 그렇기에 고개를 들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니면 우리랑 다닐래?”
“언니랑요?”
“응. 다른 사람들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다 교관님 밑에서 사사 받은 후기지수들이야.”
“흠.”
남궁연의 말에 악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에서 관광을 하던 이들 역시 개관을 앞두고 하남으로 돌아왔다.
하루 여독을 풀고 만나기로 약조한바.
딱히 특별하게 할 일은 없었으나, 주호의 동생이라면 그들 역시 극진하게 모실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향이한테는 교관님보다 저희랑 다니는 게 더 편할걸요”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주호는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어 악비산을 바라보았다.
“비산.”
“예.”
악비산은 기합이 바짝 든 자세로 고개를 들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본 주호는 스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행여나 그들이 향이에게 집적거리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특히 위천강.”
-허튼 마음을 품으면 사지를 찢어버리겠노라 전해라.
끝에선 주예향에게 들리지 않게 전음으로 말했다.
“…….”
그 살벌한 기색에 악비산은 살짝 움찔했으나, 이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야. 교관님께 이런 아리따운 누이가 있었다니.”
“교관님도 외모로 유명하지 않은가. 가족이라면 충분히 이해되지.”
남궁연과 악비산이 주예향을 데리고 합류하자 위천강과 선우연은 살짝 들뜬 표정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주호의 예상대로 그들은 지대한 관심을 드러낸바.
더군다나 주예향은 남궁연이나 천우희처럼 화려하고 흐드러지게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주씨 일가의 핏줄을 확실하게 물려받아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모를 지닌 미인이었다.
“입관 시험에 들어오면 후배가 되는 건가.”
“우리 후배라.”
천후의 말에 철대환 역시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공자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건가요?”
“그 친구는 며칠 늦게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심사 하루 이틀 전에는 도착하겠지요.”
“그런가요.”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당천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기에 남궁연은 관심을 거두곤 주예향에게 시선을 옮겼다.
“알겠지?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말했듯 외모만 보고 넘어가면 안 돼. 중요한 건 그 됨됨이야. 겉만 번지르르한 언행에 꾀이면 큰일 나니 꼭 조심해야 해.”
“명심할게요!”
주예향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후기지수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남궁 소저. 우리가 어떠하다고 그러시오.”
“그러게나 말이오. 사실 우리 정도면 어디 가서 꿇리는 일은 없지 않소이까.”
위천강과 선우연이 억울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문은 둘째 치고, 무공, 외모, 그리고 인성까지.
학관 내에서 자신들보다 나은 이가 없지 않은가.
비단 그 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악비산, 철대환, 천후 역시 공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왔으니.
“당신들, 처음에 교관님 밑으로 따라와서 절 귀찮게 한 일, 잊으셨어요?”
“…크흠.”
남궁연이 날 선 시선으로 노려보자, 다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작년 초.
실전의 이해 과목에서 가르침을 받을 교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따라 주호에게 우르르 몰려가지 않았던가.
천후만은 제 스승의 전언으로 남궁연보다 더 빨리 주호를 선택했기에 할 말이 있었지만, 남궁연을 향한 연심이 없다고 할 수 없기에 입을 닫은 채 얌전히 있었다.
“그래도 잘 부탁드려요. 아직 심사에서 통과하진 못했지만, 미리 인사드릴게요!”
“그래, 우리 후배님.”
발랄한 분위기로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주예향의 모습에 선우연은 사뭇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주예향과 후기지수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주호는 무림맹으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칼바람이 불고 절로 몸이 떨릴 추위임에도 거리는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잠시간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구경하던 주호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고, 곧 무림맹 입구에 도달했다.
“고생하시오.”
입구를 지키던 무사에게 슬쩍 패를 들어 보이고는 그대로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이었더라면 세세히 출입을 검사했겠지만, 단철량이 준 맹을 상징하는 패는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흠.”
무림맹은 역사가 깊은 만큼 그 모습에 변함이 없었다.
삼 년, 아니 사 년 전, 그리고 일 년 전, 그리고 오늘까지.
당도한 계절만 달라졌을 뿐이지 전각이 수두룩하게 자리한 그 광경만은 여전했다.
맹에 들어온 주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 안에 수많은 조직이 있었지만, 오로지 한 곳을 향했고 이내 내원에 접어들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다시금 그가 패를 들어 올리자 입구를 지키던 무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문과 달리 제법 기세가 느껴지는 고수로, 주호 역시 고개를 끄덕여 인사로 화답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
무림맹 맹주전.
맹주전엔 특이하게 호위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 실상은 현무단의 고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일류 경지를 뛰어넘는 고수로, 주호가 그 근처에 다다르자 시선이 쏠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호는 고개를 들어 안쪽을 바라보았다.
손님을 맞이하는 이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 맹의 거인과 마주했다.
“왔는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야 뭐 항상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돌아다니는 것은 자네지.”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간간이 들리겠다고 해놓고 서신만 보낸 채 몇 달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주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단철량은 손수 차를 내어왔다.
서로 쌓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시간은 넉넉했으니 급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그 맞은 편에 앉아 단철량이 내온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겨울에도 절경이로군요.”
“그럼. 누가 관리하는 것인데.”
“…관리하는 인원은 따로 있지 않습니까?”
마치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그 태도에 주호가 두 눈을 가늘게 뜨자, 단철량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한다곤 하지 않았네.”
“하하.”
그 뻔뻔스러운 대답에 주호는 웃음을 토해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단철량과 있으면 마치 친할아버지를 마주한 듯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졌으니, 그저 좋을 따름이었다.
“서로 할 말이 많겠지.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어떻겠나.”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검마와의 충돌과 사도맹의 천라지망, 그리고 황실의 관여.
사도맹주를 중독시킨 천망독과 천마신교의 발호까지.
할 이야기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그렇기에 단철량은 그 가운데서 가장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탈각 직전이로군. 검마와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인가?”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실제론 제 몸 안에 자리한 신마의 영향이 제일 컸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제가 워낙 재능이 뛰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도리어 뻔뻔하게 나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