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뭐라?”
비사(祕史)의 연속에 하월벽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양인철과 곽무혁이 자세하게 설명해보라는 시선을 보냈고, 주호는 목청을 가다듬은 채 말을 이었다.
“기록이 있었습니다. 경천동지한 싸움이라 했지요. 끝에선 무황께서 신마를 꺾으셨지만, 그는 인세를 뛰어넘은 존재로 언젠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리라 하였습니다.”
주호는 제 눈으로 본 것을 마치 비동에 쓰여 있던 것처럼 각색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영혼 반쪽이 자신의 몸에 있고, 나머지 반쪽은 갈가리 찢어 온 천지에 흩뿌렸다는 말을 믿기엔 어렵지 않은가.
하지만 주호가 한 이야기조차 섣불리 믿기 힘들 정도로 허황된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으나, 하월벽을 비롯한 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렇다면 몇 대 동안 잠잠하던 혈천신교가 준동한 것은.”
“그 존재의 부활이 가까워졌다고 보아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혹은 이미 부활했거나.”
어디까지나 추론의 영역이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끄응.”
누워있기만 답답했던 주호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상처가 제법 깊은 것인지 전신이 욱신거리며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겨우 자세를 바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군요.”
“…큼. 자네가 워낙 날뛰어서 어쩔 수가 있어야지. 일 장로는 정말로 위험할 뻔했네.”
하월벽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호가 입은 상처의 구할, 아니 대부분은 그가 만든 것이지 않은가.
“푹 쉬고 일어나게. 이제 조금 뒤면 학관으로 가야 하지 않겠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벌써 그리되었군요.”
휴관을 맞이해 사천당가로 향한 것이 엊그제 같더니만, 벌써 연말이 지나 신년에 접어들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겨울이 몰고 온 한파가 끝나면 학관으로 복귀해야 했다.
“그나저나 교관 생활은 괜찮겠나. 자네 신분은 진작에 노출되고 남았을 텐데.”
양인철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물어왔다.
주호 역시 고려하고 있던바. 그렇기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가운데 있는 것이 시류를 파악하기 좋을 겁니다. 더욱이 학관과 맹이 있는 한 그들도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지요.”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으로 오히려 좋았다.
그걸 구실삼아 무림맹을 움직일 수 있는 대의가 생기는 것이니.
“…그런가.”
“행여나 가족 쪽은 걱정하지 말게나. 그 근방은 사신문 지부로 활용할 예정이니 쉽사리 외부 세력이 접근하기 힘들 것이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주가장의 가족들이었다.
하남에 있는 정천학관과 산동 하택 지방에 있는 주가장은 제법 거리가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 시일을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바.
하지만 사신문 자체에서 그 지역에 지부를 만드는 것으로 조치했기에 마음이 놓였다.
“환자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도 아니 될 일이지. 그러면 몸조리 잘하게.”
하월벽이 눈짓하자 양인철과 곽무혁 역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적막만이 내려앉은바.
잠시 두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던 주호는 붕대로 감긴 제 손을 바라보았다.
“신마(神魔)라.”
남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실상 속이 가장 복잡한 건 그였다.
단지 무황의 유산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제 몸에 절세마인의 혼이 깃들게 되었다니.
‘그러고 보니.’
주호는 문득 산서에서 혼돈과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단전 한 구석에 잠들어 있던 적해가 갑자기 혼돈의 기운에 격렬한 약동을 했던바.
그때는 자신 역시 당황했기에 상황을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을 바라봐오던 그의 두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겠군.”
이때까지 혈천신교는 사신문이나 무림맹과 대적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대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천하에 흩뿌려진 신마의 반절이 모여 그 존재를 이뤘고, 나머지를 찾고 있다면 필시 자신을 노려올 터.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월영사신
직업: 정천학관 일반교관
나이: 스물여섯
소속: 정천학관, 사신문
경지: 초절정(十/十)
무공: 청룡신공(七成)
경지에 이른 수치가 상태창에 표시되어 나타났다.
그는 이전 검마와의 싸움 이후 입신지경의 경지를 준비했지만, 주화입마의 영향으로 처참한 실패를 겪은바.
언제 다시 또 그러한 기회가 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돈을 비롯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혈천신교의 고수들은 이전에 상대했던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닌 것으로 보였다.
혹시라도 입신지경에 이른 고수가 움직인다면 아무리 주호라 할지라도 낭패를 당할 터.
그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은 괜찮지만, 혹여나 주위의 누군가가 그로 말미암아 피해를 본다면 그것만큼 버티기 힘든 것도 없었다.
꽈아악.
그는 붕대에 감긴 손에 힘을 쥐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지지 않으리라.
적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
주호가 신마의 기억을 본 뒤로부터 얼마간이 더 지났다.
이제 입관 심사까지는 한 달 하고도 보름밖에 남지 않은 시일까지 다가왔으니.
어느덧 계절은 겨울에 이르러 하얗게 뒤덮인 설산이 햇살에 비춰 눈부신 반짝거림을 내비쳤다.
사신문의 내부는 진법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그 여파가 적은바.
