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다음은 후계를 생각해놓고 오도록.”
주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혈기(血氣)가 치밀어 오른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으면 이성을 잃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서 섬짓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충혈된 두 눈은 주위를 훑었다.
“…….”
마인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볍게 손을 한 번 휘두르면 그들의 몸은 갈가리 찢어질 터.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황홀해졌던 자욱한 피 냄새와 강렬한 쾌감을 주었던 손맛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콱.
주호는 제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자신은 살귀(殺鬼)가 아니었다.
사도맹의 천라지망에서는 정체 모를 것에게 몸을 빼앗겨 살육을 자행했지만, 지금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손끝을 뒤덮은 욕구를 떨쳐버리고 땅을 박찼다.
“괜찮으십니까?”
“…지부로 돌아가겠습니다.”
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장각이 서둘러 다가왔다.
주호의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물어온 것이었지만, 그로서는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것이 한계일 따름이었다.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지부의 도착한 뒤, 주호의 서늘한 엄포에 장각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필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라.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궁금했지만, 장각은 군말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덜컹.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된 주호는 연공실 정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내부를 관조했다.
이때까지 잠자코 있던 적해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혼돈의 기운에 자극을 받은 것인가.’
그것 말고는 지금까지 잠잠하던 적해가 움직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잠시간 눈을 뜬 주호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상태창을 확인했으나, 그곳으로서는 적해의 존재만 나타내었을 뿐 별다른 이상 증후를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본디 내공이란 자연지기를 받아들여 각자의 호흡법으로 단전 등에 축적한 기운을 말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혈기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단전에 자리하고 있었으니.
상태창의 개입 말고는 생각할 원인이 없었으나, 그곳에서도 뚜렷한 인과가 설명되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끼익.
주호가 연공실의 문을 나서니, 벌써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
문 옆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눈을 감고 있는 남궁연이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밤사이 계속 그러고 있던 것인지 옅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었다.
“연아.”
“…….”
나지막한 부름이었다.
그럼에도 남궁연은 천천히 두 눈을 떴고, 자신 앞에 자리한 주호를 바라보았다.
“…교, 관님. 흡.”
그녀는 황급히 벽에서 몸을 떼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전에 주호가 병상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추태를 보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재빠른 손길로 입가를 훔쳤지만, 다행히 이번은 얌전히 졸기만 한 듯했다.
“아, 벌써 해가 떴네요.”
“굳이 이곳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거늘.”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미안하단 표정을 지어오는 그의 모습에 남궁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 그녀 역시 사신문의 고수들과 함께 익천 표국의 주변을 포위했다.
무사히 주호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막상 모습을 드러낸 그의 얼굴은 날카롭기 그지없는바.
그 살벌한 분위기에 말도 걸지 못한 채 그저 문 앞을 지킨 것이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남궁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간 제 아랫배를 쓰다듬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답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꾸나.”
“…네.”
적해 때문인지, 아니면 반나절을 굶었기 때문인지 매우 허기가 졌다.
그렇게 조금 늦은 점심 이후, 주호는 곧바로 남궁연을 대동한 채 장각을 찾아갔다.
“아, 나오셨습니까.”
“간밤에는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그나저나 어제의 상황은…….”
“예상대로 사흉수의 끄나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장각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사흉수 중 수좌를 차지하고 있는 혼돈의 출현. 그것은 쉬이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절 만나는 것으로 이곳에서의 목적이 끝났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감숙으로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런 것까지 말해주다니. 대체 저의가 뭘까요.”
주호로서도 궁금할 따름이었다.
아니면 어젯밤에 그 자신에게 해왔던 말이 진심일 수도 있었다.
‘사신문 하나로 어떻게 막을 수 있겠냐고?’
혈천신교가 마교의 긴밀한 부분까지 관여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거기에 더해 사도맹주를 중독시키고, 그들을 이용할 단계까지 찾아온바.
하지만 이쪽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이 서신을 제 이름으로 각각 무림맹주와 남궁세가주께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허면 청룡께서는?”
“현무께서는 섬서로 가셨지요.”
“예. 사도맹의 상황을 살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길로 본문에 복귀하겠습니다. 확인해야 할 것도 있으니.”
“곧바로 말입니까.”
“예.”
“그러면 일각 이내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주호가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장각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본문이라면 호북 쪽인가요?”
“그래. 하남을 가로지른다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이렇게 된 것 그는 계획을 바꿀 생각이었다.
겨울이라 할지라도 길어야 호북까지는 길어야 보름 안쪽으로 걸리는바.
차라리 그곳에서 천우희 일행과 합류한 뒤 개관 일정에 맞춰 하남으로 이동하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이것에 관해 조사도 해보고 싶으니.’
