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빛조차 벨 수 있다 하여 분광검이라 불렸다.
휘둘러지는 검의 궤적은 끝에서부터 마치 신기루처럼 일렁거리며 허공으로 흩어질 따름이었으니.
주예향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름답다는 감상을 품었다.
자신은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인데, 그 변화가 신묘하고 놀랍지 않은가.
처음엔 단순히 제 오라버니의 발자취를 좇기 위해 시선을 두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이제 그녀에게 있어 인생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쉬시식-.
분광십이검의 초식이 허공에 날카롭게 수놓아진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파공성이 퍼지며 수 갈래로 나뉘어 닥쳐갔다.
“제법인데.”
그 앞에 서 있던 천우희는 옅은 미소와 함께 감탄을 내뱉으며 검 끝을 모조리 피해버렸다.
주예향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발을 내디디며 재차 검을 휘둘렀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조차 스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휴. 아직은 연속해서 초식을 펼치기 너무 힘드네요.”
주예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머리로는 지금의 성취 또한 얕볼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나, 사람인 이상 더 앞의 경지에 욕심이 생겼다.
천우희는 그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예전에 분광십이검 같은 쾌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었지?”
“호흡이요.”
“그래, 호흡이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은 대게 그 한계가 비슷하지만, 무인들은 달라. 경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그 시간이 차이가 나지.”
“차차 나아질 거라는 이야기이신가요?”
“그래. 그리고 단순히 호흡의 한계뿐이 아니야. 같은 한 호흡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초식의 활용도가 판이하게 달라져. 향이 너는 한 호흡에 분광검법 한 초식을 겨우 펼쳐내지만, 나였더라면 그 이할도 채 되지 않은 호흡에서 끝냈겠지.”
“…그렇군요.”
주예향은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서 홀로 수련하던 남궁연을 바라보았다.
천우희가 활활 타오르는 불같다면, 남궁연은 고요히 흐르는 물과 같았다.
단 하나의 비틀림도 없었고, 단 한 번의 비효율이 없었다.
마치 완벽이라는 의념을 형상으로서 빚어낸다면 그녀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저렇게 되고 싶어?”
주예향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선망의 시선을 읽어낸 천우희가 씩 웃으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너무…….”
자신을 위해 굳이 시간을 써가며 가르침을 내려주는 천우희를 두고 한눈을 판다는 것은 명백한 실례인바.
그렇기에 주예향이 허둥지둥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천우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목표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야. 그리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니까.”
“…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요?”
“그래. 나나 네 오라버니가 워낙 특출나야지. 지금 네 성장세면 몇 년 안에 제법 성취를 이룰 수 있을걸?”
천우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주예향이 본격적으로 무공을 익힌 것은 불과 몇 달에 불과했다.
하지만 벌써 삼류를 뛰어넘어 이류 완숙에 이르렀으니, 태생부터 무림 문파에서 자고 나라 수련한 어지간한 후기지수보다 더 뛰어나지 않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요?”
어느덧 수련을 끝낸 남궁연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땀을 흘림에도 한점 흐트러짐 없는 외모인바.
주예향이 잠시 그것에 눈길을 빼앗겨 있을 찰나, 천우희가 장난기 어린 미소로 말했다.
“향이가 연 동생한테 흠뻑 빠졌나 봐. 지금도 애정이 듬뿍 담긴 눈 아니야?”
“…아니, 언니! 놀리지 마세요!”
주예향은 그 말에 허둥지둥하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남궁연 역시 작게 웃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 애정이라면 환영이지.”
“…연 언니도 놀리시고.”
주예향은 짐짓 삐쳤다는 듯 고개를 돌렸으나. 이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뭘 하고 계실까요?”
“글쎄. 한창 재활 중이지 않으려나?”
“아마 그러실 걸요. 산서에 계실 때도 하루 대부분을 그랬으니.”
“…산서에서도요.”
주예향은 살짝 의기소침해졌다.
그녀에게 있어 주호는 무적이었고, 대적할 상대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기에 얼마 전 그가 넝마가 되어 실려 왔을 땐 정말로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으니.
곁에 천우희와 남궁연이 없었더라면 펑펑 울며 제 오라버니에게 매달렸으리라.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무인에게 있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해. 향이는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렇지만…….”
천우희는 그녀의 얼굴에 서린 감정을 읽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무인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간다. 그렇다는 것은 즉, 자신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주호뿐만이 아니었다.
천우희 역시 지금까지 사선을 수두룩하게 넘어왔으며 자신을 막아선 이들을 짓밟고 죽은 뒤에야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풍운강호의 꿈을 안고 출도한 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대개 현실의 일은 이러한 법이었다.
“…그런가요.”
주예향은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그러한 각오를 하며 무인이 되고자 한바.