그래도 내린 눈이 적지 않기에 이른 새벽부터 순찰하는 무인들이 밖으로 나와 쌓인 것들을 치우곤 했다.
“후.”
주호는 홀로 연무장 위에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일점으로 집중된 그의 정신까진 흐트러트리진 못했다.
쉬익-.
손에 들린 수련용 철검이 궤적을 그리며 천천히 휘둘러졌다.
그간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대부분의 외상이 완치되었다. 아직 격렬하게 움직이면 쑤시는 곳이 있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차차 회복되어가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연무장에 나와 검을 휘둘렀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수련을 하면 잡념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재활은 없었다.
“후우…….”
긴 숨을 내뱉은 그는 다시금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이전까지는 내공의 사용을 최대한 지양한바.
하지만 이젠 몸이 정말로 괜찮아진 것 같기에 천천히 청룡신공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우웅-.
시퍼런 기운이 피어올라 그 위를 옅게 감싸기 시작했다.
주호는 유의 깊게 단전을 살폈지만, 전과 다름없이 청룡신공의 진기만이 고고히 자리하며 흐를 뿐이었으니.
다행히 한쪽 구석에 자리 잡아 꿈틀거리던 적해(赤海)의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괜찮은가?”
그때, 누군가 연무장 문을 두드리며 인기척을 드러냈다.
한창 정신을 집중해서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주호가 검을 내리며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몇몇을 볼 수 있었다.
“어인 일이십니까.”
백호 양인철과 악비산, 그리고 일장로 곽무혁이 문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곽무혁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 상태도 볼 겸 왔다네. 몸은 어떤가?”
악비산이 있기에 적해를 직접 적으로 거론하진 않았지만, 곽무혁이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렇기에 주호는 제 어깨를 몇 번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확한 것은 십성 공력 전부를 끌어올려 봐야 알겠지만, 잠잠하군요.”
“그런가.”
곽무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호는 시선을 돌려 악비산을 바라보았다.
“시련은 통과했다고 들었다. 백호께 가르침은 잘 받고 있느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초식은 전부 익혔습니다.”
악비산이 제 가슴을 치며 사뭇 자랑스럽다는 태도로 말했다.
주호가 상처를 회복하고 있을 동안 다른 이들은 놀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각자 치열하게 자신을 연마했고, 모두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다.
‘확실히.’
주호는 악비산의 전신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세에 흡족한 미소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의 그는 정제되지 않은 거칢이 있었다.
비록 그 초식은 정교함으로 승부를 본다곤 하나, 기를 운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어설픈 부분들이 많이 있던바.
하지만 그간 양인철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것인지 천후나 위천강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기세가 풍겨 나왔다.
“그래서, 백호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그 말에 악비산은 살짝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양인철의 가르침에 뒤떨어지지 않은 채 열심히 수련했고, 실제로 그 성과를 내보였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 기준이 다른바.
자신에겐 흡족한 결과였어도 그에게 있어서 실망스러운 성취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인철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흠잡을 것 없다. 자네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더군.”
“그렇습니까.”
악비산은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 입가가 씰룩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주호가 그것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릴 찰나, 오랜만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그간의 성취도 알아볼 겸 어떻느냐.”
주호가 눈짓으로 연무장을 가리키자 악비산은 살짝 저어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나 아직 부상이 전부 회복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이냐. 설사 저 친구가 손가락 하나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네가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러자 양인철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제자를 나무라며 말해왔다.
살짝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 허리춤에 찬 검을 툭 쳤다.
“네 말대로 아직 정상은 아니지만, 실전만큼 좋은 대련도 없겠지 않느냐.”
백호의 가르침을 받아 실력을 갈고닦은 악비산이라면 그간 녹슨 감각을 씻어 내줄 윤활유로선 충분하리라.
“…그렇다면.”
악비산은 더 이상 사양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씩 웃고는 등에 메고 있던 창을 풀러 손에 쥐었다.
그러자 그 기세가 사뭇 달라지는 것이, 여간 혹독한 수련을 해오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척.
양인철과 곽무혁이 훌쩍 뒤로 물러나 연무장의 가장자리에 도달했을 때, 주호는 허리춤에 찬 검을 빼 들었다.
비록 수련용 검인지라 신검과 같은 날카로움을 지니진 못했지만, 그것을 쥐고 있는 것이 주호인바.
“…….”
악비산은 신중한 기색으로 천천히 발을 옮기며 주호의 모습을 살폈다.
상처 입은 야수가 제일 무서운 것은 그간의 경험으로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말의 방심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그 어떤 실전을 겪었을 때보다 더 날카로운 기세를 보였다.
파아앗-!
악비산의 창끝이 순식간에 허공을 꿰뚫었다.
찰나 고개를 꺾어 그것을 피해낸 주호는 예상보다 빠른 그 속도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제법이로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단지 그 한 수만으로 악비산이 얼마나 열심히 수련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천천히 창을 거두어들인 악비산이 재차 공격을 이어나가려 몸을 낮췄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주호 역시 기세를 피워 올리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더는 손대중을 두지 않아도 괜찮겠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