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누워계신 지는 이틀이 되었어요. 정말로,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천 언니가 점심쯤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게 곤죽이 돼서 돌아온다는 거일 줄은…….”
침상에 누워 있는 주호의 앞으로 자리한 남궁연은 연신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젖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았다.
외간 남자의 몸이지만, 그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주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남궁연은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산서에서 병상에 누워 계실 때도 제가 종일 붙어서 간호했는걸요. 지금에서야 이런 걸로 부끄러워할까 봐요.”
“…그런가. 미안하다.”
“미안하시면 다치지 마세요. 저보다 훨씬 강하신 분이 왜 그리 당하고 다니시는 건지.”
핀잔이 끊이질 않는 것을 보니 제법 쌓인 것이 많으리라.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새로운 무공을 탐하다 다친 것이다. 아무래도 내 욕심이 과했던 것 같군.”
조심스레 물어오는 남궁연의 물음에 그는 적당한 말로 둘러대었다.
굳이 주화입마니, 뭐니 하는 말로 그녀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미 충분히 걱정시킨 것 같지만.’
주호가 쓴웃음을 지었을 찰나, 그녀는 살짝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명백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아직 자신이 알기 이르다 하여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사뭇 섭섭했으나,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귀찮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미련을 털어내 버렸다.
“…윽.”
다만, 수건을 문지르는 손길이 조금 거칠어져 주호의 신음을 자아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끼이익-.
다시금 문이 열리며 주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떠나갔던 천우희가 되돌아왔다.
그녀는 한참 주호의 몸을 닦고 있던 남궁연의 모습을 보곤 씩 웃더니 그 앞에 있던 의자를 당겨와 털썩 앉았다.
“죽다 살아난 기분 어때?”
“…썩 유쾌하진 않군.”
“정말로, 놀랐단 말이야. 점심때까지 돌아온다고 해놓고 곤죽이 돼서 실려 올 줄은…….”
“…어디서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주호가 남궁연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모르는 이야기라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문주께서는 곧 오실 거야. 당신이 깨어나면 바로 알려달라고 하셨거든. 듣자 하니 무공 수련에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내가 욕심을 부렸다. 다 업보이지.”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월벽 쪽에서도 자신을 배려해 입을 맞춰준 것이리라.
그렇게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희는 못 말리겠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 위를 두드렸다.
천우희가 다가가 문을 열자, 하월벽이 모습을 드러내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깨어났는가.”
“죽다 살아났습니다.”
주호는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끄덕여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 말대로 외상이 적지 않다. 사지가 부목에 고정되어 두꺼운 붕대에 감겨 있던바.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기에 쓴웃음만 절로 지어질 따름이었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마저 나누세요. 저랑 연 동생은 잠시 환기 좀 하고 올게요.”
하월벽의 말에 천우희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궁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여성이 나가자 곧 장내는 침묵에 잠기는바. 잠시간 턱을 쓰다듬던 하월벽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어떤가. 지금의 자네는 내가 아는 주호가 맞는가?”
“확신은 하지 못하겠지만, 맞을 겁니다.”
농이 서린 주호의 말에 그는 옅게 웃음을 토해냈다.
“정말로 깜짝 놀랐다네. 미리 이야기를 듣고 갔어도 그런 상황까지 갈 줄이야. 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고 있는가?”
“중간까지는 안쪽에서 지켜봤습니다.”
“그런가. 그나마 다행이로군. 전부 잠식당한 것이 아니어서 말이야.”
하월벽은 깊어진 눈으로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단순히 제압하기엔 주호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바.
자칫 이쪽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사지를 박살 내는 것으로 움직임을 막았고, 거의 반 시체가 되어서야 그 싸움은 끝을 맞이했다.
“…곽무혁 그 친구의 말로는 그때 자네 몸을 움직이던 것이 자네와는 아예 다른 별개의 존재라고 하더군.”
“별개의 존재입니까.”
주호는 붕대에 감싸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신마(神魔)의 기억이 생생했다.
무황과의 공전절후한 싸움, 그리고 반절로 찢어진 영혼까지.
곽무혁이 말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은 자신의 몸에 깃든 신마의 반절일 터이리라.
“정말 고생이었지. 나도 얼른 문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해야겠어. 자네 몸을 빌렸다곤 하나 고작 마귀 한 마리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은퇴라니. 아직 정정하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주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하자, 하월벽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싸우고 난 뒤에 깨달았다네. 문주가 된 이로 나는 대부분을 이곳에서 생활하다시피 했지. 그러다 보니 나태한 타성에 젖은 것이 아닌가 싶네.”
입신지경을 넘어섰다고 하더라도, 아니 넘은 경지의 고수이기에 겪는 굴레였다.
더는 오를 경지가 없는 낙관.
그것이 벽을 만들었고, 그를 나태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부족함을 많이 느꼈네. 당장 급한 일이 끝나면 자리를 넘겨주고 강호를 떠돌며 말년을 보낼 생각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이곳도 슬슬 세대교체가 일어날 시기이지 않은가. 요직에 앉아 있는 이들은 전부 한세월 살아온 늙은이들이니 젊은 피도 수혈해주어야겠지. …자네 같은 이들로 말이야.”
