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하월벽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신문주라는 자리는 여타 강호 문파의 것과 사뭇 다른 무게감을 지녔다.
명문이라 불리는 어지간한 곳들도 사신문과 역사를 비교할 수 없었고, 문파 규모 자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사신문 본산 자체뿐만이 아니라 강호 각지에 퍼져 모세혈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이야말로 사신문이 지닌 진정한 힘과 다름이 없었다.
무림맹, 사도맹, 천마신교.
구파일방, 세가연합.
마도십이가, 사도칠패.
강호의 움직임을 주도하는 세력들의 동향을 주시하며, 혹여라도 그들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지 않는지 살피는 감시자 역할이었다.
혹자는 말했다.
사신문이 과연 이러한 일들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이냐고.
물론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신 역시 경계하며 돌보았고, 수많은 역사 동안 자정작용을 거쳐온 사신문이었기에… 사신문주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하월벽은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사신문의 존재는 강호의 기형적인 구조가 만들어낸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라고.
강호에는 주기적으로 많은 분란이 일어났다.
가까이는 삼 년 전의 비동혈사가 있었고, 멀리는 일갑자 전의 정마대전이 있었다.
사신문은 그때마다 물밑에서 암약했고, 치명적인 음모와 사건들을 배제하며 더 큰 피해를 미연에 방지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언제까지나 그림자여야 했다.
사신문의 힘은 일개 문파가 지니기에 너무나도 강대한 것.
만약 그 존재를 강호 전면에 드러낸다면 당장은 군림할 수 있겠으나, 그 끝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월벽은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변함없이 사신문을 운영하던 차.
그러던 중 강호 곳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발생했다.
처음엔 그저 의심이었다.
각기 떼어놓고 본다면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닌바.
하지만 천천히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하니,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적 정마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과 매우 흡사했다.
물자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특정한 지역으로 몰렸고, 각지에 보지 못했던 이들이 속속히 나타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확신을 지니게 된 것은 청룡의 등장 이후였으니.
“정말 대단한 친구야.”
하월벽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문으로선 하늘에서 갑작스럽게 뚝 떨어진 듯한 존재였다.
설마 삼백 년 동안 공백이었던 사신수가 자신의 대에서 전원이 모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그렇다 할지라도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 이렇다 할 것은 없었지만, 주호가 세운 공적은 그 어느 것 하나 쉬이 넘길 수 없는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사흉수의 준동,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혈천신교의 존재까지 밝혀내지 않았나.
바로 직전엔 사도맹의 기둥인 검마를 쓰러뜨리고, 마교의 음모를 파헤치기까지 했으니.
그 끝에서 사흉수의 수좌라 알려진 혼돈과 마주한 것은 정말로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안쪽에 당도했나 보군.”
성문의 개폐 허가는 문주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렇기에 주호가 당도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내부가 부산스러워지는 것을 보니 이 안쪽까지 다다른 듯싶었다.
사신문엔 그의 동생인 주예향 역시 수련을 위해 머물고 있는바.
내년에 있을 정천학관의 입관 시험을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했었다.
아마 먼저 그쪽을 만나러 갔으리라 짐작했다.
‘이곳에 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군.’
하월벽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주예향을 향한 주호의 애정이 애틋함을 이미 들어 알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곳에 올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했지만, 그 직후 집무실의 문 앞으로 인기척이 나타났다.
-문주님. 청룡이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급한 용건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하월벽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몇 달 만의 재회인 것은 둘째 치고, 검마를 비롯해 사도맹과의 싸움에서 사선을 넘어오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조금 더 그 여운을 만끽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용건이 있는 것인지 발걸음을 서두른 듯싶었다.
“들라 하게.”
곧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주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문주님.”
변함없이 호쾌한 인상이었다.
귀공자 같이 수려한 외모 역시 여전한바.
하지만 하월벽은 그 전신에 서린 기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
물밀듯 아지랑이처럼 서린 그 기운은 주호가 곧 입신지경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반년 전쯤이었으니, 그 짧은 사이에 이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소리가 되었다.
하지만 하월벽의 눈은 이내 가늘어지며, 초췌해진 주호의 얼굴을 살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게. 우선 목부터 축이지.”
그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하월벽은 차를 따랐다.
본디라면 내공으로 김이 날 정도로 차를 데웠겠지만, 그렇게 하면 빨리 마실 수 없었다.
예식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살짝 차가워진 그대로 차를 따르자, 주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들이켰다.
“…무언가 있었군. 검마와 싸운 후유증인가, 아니면 혼돈과 만난 것 때문인가.”
하월벽은 제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흘깃 바라보았다.
보고서엔 주호의 부상이 모두 문제없이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곧바로 자신을 찾아온 것도 직접 적인 보고를 통해 의견을 나누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초췌해진 얼굴을 보아하니 무언가 심각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잔, 더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
주호는 다시 채워진 찻잔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평소 그의 행실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질적인바.
다른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이제껏 적해라는 폭탄을 가슴에 안고 있던 그의 심력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문주께선 제가 망량환혼진에서 나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었거늘.”
하월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주호가 사신수의 계승자로 인정받기 위한 시련이었다.
