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어슴푸레한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간밤에 있었던 여운은 아직 짙게 남아 있었지만, 주호는 이미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정돈을 마친 뒤였다.
천우희는 여전히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잠시간 몸을 뒤척이던 그녀는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고, 피로에 얼룩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가?”
“볼일이 있다.”
그 말이 끝이었다.
무슨 일인지, 누굴 만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천우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동경을 살피는 주호의 얼굴이 사뭇 비장한바.
필시 예삿일은 아닌 것 같기에 섣불리 묻기 저어될 따름이었다.
주호는 이내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다.
눈동자 안에 서린 망설임을 보곤 피식 웃더니 이내 침상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점심은 돌아와 함께 하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어?”
“조류만 아니면 되겠군. 그건 간밤에 충분히 취했거든.”
“말장난은.”
주작을 비유한 것이리라.
천우희가 눈을 흘기자, 주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가지런히 했고, 흐트러진 이불을 올려주었다.
“다녀오겠다. 당신은 간밤에 고생했으니 조금 더 자는 것이 좋겠어.”
“…늦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천우희는 그 손길이 괜히 부끄러웠다.
이미 서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지만, 감정과 감정의 교류는 익숙해지지 않은 천우희기에.
괜히 투정부리는 듯한 그 목소리에 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은 후, 벽에 기대어 놓았던 신검을 검대에 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닭이 울지도 않았건만, 사신문의 내부는 분주했다.
이른 시각부터 아침을 준비했고, 더러는 임무를 떠나는 듯 피풍의를 두른 채 밖을 나서고 있었다.
잠시간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호는 이내 몸을 움직였다.
“들어오게.”
문주 집무실 앞에 다다르자 절로 문이 열리며 하월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그 안으로 들어간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문주와 동석하고 있던 의외의 얼굴들을 볼 수 있었다.
“백호께서, 그리고 일 장로님도…….”
양인철뿐만 아니라 사신문의 일장로인 곽무혁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문주께 전해 들었네. 그간 힘들었겠군.”
“청룡의 일은 사신문의 일이 아닌가. 당연히 우리가 나서야지.”
양인철이 말하자, 곽무혁은 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가 하월벽을 바라보자,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여차할 때를 대비해 두 분께 부탁드렸네.”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되었네, 이 사람아.”
주호가 면목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양인철이 손을 휘저었다.
“그럼, 기다렸던 이도 왔겠다 슬슬 이동하지.”
그 모습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은 하월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양인철과 곽무혁이 그 뒤를 따랐다.
주호 역시 잠자코 발걸음을 옮겼다.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지 아직 듣지 못한바.
그렇기에 의문을 품은 채 곧 사신문의 제일 안쪽에 있는 심처까지 다다랐다.
“…여긴?”
“본래는 폐관 수련을 하는 장소로 쓰였다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지.”
말 그대로 사신문의 끝이었다.
이곳을 두르고 있는 진법 너머의 풍경이 일렁거리며 끝없이 펼쳐진 산맥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가세.”
하월벽의 말에 주호는 그 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깨달았다.
“진법, 입니까.”
“그러네. 예부터 내려오는 사신문의 절진 중 하나지.”
상태창은 하월벽의 말대로 수련장 전체에 상승 경지의 진법이 펼쳐져 있음을 알려왔다.
“한 번 발동하면 최소 세시진 동안 유지되네.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의 수련을 위해 설치된 것이었지.”
확실히 사신문은 넓었지만,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의 싸움은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했다.
가볍게 몸을 푸는 것으로 산 한 두 개쯤은 박살냈으니.
주호 역시 검마와의 싸움도 고작 몇 수 나누지 않았을 뿐인데 산서성 도시 한 구역이 박살나지 않았던가.
“자네가 말한 적해란 것은 우리로서도 처음 겪는 현상인지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알아갈 수밖에 없다네. 그러니 필연적으로 거친 과정이 될 터.”
하월벽은 진지한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준비는 됐는가.”
“…….”
