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44화 (144/300)

#144화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가운데 있으니 얼마가 지났는지, 얼마를 걸어왔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은바.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건가.”

처음엔 그 농밀한 어둠에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지만, 이내 그 앞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 성큼성큼 나아갔다.

무언가 걸린다면 오히려 좋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찰나, 돌연 하늘 위로 변화가 생겨났다.

저저적-.

마치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떠올랐고, 흰 궤적들이 어지러이 이어지며 기묘한 모습을 보였다.

“밖은, 끝난 건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정체 모를 존재가 아무리 날뛰더라도 입신지경의 고수에겐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그렇기에 천천히 육신으로의 복귀를 기다렸고, 머지않아 어딘가로 흘러들어가듯 의식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쉬이익-.

“…….”

두 눈을 뜨자 황량한 대지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하고 있던 진법 안쪽의 풍경이 아니었다.

혹시나 무언가 이변이 생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더 하려는가.”

“…….”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현묘함이 서린 음성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돌연 대지 위로 피를 울컥 쏟아내었다.

심각한 상처인 듯 보였다.

내장 부스러기까지 섞여 있는 것이,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큰 후유증이 있을 터.

하지만 그는 거칠게 입을 닦았고, 기어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말하지 않았느냐. 네놈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결착이 날 때까지 이 싸움은 멈추지 않으리라고.”

그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주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이의 눈을 통해 보이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손을 움직이는 것도, 고개를 돌리는 것도, 입을 달싹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으며, 그저 침묵한 채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아쉬울 따름이다.”

그 앞에 있던 남자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백발이 성성했지만, 주름 하나 없는 젊은 외모다. 그것에 어딘가 익숙함을 느낀 주호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무황의 비동.

그 제단 가운데 수백 년간 변함없는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는 그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무황이라고……?’

족히 삼백 년도 더 전의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풍경 역시 그때의 것이라는 소리일 터.

이 역시 상태창의 신묘한 능력일까, 아니면 청룡신공의 것인지 모를 기묘한 작용일까.

의문이 드는 것은, 그렇다면 어째서 무황이 아닌 그 앞에 있는 사내의 시점으로 보이는 것인가.

“그대. 인간의 몸으로 신(神)이라 불리는 자여.”

무황은 천천히 그 앞에 다가와 섰고, 주호는 그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린다. 비록 피로 물들어 볼품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본래는 수려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이목구비였다.

“어찌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세외의 신마(神魔)라는 이름으로는 부족했는가. 자네를 따라온 이들을 보아라. 혈천신교라는 이름을 지닌 것들은 모두 그대 뒤에 있는 부러진 깃대 아래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지 않았는가. 오로지 그대의 욕심 때문에 수많은 이가 죽었단 말이다.”

무황은 애통하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장본인인 신마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천지가 떠나가라 크게 울리는 앙소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목을 기울이며 무황의 물음에 대답했다.

“신마다, 내가 신마란 말이다! 그런데 고작 변방의 땅으로 만족하란 말인가! 죽은 이들? 내가 걷는 패도는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길이다! 그들은 나의 이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바. 나는 그 모든 것을 아래에 둠으로 오롯이 세워질 것이니-.”

쿵.

신마가 발을 내딛자 항거할 수 없는 거력이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간접적으로 그 안에 있는 주호로서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단철량? 하월벽? 남궁한?

아니, 입신지경에 이른 그들조차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었다.

일초지적조차 되지 못할 터.

인지의 이해를 포기해야 하는 정도의 강함이었다.

그저 강함만을 추구하는, 절정에 이른 패도적인 기세.

당대의 천마와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그조차 감히 이런 압박감을 내뿜진 못하리라.

“…….”

무황은 그런 신마의 기세를 두고도 일말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는, 죽기 전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음이로다.”

“그렇다! 살점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악착같이 부활하여 온 세상을 핏빛으로 뒤덮을 것이니!”

하월벽은 그를 마귀라 불렀지만, 고작 그따위의 존재가 아니었다.

신마는 지옥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수라였으며, 나찰이었다.

그 귀기 어린 모습에 더는 이해를 포기한 무황은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곧 청명한 울림이 주위에 퍼져 나갔다.

그 손에 어린 시퍼런 기운은 분명 대성에 다다른 청룡신공의 공력이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천지가 요동치며 개벽하는 듯했으나, 현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파아앗-!

마치 음양의 조화를 보이듯 청룡신공의 공력이 일어난 반대편으로 시커먼 마기가 솟구치며 균형을 이루었다.

‘…저건 대체.’

서로 다른 정반대의 기운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것들은 전부 하나로 합쳐져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보였으니.

파아앗-!

무황이 손을 휘두르자 잿빛 기류가 세상을 뒤덮었다.

어쩌면 세상의 멸망이었고, 어쩌면 태초에 있었다는 창조의 격멸과도 같았다.

주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신마의 시점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으하하하-!”

신마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제 몸을 아우르는 흉악한 기운을 극성으로 끌어올렸고, 두 팔을 교차해 세상을 뒤덮은 잿빛 기류에 저항했다.