주호의 그런 모습을 보고 흔들렸지만, 확고한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향이 정도면 입관 시험은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어쭙잖은 녀석들은 모두 오십 초 안에 꺾어버릴걸? 분광십이검의 초식을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빠를 테고.”
“정말요?”
그녀들의 칭찬에 축 처져 있던 주예향의 기분이 단숨에 치솟았다.
“응. 원래는 아슬아슬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잘해줬어.”
주예향은 하루 대부분을 수련에 투자했다.
비단 많은 후기지수가 그러했지만, 집중의 밀도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후발주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바.
그렇기에 그 간격을 메우고자 더 열을 들였고, 훌륭한 스승의 인도와 맞물려 뚜렷한 결과를 낸 것이었다.
“정확한 건 네 오라버니한테 물어봐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가볼까요?”
주예향이 두 눈을 빛내며 물어오자 천우희와 남궁연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슬슬 점심이니 겸사겸사 데리러 가면 되겠네.”
“그렇네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들은 곧바로 주호가 자리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당연히 홀로 조용히 재활을 위해 수련하고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근처에 갈수록 들려오는 격렬한 칼부림 소리에 주예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련이라도 하는 걸까요?”
“…도, 아니 창인가. 그러면.”
소리로 보아 상대가 쥔 것이 검이 아닌 것을 파악한 남궁연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윽고 연무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을 찰나.
“응? 우희 아니더냐. 주호 저 친구를 보러 왔느냐. 거기에 남궁 소저랑 향이까지.”
벽에 기대서 주호와 악비산의 비무를 지켜보던 양인철은 갑작스러운 방문객들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호께서, 그리고 일장로님도 계셨나요.”
천우희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주호가 그렇게 되어 돌아온 직후부터 곧잘 뭉쳐 다니곤 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들이었다.
무슨 연유에서 그런 것인지 슬쩍 물어봤지만, 둘 다 모호하게 대답을 회피한바.
그저 새로운 초식을 시험하던 중 일어난 사고라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 상처가 깊지 않았는가.
주호까지 그렇게 말해왔기에 더는 추궁할 구실이 없었으나, 심증은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와.”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주예향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비무에 감탄을 내뱉었다.
내공은 사용하지 않은 채 순수 육체의 실력으로 부딪치는 싸움인바.
이때까지는 휙휙 지나가는 광경에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간 무공을 수련하며 안목도 높아진 것인지 서로의 공방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었으니, 언젠가 자신도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흐음.”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연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비산의 기세가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창술의 정교함은 뛰어나도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이 있었거늘 지금은 그러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악비산이 사신문의 무공을 전수받았음은 알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백호 양인철의 계승자로 다음 대의 백호란 이름을 물려받기 위해 그러한 것이리라 들었다.
‘…나도.’
남궁연은 제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이전까진 남궁세가의 이름에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비록 그 직계 무공인 제왕신공을 배우진 못했지만, 창궁무애검법만 해도 강호를 대표하는 검공 중 하나가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 많은 회한이 그녀로 하여금 고민을 들게 했다.
단순히 제왕신공을 익히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무공 자체에 망설임이 서렸다.
‘다른 무공을 익힐 기회가 있다면.’
내심 자신만의 무공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스스로 대종사의 그릇이 될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미 완성된 세가의 무공은 그녀의 눈에 차지 않을 따름이었다.
“…다들 와 있었나.”
이윽고 비무가 끝났다.
악비산이 바닥에 쓰러져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찰나, 마찬가지로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은 주호가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무엇이지?”
주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공에 관한 것은 천우희나 다른 이들도 있으니 그들이 대답해줄 수 있을 터.
그렇다는 건 그 이외의 요소라는 소리. 그런 동생의 모습이 기꺼웠기에 무엇이든 대답해주고자 하였다.
“저는, 입관 심사에 통과할 수 있을까요.”
“음.”
주호는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제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상태창]
이름: 주예향
별호: -
직업: -
나이: 열아홉
소속: 주가장
무공: 분광십이검
경지: 이류(五/十)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上上
놀라울 정도의 성장이었다.
고작 이 몇 달의 시간 동안 이루어냈다고 믿기지 않을 결과.
영약의 지원과 고수들의 가르침이 있다 한들,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열심히 했구나.”
“네. 정말로 열심히 했어요.”
주예향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주호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심사는 어렵지 않게 합격할 것이다. 작년을 생각해보면 향이 너보다 낮은 이들 역시 수두룩했으니. 하지만 그때까지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거라.”
자만은 성장에 있어 가장 큰 독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말하자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네 오라버니가 된다고 하면 된 거야. 그러니 식사나 하러 가자. 거기, 넌 언제까지 누워있을래.”
“…끄응.”
천우희의 말에 악비산이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주호를 필두로 그들은 곧 식사를 위해 연무장을 떠나간바.
그 뒤로는 별일 없이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입관 심사의 열흘 전 날짜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