주호가 말없이 깊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월벽은 양인철을 향해 눈짓했다.
툭.
곧 양인철이 사방위를 향해 묘안석을 던졌다.
왜인지 그 모습이 익숙했던 주호는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이전 천우희와 처음 만났을 때, 갑작스럽게 뒤바뀐 환경을 만들어냈던 간이 진법과 동일한 것이었다.
솨아아-.
지금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닫힌 연무장이 아니라 황량한 대지가 펼쳐졌다.
저 멀리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니, 오직 그를 비롯한 넷만이 그 땅 위에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면.”
쿵-.
하월벽이 제 기세를 끌어올렸다.
장삼의 소매가 펄럭거리며 거센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마치 거산이 앞에 나타난 압박감에 주호는 옅은 숨을 내쉬었다.
“어떤가.”
“아직 움직이지 않습니다.”
“흠.”
그가 제 기세를 발산했음에도 적해는 잠잠했을 따름이었다.
그 대답에 하월벽은 잠시간 생각에 잠긴 듯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자네를 진심으로 죽일 생각으로 움직이겠네.”
“……예?”
주호는 그 물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성을 내뱉음과 동시에, 바로 지척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살기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꺾었다.
핏-!
날카로운 한 줄기 지풍이 허공을 갈랐다.
직격당하진 않았지만, 끄트머리에 걸린 듯 찢어진 상처에서 핏방울이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빗나갔구먼.”
“…진심으로 맞추려고 하셨습니까?”
주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토해내자, 하월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재차 물음을 던졌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 역시 마찬가…….”
쿵-.
살의에 반응한 것인지 적해(赤海)가 몸부림치며 요동하기 시작했다.
주호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임을 멈추자, 하월벽은 침중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응이 있나 보군.”
“…크윽.”
적해의 움직임은 이전과 달랐다.
마치 그간은 간을 본 것뿐이라는 듯 폭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며 기경팔맥을 동시에 뒤덮기 시작했으니.
주호는 청룡신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그것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 했다.
꽈득, 꽈드득.
몸속에서 몇 번이고 두 기운이 충돌을 반복한다. 핏줄은 터지고 근육은 뒤틀리고 온몸이 울긋불긋하게 솟구치며 괴상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커헉.”
곧 그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토해져 나왔다.
주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실핏줄이 터진 눈동자로 두 입술을 부들거렸다.
“이전보다, 더 격렬…….”
쿵.
동시에 혈기가 백회를 뒤덮었다.
골수 깊은 곳까지 휘감았으며, 이내 그 전신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니.
온몸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청룡신공의 기운이 순식간에 잡아먹으며 적해가 본색을 드러냈다.
“허어.”
청룡신공이 그 색을 빼앗겨 가는 모습에 하월벽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주호 정도 되는 이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꺼냈으니 예사로운 현상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직접 그것을 마주하자니 전신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말 그대로 역천(逆天)의 기운이로구나. 세상에 있어선 안 될 것이야.”
농밀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귀신을 보는 듯한 것이었으니.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심지가 움츠러드는 그러한 종류였다.
“…문주.”
“이게 대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던 양인철과 곽무혁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역시 처음 보는 현상입니다. 마치 수라를 보는 것 같군요.”
“…이건, 수라 따위가 아닌 것 같으이.”
곽무혁은 미간을 좁히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주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주화입마를 당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고수는 드물지 않지만, 없지는 않지.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네. 경지가 높다 한들 순리를 거스르는 기운은 한정된 것. 진원지기가 다하면 꺼지기 마련이지만, 간혹 만에 하나로 이러한 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그는 말하기를 머뭇거린다.
“무엇입니까.”
양인철이 다음을 재촉하자 그는 확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천살(天殺)이라 하네.”
“천살? 그 천살성을 말하는 겁니까?”
“확실하진 않네. 나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으니. 하지만…….”
그 기괴한 모습은 천살이라 부름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파앗-!
시뻘건 궤적이 허공을 꿰뚫었다.
