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쾅-!
일순간 귓가를 스치는 광음에 곽무혁은 전신의 감각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커헉!’
마치 만장 절벽에서 떨어져 지면과 부딪친 그런 충격이었다.
서둘러 그 충격을 흘려내고 자세를 바로잡아야 했지만, 숨도 내쉬기 어려운 상태에서 그럴 경황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등 뒤에 있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받아준 직후였다.
“괜찮으십니까.”
“…자네.”
양인철이 그 어깨를 붙잡은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곽무혁은 세차게 고개를 몇 번 흔드는 것으로 어지러움을 털어버리곤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지만, 주호가 내뿜은 기파에 얻어맞아서 그런 것인지 온몸이 무겁기 짝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직전까지 마주했던 요사스러운 기운과 농밀한 살기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곽무혁은 내공을 돌려 그것을 씻어 내버린 뒤에야 겨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쾅, 콰앙-!
주박을 끊어내고 다시 자유로이 날뛰기 시작한 주호와 그를 막아선 하월벽이 연신 충돌하고 있었다.
어찌나 격렬한 싸움인지 분명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발끝이 둥둥 울리며 땅 위로 거센 진동이 토해져 나왔다.
“그나저나 어째서 주박이 끊어진 겁니까.”
양인철은 의아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사슬을 바라보았다.
주박의 사슬이라 불리는 그것은 신묘한 기운을 품고 있어 악귀가 들린 이를 속박할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는 도술의 도자도 몰랐지만, 지금까지 그 주박이 한 번도 끊어진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자네가 술자가 아니기 때문이네. 본래라면 끊임없이 주력을 주입해 그 연결을 강화하는 것으로 악귀와 줄다리기를 해서 힘을 빼놓는 방식으로 제압하는 것이지. 그래도 내 주력이 담긴 상태인지라 괜찮다고 생각했거늘…….”
곽무혁은 깊어진 두 눈으로 끊어진 사슬을 받아들었다.
지금까지는 어지간한 악귀라 할지라도 그 정도로 충분했던바.
주호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 예사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입니까.”
양인철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신문의 적은 강호의 물밑에서 암약하는 신비 세력만이 아니었다.
민생의 구제 또한 그들의 역할 중 일부인바.
그는 젊을 적 몇 번이나 곽무혁을 도와 중원을 돌아다니며 악귀 퇴치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도술이나 퇴마 분야 쪽엔 지식이 별로 없었기에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곽무혁의 표정이 저리 굳어지게 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었으니.
“아마 인세(人世)에는 다시 없을 존재였겠지. 다행이라면 청룡의 육신 안에 갇혀 있다는 것과…….”
저만한 악귀가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면 한 성을 멸망시키기도 그리 어렵진 않으리라.
그렇게 된다면 단순한 악귀가 아니라 하나의 재해로 인식되었을 터.
기록된 역사 가운데서도 몇 번 등장하지 않은 존재였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콰아앙-!
거센 폭음과 함께 주호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나풀거리는 시뻘건 머리카락 위로 진득한 피가 터져 나왔고, 대지는 다시 균열이 생기며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갈라져 나갔다.
“일어나라, 마귀여.”
쓰러진 주호의 앞에 선 하월벽의 모습에 곽무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더한 괴물이 우리 편이라는 것이지.”
“거, 들리겠습니다. 문주님 보고 괴물이라니요.”
“의동생을 이렇게 험하게 다루니, 욕 한마디 정도는 해도 되지 않겠나.”
설마 싸우고 있는 와중 이쪽까지 신경 쓸 수 있겠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막 쓰러진 주호의 어깨를 밟아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해가던 하월벽은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 들린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사문의 어른으로 체통을 지키라고.”
“…늙은 데 귀도 좋다니까.”
곽무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박의 사슬을 들었다.
“……!”
양인철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조금 전까지 끊어져 있던 그것이 어느새 하나로 합쳐진 모습이 아니겠는가.
곽무혁은 그것을 팽팽히 당기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꽉 밟고 계십쇼, 형님. 단번에 처리해야 합니다.”
“나도 늙었는지 검을 쳐낼 때마다 삭신이 쑤셔온다. 가능하면 빨리 끝내…….”
쉬익-!
한 줄기 궤적이 날카롭게 허공을 꿰뚫었다.
기습적인 이기어검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신검의 끝이 그들을 향해 솟구친바.
하월벽은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는 수법이기에 가볍게 피해냈지만, 그 옆에 있던 곽무혁은 한 발자국 늦었다.
‘쯧.’
그는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두 팔을 교차했다.
몸으로 버텨낼 심산이었다.
어느 정도 상처는 입겠지만, 하월벽이 그 틈을 노려 기세를 잡을 터.
그렇다면 확정적으로 주호를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이루어졌다.
“막으면 안 돼! 피해라!”
당연히 피하리라 생각했던 곽무혁이 그것을 받아내려 하는 것을 보자 하월벽은 고함을 지으며 긴급히 출수했다.
그 위에 서린 적해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신검(神劍)의 날은 호신갑도 착용하지 않은 맨몸으로 받아내기에 심히 날카로운 것이었다.
팔 하나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닌바.
“…….”
하월벽은 잠시간 망설였다.