하지만 그런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 전신은 눈부신 빛무리에 삼켜졌나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빛의 격류가 사그라들었을 때, 주호는 신마를 따라 대지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쿨럭.

입가에 진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신마의 사지 육신은 전부 분쇄된바.

팔다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고, 더는 그쪽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상반신만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반쯤 일그러진 얼굴로 연신 피를 토해냈을 따름이었다.

저벅-.

다가온 무황이 그 앞에 섰다.

안구가 타버린 것인지 희미해진 시야임에도 지친 것이 역력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바.

하지만 무황은 선언하듯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염라마저 지옥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한 혼이다. 육신을 초월한 경지이니 이리 둔다면 필시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지.”

“크흐흐-.”

신마는 웃음을 흘렸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힘의 격차에서 밀렸기에 처참한 꼴이 되었으나 그는 이미 육신의 한계 따윈 초월한 지 오래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의 시간만 있다면 짓이겨진 사지를 회복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제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어찌할 셈이냐. 육신을 모조리 태워 없앨 것이더냐. 아니라면 어디에 봉인이라도 해둘 참이더냐.”

오히려 내키는 대로 하라며 좋은 방법을 제시해주기까지 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그리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무황은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대의 영혼을 두 갈래로 찢을 것이다. 반절은 내가 품어 저 심연 밑바닥에 봉인해둘 것이고, 나머지 반절은 더욱더 갈가리 찢어 온 천하에 흩뿌리는 것으로 그 귀기를 잠재울 것이다.”

“…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신마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황의 손에 어린 신묘한 서기에 두 눈을 크게 뜬바.

직감적으로 저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찌이익-.

무황의 손이 휘둘러졌을 때, 신마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으로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지금껏 느껴본 적 없던 고통이 뇌리를 엄습했다.

안구는 시뻘겋다 못해 검게 물들었고,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선 남은 피가 전부 토해져 나왔다.

신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이름이 주는 무게와 자존심도 잊어버릴 만큼 막대한 것이었으니.

의식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술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자신의 존재가 지워져 감을 느꼈다.

하지만 신마는 피를 토해내면서도 절규했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한다면 제일 먼저 네놈의 모든 것을 씹어 먹고 이 세상을 다시 한번 더 핏빛으로 물들이리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천지는 적막에 잠겼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

주호는 다시금 어둠 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다.

그저 조금 전까지의 여운만이 그의 전신에 진득하게 남아 있었을 뿐.

주호는 마치 자신이 정말로 신마가 되었던 것 같은 감각에 가쁜 숨을 토해냈다.

손발의 끝이 덜덜 떨렸고, 누군가 머릿속에 손을 넣어 뇌를 꽉 부여잡은 것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조정을 시작합니다.]

상태창의 알림이 어지러이 떠올랐지만, 당장은 그것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대체.”

주호는 여전히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혼이 갈라지는 그 충격은 막대한 것이었다.

단지 간접 체험으로 극히 일부분을 겪었을 뿐이지만, 오한이 멈추질 않았다.

무황은 정말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신마의 혼을 반으로 갈랐다.

그 한쪽을 정말로 갈가리 찢어 온 천하에 흩뿌렸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나머지 반은 자신의 몸에 봉인해 비동에 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전까지 내 몸을 빼앗은 것은.’

무황은 비동에서 영면에 들었다.

그러니 상태창을 통해 그 계승자인 자신의 육신으로 넘어온 것이리라.

조금 전의 장면들을 보여준 것도 그의 안배일 터.

직접 말로 해오지 않았지만, 무황이 자신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대신해서 그 뒤를 수습하라, 이 뜻인가.’

혈천신교는 여전히 건재했다.

다만, 지난 삼백 년 동안 물밑에서 활동했다면 근래는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나서서 모습을 드러낸바.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마의 반쪽이 육신을 얻어 부활했다던가.”

그 가능성에 다다랐을 때, 주호는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혼원은, 일극으로 향하리라.

[혼원일극신공(混元一極神功)의 구결이 활성화했습니다.]

어둠으로 휩싸인 공간이 아니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곧 자리한 곳이 사신문 내에 있는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깨어났는가.”

겨우 몸을 되찾은 것이리라.

그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렸을 찰나, 자신의 헐벗은 몸 위로 빽빽하게 꽂혀 있는 수백 개의 침을 볼 수 있었다.

그토록 격렬한 싸움이었으니 몸이 제 상태가 아닐 터.

하지만 침을 제외하고도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 위에 있었다.

“…문신?”

무슨 문자인지 그림인지 모를 기묘한 것들이 가슴팍으로부터 밑까지 새겨져 있었다.

영문 모를 것들에 주호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자, 몸에 박혀 있던 침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찰나, 닫혀있던 방문이 열렸다.

“그렇다니까. 처음에는 애태우면서 놀리는 버릇이 있으니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동생이 오히려 밀어붙여야…….”

“…어?”

물이든 대야와 마른 수건 뭉치를 손에 든 천우희와 남궁연이었다.

잠시간 어두커니 서 있던 그녀들을 바라보던 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늦었군.”

아무래도 약속했던 점심은 훌쩍 지난 듯하여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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