“…….”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하월벽의 말대로 현재 사신문의 요직에 자리한 이들은 대부분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는바.
하지만 강호 문파에선 흔한 일이 아닌가.
소위 말하는 금분세수를 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 말년까지 강호인으로서 소임을 다하며 활동했다.
“더군다나 마교 쪽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으니 서둘러 해야겠어. 그 정도는 되어야 신임 문주의 첫 소임으로는 충분하겠지.”
이미 계획을 다 짜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왔다.
그러던 찰나, 다시금 방문이 열리며 백호 양인철과 일장로 곽무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아 보이는군.”
“장로님은 저게 괜찮아 보이십니까.”
“…거, 사지 다 멀쩡히 붙어 있고 얼굴 멀쩡하면 된 거지 뭘 그리 깐깐하게 구나.”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주호는 그런 둘을 보며 마찬가지로 짧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전의 일로 폐를 끼쳤습니다.”
“되었네. 나로서도 색다른 일이었으니 사양할 일이 아니야.”
곽무혁이 그렇지 않냐는 표정으로 양인철을 바라보자, 그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세운 공이 혁혁한데 이 정도 민폐쯤은 가볍게 넘어가 줄만 하지.”
“그래도 수고는 했으니 감사 인사는 받을 만하지. 그렇지 않은가?”
“그건 맞지요. 고작 일격을 받아낸 것뿐인데 삭신이 쑤셔와서 고생했으니.”
양인철은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했지만, 설마 자신이 벌써 이리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쉬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순리라면 거스르지 않고 따를 셈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자면…….”
하월벽 옆에 앉은 곽무혁이 진지한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누워 있을 동안 기록을 뒤져보았네. 인세(人世)에 그리 강렬한 기운을 품은 악귀는 흔하지 않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야. 그 기반이 될 그릇 역시 특별하지 않았다면 혼이 담기기도 전에 깨어져 나갔을 터.”
“그렇다는 것은.”
“…자네, 혹시 천살성이라는 걸 아는가?”
“천살성 말입니까.”
낯설지 않은 단어에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검마 역시 그때와 비슷한 제 모습을 보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검마 역시 천문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랬겠지만, 그도 비슷한 것을 느낀 것이겠지.”
“그렇다면 제가 정말로 천살성의 좌를 타고났다는 말씀입니까?”
주호는 헛웃음을 토해냈다.
이, 삼류 끝자락에 불과하던 무림맹 말단 무사였던 자신이 사실은 천살성의 좌를 품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무황의 비동에 든 것도 무언가 특별한 요소가 작용한 것이라는 소리인가.
“단언할 수 없네. 너무 오래된 전승이기도 하고, 자료 역시 불확실하니.”
곽무혁은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모산파가 멸문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자신이 최후의 계승자로서 명맥을 잇고 있다고 하지만, 그 전부를 물려받지는 못한바.
오랜만에 서고에 틀어박혀 천살성에 관한 기록들을 뒤졌으나, 워낙 희귀한 사례인지라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봉인해두었으니 얼마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봉인, 말입니까?”
그 말에 주호는 제 아랫배를 매만졌다.
어떤 식의 봉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곳에 자리할 터인 적해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거늘, 쥐 죽은 것처럼 사라진 상태였으니 신통할 노릇이었다.
“본인은 모산파의 마지막 계승자라네. 악귀를 봉인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지.”
“…모산파!”
험상궂은 얼굴과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해오는 곽무혁의 모습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산파.
수십 년 전에 정마대전으로 멸문한 문파가 아닌가.
무당파와 같이 도교의 명맥을 잇는 문파로, 무공보단 신묘한 술법을 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역사가 깊음에도 규모가 작아 구파일방 같은 정도를 대표하는 위치엔 들지 못했지만, 그들의 정통성과 더불어 그 이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용케 알고 있군. 이미 옛적에 멸문한 곳이거늘.”
“옛적부터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곽무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묻고 싶은 것이 있네만.”
“예.”
“자네에게 청룡신공을 전수해준 스승에 관해서네. 혹시 그분께선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혹, 가능하다면 직접 찾아뵙고 싶은데.”
“…….”
주호는 잠시간 말을 멈췄다.
그가 무황의 비동에 들어가 청룡신공과 상태창을 비롯한 무황의 유산을 얻었다는 것은 천우희밖에 모르는 비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자신이 무황의 진전을 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그렇기에 주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무림맹주 단철량과 얽힌 것부터 시작해 무황의 비동과 그곳에서 겪은 일까지.
물론 상태창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무황의 신묘한 능력을 이어받아 그러한 힘을 지닌 것이리라 설명했을 따름이었으니.
주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들은 전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설마 삼백 년 전의 청룡이 무황일 줄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하월벽의 말에 양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황이란 이름은 노고수들의 가슴 역시 설레게 하는 것인지 전부 살짝 들뜬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주호는 살짝 머뭇거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무황께선, 과거 혈천신교의 수장이었던 신마(神魔)라 불린 존재와 싸우신 적이 있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