그 자신을 비롯한 사신문의 고수 전부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망량환혼진에서 빠져나온 주호가 폭주하는 바람에 꽤 고생했으니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시작은, 망량환혼진에서 나온 순간부터였습니다. 마치 누군가 제 머릿속에 들어온 것처럼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더군요.”
“이질적인 감각?”
“예. 주위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이고, 그 피를 탐하라고요.”
주호는 제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단순히 망량환혼진의 여파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에 깊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의혹은 점차 쌓여만 갔고, 검마와의 싸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검마와의 싸움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확실한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 위험이 큰 방법을 사용했고, 끝내 주화입마에 들었지요.”
“…주화입마라니.”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단전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피처럼 붉고 도도한 흐름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적해(赤海)라 이름 붙였지요.”
“그것이 문제란 말인가.”
“평상시엔 괜찮습니다. 그저 그곳에 자리하고만 있을 뿐이니. 하지만 청룡신공을 일정 수위 이상으로 운용하거나, 살기를 느낀다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머리 위까지 혈기가 차올라 마치 살귀라도 된 것처럼 충동이 닥쳐오게 되었지요.”
“…허어.”
하월벽은 탄식을 내뱉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현상이었지만, 분명 심상치 않은 상황임은 분명했다.
‘청룡의 무공에 그러한 부작용이 있다는 기록은 없었거늘.’
애초에 삼백 년 전까지 그 전승자가 없어 기록이 적은 것도 문제였다.
설마 입신지경, 탈각에 이르기 직전 자신의 원죄를 끊어내는 과정인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아쉽게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두렵습니다. 이 화(禍)가 제 주변에 미치게 된다면.”
살짝 떨리는 주호의 목소리를 끝으로 집무실 안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월벽은 두 눈까지 감은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손가락 끝이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려 퍼진다. 그것에 입안이 메마른 주호가 다시금 찻잔을 들었지만, 이미 그 안은 텅 비어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부터 한참 뒤, 하월벽은 생각의 정리를 끝낸 듯 눈을 떴다.
“때로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단순하게 접근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지.”
“단순하게, 말입니까.”
“쌓인 것이 문제라면 그것을 발산해내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
그 말에 주호는 고개를 들어 하월벽을 바라보았다.
“뒤틀린 흐름을 바로잡으려면 큰 충격이 필요할 것이네. 아마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야. 견딜 수 있겠는가?”
“…그것이 제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면.”
주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월벽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더 경고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지도 모르네.”
“제 주변이 그리되는 것보단 낫습니다.”
만약 폭주한 자신의 근처에 있었던 것이 사도맹의 고수들이 아니라 지인들이었더라면.
학관의 동료 교관,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후기지수.
가족, 천우희, 남궁연이었더라면.
그 상실감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소중한 것이 많이 생겼구나.’
주호는 흐릿한 눈앞으로 떠오르는 여러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익일(翌日) 묘시(卯時).”
그의 얼굴에 각오가 서린 것을 본 하월벽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신을 다스린 뒤, 동이 틀 무렵에 이곳에 다시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
밤이 깊었다.
청명한 만월을 보니, 주호 역시 복잡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남은 것은 몇 시진 뒤에 다시 문주를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할 정도라 이야기했으니 심상치 않은 것이라고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저벅.
그때, 깊이 내려앉은 어둠 가운데 이질적인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창가에 기대앉아 있던 주호는 천천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내 술병을 흔들며 안쪽으로 들어오는 천우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청승맞게 그러고 있어?”
“…밤의 흥취를 즐긴 것이다.”
“허세는.”
주호의 말에 천우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탁자 위에 술병을 내려놓고 품에서 술잔 두 개를 꺼냈다.
쪼르륵.
그녀는 곧 술잔에 술을 따르고, 그 중 한 잔을 주호에게 내밀었다.
“진명이라 하는 술이야. 만월(滿月)이 떴을 때만 마시는 명주지.”
주호는 술잔을 건네받아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깨끗한 물을 담아놓은 듯, 한 점 흐림 없이 맑은 표면이었다.
꽃으로 빚은 술인지 은은한 향기가 느껴지며 동하지 않았던 마음을 움직였다.
꿀꺽.
주호는 술잔을 비웠다.
가벼운 향과 달리 상당히 독한 술이었다.
그 뒤로는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실없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이윽고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을 때.
“무슨 일, 있지?”
“…….”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을 걱정시키는 것이 싫어 애써 숨겼거늘.
그러고 보니 자신의 아버지 역시 어머니에게만큼은 단 한 번도 거짓을 숨기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런 것도 유전인가.’
마지막 잔을 비운 주호는 고개를 들어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별일이 아니다.”
“별일이 아니긴. 여기 와서 말해봐. 연장자로서 들어줄 터니.”
“…….”
손바닥으로 침상을 두들기며 말해오는 그녀의 모습에 주호는 피식 웃었다.
술기운에 취하자니, 왜인지 장난기가 차올랐다.
“내가 듣고 싶은 소리는 따로 있는데.”
“읏, 야, 잠깐……!”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오른손으론 뺨을 쓰다듬으며 그대로 침상 위로 몸을 실었으니.
끼이익, 탁.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건만, 청명한 만월을 비추고 있던 창이 저절로 닫히며 나지막한 소음을 내었다.
절정에 이른, 허공섭물의 수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