주호는 여전히 제 존재감을 내뿜으며 꿈틀거리고 있는 적해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상태창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신문에는 그간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분명 이와 같은 증상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으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문주인 하월벽을 비롯한 다른 고수들에게 조언을 받을 수 있을 터.
“그러면, 부디 무사히 귀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나중에 또 뵙겠소.”
“건강하세요.”
갑작스러운 이별에 장각은 아쉬움을 비추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주호와 남궁연의 인사를 끝으로 마차는 출발했고, 눈길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날씨가 좋았으면 좋겠네요.”
달려 나가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남궁연이 말했다.
근래 허리춤까지 쌓일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내리던 눈발이 어느덧 그치고 쨍쨍한 햇빛이 하늘 위에 자리했다.
이대로 날씨가 좋다면 조금 더 일찍 호북에 도착할 수 있는바.
“그러길 빌어야지.”
주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인바.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호북에 도착할 수 있었으면 좋을 따름이었다.
***
“그런가, 이쪽으로 온다고.”
천우희는 서신의 내용에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가 검마와의 싸움 이후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사도맹의 천라지망이 펼쳐졌다고 보고받은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설마 주호 정도의 고수가 당했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검마의 이름이 주는 무게는 가볍지 않을뿐더러 사도맹까지 나선 상황이었다.
섬서에 있던 현무가 곧바로 그곳의 지원을 향해 출발했다고 했지만, 그녀로서도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잘 풀릴 것이리라.
그렇기에 그의 동생은 주예향에게도 아무런 일이 아니라며 잘 둘러대지 않았는가.
하지만 상황이 본격적으로 나빠지자 여유를 잃어버렸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직접 주작단과 청룡단을 이끌고 나설 각오까지 했다.
옆에 있던 백호가 아니었더라면, 그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출진했을 터.
다행히 얼마 뒤 주호를 발견해 무사히 구출해냈다는 보고가 도착하자 맥이 탁 풀린 듯했다.
다소 상처는 입은 듯해 보였지만, 얼마간 요양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말에 연신 한숨만 내뱉었다.
‘걱정시키고 있어.’
다시 만나게 된다면 뒤통수를 강하게 한 대 때려주리라.
서로 격차를 생각하면 전력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때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간 마음고생시킨 것을 생각한다면 그도 미안해서 한 대 정도는 맞아줄지 몰랐다.
“…그나저나 이 정보들은.”
천우희는 가늘어진 눈으로 동봉된 서신들을 바라보았다.
사도맹주의 중독, 그리고 마교의 이름으로 그것을 이용하려는 혈천신교.
혼돈의 존재와 그들의 행적까지.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오면 한 대 때리고 칭찬이라도 해줘야겠는데.’
장각의 보고에는 이 정보들을 알아내는 대에 주호의 공적이 대부분이라 했다.
과장 같은 걸 하는 사내는 아니었으니 그 말은 정말일 터.
“언니, 바쁘세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자신을 불러오는 주예향의 모습에 천우희는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사신문에 돌아온 직후 그녀는 개인 수련과 더불어 주예향을 가르치는 데에 매진했다.
본래라면 폐관 수련을 통해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해도 모자랐지만, 애초에 이 경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것도 주호 덕분인바.
그렇기에 그것을 조금이라도 갚고자 스스로 주예향을 가르치고자 받아들인 것이었다.
“흡-!”
천우희가 주예향과 함께 연무장에 가니 이미 선객(先客)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웃통을 활짝 벗어 재낀 채 창을 휘두르고 있던 악비산이었다.
기합과 함께 창끝이 허공을 베어 가를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던 주예향은 그 모습을 보곤 두 눈을 빛냈다.
우락부락한 근육과 한 점 막힘없이 허공을 꿰뚫는 날카로운 창술.
시선을 끌기에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향아. 학관에 입학하더라도 함부로 남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다. 알지?”
그 모습을 본 천우희는 슬며시 걱정이 일었다.
보통 무림 문파의 후기지수들은 어릴 적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으며 많은 사람을 만나 왔다.
하지만 주예향은 상가의 자제로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은바.
그렇기에 어쭙잖은 수준이어도 괜히 신경을 뺏겨 넘어가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럴게요.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최소 기준치가 제 오라버니거든요.”
“…그건 너무 높은데.”
그 말에 천우희는 헛웃음을 토해내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천지에 주호 같은 남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외모는 물론이고, 그 몸에 품고 있는 무공 또한 비교할 사람이 없으니.
‘그리고 그 몸도…….’
흠칫.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옛 기억에 천우희는 얼굴을 붉혔다.
“언니?”
그 옆에 선 주예향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의문 어린 표정으로 물어왔으니.
“…아니야, 얼른 수련이나 시작하자.”
천우희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그러곤 평정을 가장하며 잡념을 떨쳐내고자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