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마차가 호북 무한에 당도한 것은 열흘 하고도 사흘이 더 지난 뒤였다.
“와아.”
줄기줄기 이어진 산등성이 위로 새하얀 눈이 뒤덮여 있었다.
그 모습이 장관이라 할 수 있기에 마차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던 남궁연은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이 산의 이름을 아시나요?”
“분명 천와(天窩)라 했던 것 같은데.”
“하늘의 둥지라. 어울리네요.”
“그렇지?”
주호 역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년만의 방문이었다. 그때는 봄이 조금 지났을 계절인지라 초목이 무성하며 파릇파릇한 풍경을 자아냈지만, 눈 덮인 설산의 모습을 보아하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이다.”
그들은 마차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왕래가 적은 것인지 쌓인 눈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남궁연이 그 위로 발을 내딛자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푹 빠져들었다.
“가끔 생각했거든요. 저희 세가도 화산이나 이런 문파들처럼 산지에 자리하면 어떨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
“아니요, 이렇게 눈이 내리면 관리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차라리 도시 안쪽에 있는 것이 다행이네요.”
주호의 물음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곧 그들은 천와산의 초입으로 들어섰다.
[망량환혼진에 진입하셨습니다.]
사신문이 자리한 천와산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진법이었다.
“…이건.”
경지에 오르며 기감이 예민해진 남궁연은 곧 사방이 이질적인 기운으로 뒤덮인 것을 깨달았다.
“걱정하지 말아라. 사신문을 지키는 진법이니.”
“…진법이 펼쳐져 있는 건가요.”
“초입이나 산맥 가장자리 부근에는 사람을 쫓는 정도의 수준이다. 물론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주호는 곧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 상태창은 이미 그 해석을 끝낸바.
그의 두 눈으로 진법의 함정을 파훼하는 방법이 펼쳐져 있었다.
“…눈보라까지.”
진법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기후가 삼엄해졌다.
등 뒤는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그 앞으로만 폭설이 내리며 그들 앞을 가로막아 왔다.
“잡거라.”
“…….”
남궁연은 자신 앞에 내민 손을 보곤 잠시 멈칫거렸지만, 이내 그것을 꽉 붙잡았다.
단단하고, 따뜻했다.
같은 검을 수련하는 검객이었지만, 자신보다 더 두텁고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사방은 폭풍과 같은 눈보라가 치는 형국이었으나, 남궁연은 맞잡은 손으로부터 퍼지는 열기에 얼굴이 살짝 붉어질 정도였다.
“다 왔군.”
곧 망량환혼진의 길이 끝났다.
서서히 사방을 뒤덮던 폭설이 그치고 청명한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남궁연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던 일이었다.
아직 산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바. 적어도 반 시진은 더 이대로 가야 하나 싶었거늘 다 왔다는 주호의 말에 앞쪽을 바라보았다.
탁 트인 경관 사이로 거대한 벽이 보인다. 그것이 곧 성벽임을 깨달은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이건 문파가 아니라 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나도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지.”
주호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성벽에는 정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간간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문들이 자리했으니, 곧 그중 하나가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오랜만이네.”
천우희는 이전과 다름없는 미모를 뽐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주작신공의 성취가 있어서 그런지 은은한 붉은빛을 품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느덧 선명한 적색을 띠기 시작한바.
주호가 그것을 바라보자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당신 머리도 푸른색이 되는 게 아닌지 몰라.”
“글쎄, 그런 기미는 없는데.”
“한 번에 뛰어넘어서 그런 거 아닌…….”
“……?”
천우희가 곧 말하다 말고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자 주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 시선이 자신과 남궁연이 붙잡고 있는 손으로 향한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그것을 놓으려 했다.
꽈아악-.
하지만 남궁연은 쉬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그것을 잡아 왔고, 옅은 미소와 함께 앞으로 걸어 나오며 고개를 꾸벅였다.
“잘 지내셨나요, 천 언니?”
“…나야 그렇지 뭐. 동생은 잘 지낸 것 같네.”
서로 웃고 있지만, 둘 가운데 서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손을 쥐고 있던 남궁연의 손을 천천히 떼었다.
“…앗.”
남궁연은 살짝 섭섭하단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호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이내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향이랑 악비산은 한창 수련 중이야. 흐름이 끊길까 봐 오늘 온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런가.”
“밖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러니 슬슬 안으로 들어가자. 문주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
그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성벽의 문으로 들어갔고, 그 너머에 펼쳐진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진짜로 한 성에 밀리지 않는 규모네요.”
“그렇지? 면적은 대충 비슷할걸? 인원은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두 여인이 대화하는 사이 주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왔을 때와 같은 환영은 없었다.
그럼에도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친숙한 감각이 그를 반겨왔으니 기꺼울 따름이었다.
간혹 마주치는 이마다 그를 알아보곤 인사를 건네왔다. 주호는 한명 한명 그것을 받아주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먼저 어디로 갈래. 문주님? 아니면 동생?”