양인철과 곽무혁이 흠칫하며 움직였으나, 하월벽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자네들은 물러서 있게.”
주호는 입신지경의 벽을 넘어서기 직전이었다.
양인철과 곽무혁이 초절정 완숙에 다다른 고수라곤 하나 저런 상태의 주호를 받아내긴 힘들 터.
둘을 부른 것은 정말로 여차할 때를 대비한 것이었으니 지금 당장 나설 필요는 없었다.
츠즈즈즛-!
하월벽이 뽑아든 검 위로 상서로운 빛이 깃들었다.
“문주로서의 도리를 할 때가 왔군.”
개벽(開闢)의 일 검이었다.
천지가 갈라지며 그 사이로 거대한 어둠이 깃들었다.
대기는 울부짖으며 소용돌이쳤고, 하월벽의 지척까지 다다른 핏빛 강기는 너무나도 허무히 스러질 뿐이었다.
“…….”
주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바로 옆을 바라보았다.
딱 한 치의 차이였다.
황량한 대지 위,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 생겨나 있었다.
잠시간 그것을 바라보던 주호는 이내 고개를 들어, 핏빛이 얼룩진 눈으로 하월벽을 바라보았으니.
쿵-.
위기감을 느낀 것인지 그의 전신으로 웅혼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그것에 하월벽은 쓴웃음을 지으며 검을 들었다.
“이름 하난 잘 붙였군. 과연 적해와도 같은 기세다.”
방금의 한 수로 서로 간의 격차를 알았을 테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욱 흉맹한 기세를 내뿜으며 거친 살기를 보였으니.
탓-.
일순간 주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지만 하월벽은 동요하지 않는바. 그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을 따름이었다.
쾅-!
왼쪽으로 비스듬히 세워 올린 검신이 신검의 일격을 막아냈다.
강기의 편린이 허공으로 흩어질 찰나, 신검이 기묘하게 궤적을 바꾸며 휘둘러졌다.
“청룡검식인가.”
주호는 이전 하월벽의 부탁으로 청룡신공의 무공을 기록한 바가 있었다.
과거에는 일인 전승으로 전해졌기에 삼백 년간 소실된다는 참사가 발생한바.
그 이후부턴 하나의 비급으로 엮어 문주가 관리하는 체계로 해왔다.
주호 역시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고, 그 덕에 청룡신공의 초식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쿵-.
사방이 거센 압력으로 짓눌린다. 그것이 검식의 첫 번째 형인 현검임을 알아본 하월벽은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쉬시시식-!
현검은 둔검의 묘리를 품었다.
그렇기에 그는 패검의 초식을 발했고, 이내 현검의 형(形)을 깨트렸다.
“…….”
하지만 주호는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았으니.
잠운으로 시작해서 온갖 절기가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하나하나 농밀한 살기가 담긴 것으로, 지켜보고 있던 양인철과 곽무혁의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강맹한 위력이었다.
“어리석은.”
하월벽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힘에 치우친다면 정교함을 잃을 뿐이었다.
주호라면 그 묘리를 모르지 않을 터.
하지만 혈기에 휩싸인 그의 본능은 이미 그것을 판가름하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어버린 듯했다.
캉-!
하월벽은 다시금 너무나도 간단히 청룡검식의 초식을 파훼했다.
그러자 신검은 주호의 손을 찢으며 하늘로 날아갔고, 그는 곧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콱-.
하월벽은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 목을 짓밟았다.
주호는 괴로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발버둥치는 것으로 그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하월벽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연기라도 하는 것이냐. 같잖기 짝이 없구나.”
“…….”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을 내뱉던 입이 돌연 호를 그리며 미소를 지었다.
파앗-.
발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데 하월벽은 발을 들었다.
그러자 바짓단이 너풀거리는 것이, 그 끄트머리가 실낱같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서로 간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들자, 피를 뱉어내며 입가를 닦아낸 주호는 제 손가락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영악한 늙은이로군.”
“……!”
그 이질적인 목소리에 하월벽은 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