이기어검의 흐름을 끊으려면 주호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것밖에 답이 없다.
자칫 잘못한다면 그가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곽무혁이 당하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괜찮습니다, 문주님.”
그때,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양인철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신창(神槍) 백호가 날카롭게 이빨을 들이밀며 신검의 날을 쳐냈다.
거친 고성이 터지고 강기의 편린이 허공에 흩어지는바.
그는 곽무혁의 앞을 지켜내며 그 앞까지 닥쳐온 붉은 바다를 꿰뚫었다.
“음.”
하지만 그 결과는 기세만큼 좋지 못했다.
양인철은 짤막한 신음과 함께 두 걸음 밀려났다.
상처 없이 이기어검을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신창을 거머쥘 따름이었다.
‘이 무슨.’
단 한 번의 경합으로 서로 간에 있는 차이가 명확히 느껴졌다.
정면으로 싸운다면 오십 합이나 받아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무거운 일격이었으니.
같은 사신수라 일컬어지는 백호라는 이름의 체면이 구기는 순간이었다.
“잘했네.”
하월벽은 여유를 버렸다.
더는 그 행태를 좌시하지 않았고, 진지해진 표정으로 검을 들었다.
쿵-!
그가 크게 발을 내딛자 말 그대로 대지가 출렁였다.
기개세의 기세였던 주호의 것을 뛰어넘는, 노도와 같은 기세로 그 자체가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빌어먹을.”
주호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도발과 기습까지 하며 틈을 노렸지만, 입신지경의 고수를 상대로 ‘지금’의 자신으로는 도저히 승기를 찾을 구석이 없었다.
‘…지금?’
불현듯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시감에 두 눈을 크게 떴을 찰나, 하월벽은 하늘 높이 든 검을 그어 내렸다.
“만천낙뢰(滿天落雷)-.”
사성천검식
오의 만천낙뢰(滿天落雷)
파가각-!
하늘 가운데 새하얀 빛이 벼락처럼 내리꽂히며 주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 역시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전신에 핏빛 호신 강기를 극성으로 일으키며 저항했고, 신검을 바닥에 찔러 넣음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낙뢰를 흘리려 했다.
“끄으윽-!”
하지만 만천낙뢰의 초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옷은 찢어지고 터져 나가 넝마가 되었다.
피부 위로는 불꽃이 튀며 생채기가 가득 새겨졌고, 산채로 익혀버리려는 듯 메케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슈우욱.
이윽고 낙뢰가 멎었을 때, 새하얀 연기가 그의 전신으로 피어올랐다.
주호는 서 있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월벽은 가늘어진 눈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곧 그가 선 채로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뚝, 뚝.
신검의 날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심하게 한 것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시뻘건 혈기를 내뿜으며 일렁거리는 머리카락의 모습에 긴장을 지우지 못했다.
“형님의 사성천검식은 오랜만에 봅니다.”
다시금 그 옆으로 다가온 곽무혁이 옅은 숨을 내뱉으며 말하자, 그를 흘깃 바라본 하월벽은 턱 끝으로 주호를 가리켰다.
“사담은 나중에 하고, 혼절한 지금이 적기이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이기어검에 겨눠지는 건 두 번 다시 사양입니다.”
“…저도 두 번은 싸우고 싶진 않군요.”
투덜거리는 곽무혁의 말에 양인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해왔다.
촤르륵-.
곧 그들은 주박의 사슬로 주호의 전신을 속박했다.
곽무혁은 곧바로 그 몸에 여러 장의 부적을 붙이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구성된 주문을 외웠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이윽고 모든 과정을 마친 그가 눈을 떴을 때, 주호의 전신에 넘실거리던 적해(赤海)의 기운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시뻘건 핏빛에 뒤덮여 나풀거리던 머리카락 역시 제 색을 되찾은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하월벽은 고개를 들어 곽무혁을 바라보았다.
“잘 된 것인가?”
“음…….”
무언가 잘되지 않은 것인지 그는 한동안 말하기를 꺼렸다. 그러곤 몇 번이고 주호의 상태를 살피었고, 이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악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악귀가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양인철의 물음에 곽무혁은 제 뺨을 긁으며 자신 역시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생령(生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몸과 이질감이 없어. 나도 이건 처음 보는 것이라서 잘…….”
“어찌 되었든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한가.”
“예. 그에 관한 조치는 취해놨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겠군요.”
곽무혁은 잠시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주호를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종류의 싸움은 본인의 의사가 중요한바.
주호의 혼이 그 정체 모를 존재를 완벽하게 자신에게서 분리해내어야 끝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폭주할 가능성은?”
“음.”
주호와 같은 경지의 고수가 혈겁에 잡아먹혀 피와 살육만을 탐하는 마귀가 되어버린다면 그것으로 여간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곽무혁은 냉정히 판단했고, 끝내 결론을 내렸다.
“본산에 내려오는 비전을 사용한다면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래도 경과를 두고 살펴는 봐야겠지요.”
“그런가.”
하월벽이 두 눈을 감은 채 깊게 고개를 끄덕이자, 양인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인연을 쌓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건만, 그래도 적잖은 호감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일이 이리되어 버려 착잡함을 금치 못했다.
‘부디 잘 풀리기를 바라야지.’
더는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를, 양인철은 간절히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