“향이에게 먼저 가지.”
적해가 마음에 걸린다고 하지만, 동생을 만나는 것보다 급하지 않았다.
그런 주호의 표정에 천우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생 사랑은 못 말리겠네.”
“네가 천후를 생각하는 것과 같지.”
“다 큰 애를 무슨.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려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며 달아나더라.”
“그러게, 어릴 적부터 잘해줬어야지.”
그 말에 그녀는 인상을 썼다.
“누가 들으면 내가 못 해줬다고 생각하겠네. 동생, 천후가 그렇게 말한 적 있어?”
“…애초에 천공자는 과묵해서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아요.”
남궁연으로서는 빈말로라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에 주호가 옅은 미소를 띠자, 천우희는 얄미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땅 위에 있던 돌멩이를 툭 찼다.
“그래, 나만 나쁜 여자지. 빨리 가기나 하자. 네 동생이나 놀래주려.”
그녀는 곧 연무장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사방은 눈으로 뒤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끈한 열기가 안쪽에서 뿜어져 나왔다.
곧 주호가 그 안으로 들어서니, 각자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주예향과 악비산이 눈에 들어왔다.
“어? 오라버니?!”
막 분광십이검(分光十二劍)의 일곱 번째 초식을 취하려던 주예향은 돌연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주호의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달려와 그 품에 안겨들었다.
“…아, 수련 중이라 땀 냄새가 날 텐데.”
그 직후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는지 움찔하며 황급히 멀어지려 했지만, 주호는 씩 웃으며 그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되었다. 네 어릴 적부터 내가 뒤처리를 도맡아 했다. 지금 와서 땀 정도는…….”
“오라버니!”
얼굴을 붉힌 주예향이 그 가슴을 두드렸다.
예상외의 충격에 주호가 헛기침하며 뒤로 물러날 찰나, 눈앞에 들어온 상태창의 정보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상태창]
-새로운 인물의 정보를 불러옵니다.
이름: 주예향
별호: -
직업: -
나이: 열아홉
소속: 주가장
무공: 분광십이검
경지: 이류(二/十)
잠재력: 上中
호감도: 上上
사신문으로 온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간 얼마나 열심히 수련한 것인지 주가장에 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어때?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치긴 했는데, 알맹이만 쏙쏙 골라서 흡수하더라.”
옆에 선 천우희가 짐짓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대단하구나. 벌써 이 정도니 조금만 더 수련한다면 입관도 어렵지 않겠어.”
주호는 대견한 기분에 주예향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땀에 절어 있었지만, 그녀는 제 오라버니의 손길이 나쁘지 않은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한구석에서 창을 휘두르던 악비산 역시 어느샌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전보다 더 튀어나온 근육이 확연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그는 제 손에 쥔 창을 세우고 주호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섬서에서 큰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별일 없었다. 그나저나 너야말로 좋아 보이는구나.”
한층 더 우람해진 악비산의 모습에 주호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상태창엔 단순히 몇 단계 상승했다고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는 바는 여러모로 달랐다.
이전의 악비산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초식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익힌 무공은 비록 악가의 절기이나 반쪽짜리에 불과한바.
그렇기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감각적인 부분들이 많이 사용되었고, 필연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간 백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그러한 부분들이 다듬어진 것인지 기도가 가지런해져 있었다.
이 정도라면 다시 천후와 붙었을 때 이전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터.
“마음 같아선 그간의 성과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데.”
“대련입니까!”
주호의 말에 악비산이 눈을 반짝거렸다.
비록 백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곤 하나, 그가 가장 존경하는 것은 주호였다.
그렇기에 지난 몇 달의 성과를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제 근육을 꿈틀거렸으나,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중으로 미루자꾸나.”
“그렇군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악비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콧바람을 내뿜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남궁 소저도 있었구려.”
“오랜만이에요, 악공자.”
악비산과 남궁연이 짤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본 주호는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 대신 네가 비산의 상대를 해주는 것이 어떤가.”
“…제가요?”
학관에 있을 때로 따지자면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등했던바.
하지만 악비산은 백호에게 가르침을 받고, 남궁연은 주호에게 가르침을 받은 상황이라면 제법 좋은 승부가 될 듯싶었다.
“소저, 부담이 간다면 거절해도 되오. 내 이곳에 온 뒤로 몇 차례 성장을 거듭했으니 위험할 수도 있소.”
“…서투른 도발이네요. 좋아요.”
남궁연도 무인이었다.
대놓고 도망칠 것이냐는 도발을 해오는 악비산의 말에 몸을 돌릴 정도로 성미가 너그럽지 않기에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면 부탁하지. 난 문주를 뵙고 오겠다.”
“그래. 나중에 무슨 이야기 했는지 알려줘야 해?”
천우희의 말에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연무장을 나왔다.
곧 그 뒤로 점차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을 때, 주호는 살짝 경직된 표정으로 단전 위를 쓰다듬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