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호오.”
주호의 민낯이 드러나자, 혼돈은 감탄을 흘렸다.
“듣던 대로 훤칠한 외모군. 아, 이전에 이쪽 아이들과 만난 적이 있었지? 처음이 궁기였을 테고, 적혈마검 그리고…….”
그는 잠시 손가락을 꼽으며 수를 헤아리다가 이내 탄식을 터트렸다.
“청혈도제도 있었군. 이런 일로 잃기 아까운 아이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워.”
잠시 차를 마심으로 목인 혼돈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혈천신교의 교주인가?”
그의 말을 모두 흘려넘긴 주호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청룡이 사신수의 수좌인 것은 맞지만, 사신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주가 있었고, 그 밑으로 호법을 비롯한 여러 고수가 있었다.
사흉수 역시 혈천신교의 산하로 있는 듯 보였다.
신교라는 이름을 표방하고 있으니 분명 그 우두머리가 있을 터.
“하하, 그럴 리가.”
그렇기에 그것을 물은 것이었으나, 혼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을 말한 기색은 없지만, 섣불리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태창을 불러내었다.
[상태창]
이름: ???
별호: 혼돈(混沌)
직업: ???
나이: ???
소속: ???
무공: ???
경지: ???
호감도: 上下
하지만 그 내용에 짐짓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이하게 높은 호감도를 제외하더라도 별호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이 전부 알 수 없는 문자로 채워져 있었다.
옛적 천우희와 처음 조우했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무엇을 보는 것이지?”
“……!”
주호의 시선이 찰나 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본 혼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무엇이 있군.”
의심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혼돈은 찻잔을 쥐고 있던 손을 허공에 뻗었다.
그 손길이 이내 상태창의 안을 훑기 시작한바.
주호는 상태창에 무언가 변칙성이 발생할까 싶어 긴장했으나,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인상을 찌푸리며 별 해괴한 행동을 한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흠.”
혼돈은 이내 손을 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헛손질한 직후라 머쓱한 표정을 지을 법도 했지만, 그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네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그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두드렸다.
사신문 내부에 사흉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처럼 사흉수 내부에도 사신수에 대한 전승이 남아 있었다.
혼돈은 그 구절 중 하나를 떠올렸다.
본디 청룡의 눈은 마(魔)를 꿰뚫어 보는 정수라 하여 특별하다고 여겨졌다.
경각심을 여기라는 비유라 여겼거늘, 지금의 그 행동을 보아하니 전승대로 정말 기이한 능력을 품고 있는 듯했다.
“글쎄.”
주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상태창의 내용이 보였더라면 무언가 더 그럴듯한 말을 내뱉었겠지만, 그 어느 것도 확실시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말을 아꼈다.
“그나저나, 그림이 취미인가.”
대신, 시간을 끌기로 했다.
천우희 때는 시간이 지나자 상태창의 정보가 개변되었던바.
이번 역시 그것에 기대를 담으며 혼돈의 정체를 파악할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어떤가, 제법 공을 들인 것인데.”
갑작스러운 화제였지만, 혼돈은 짐짓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확실히 그 자부심이 이해가 갈 정도로 수준이 높은 그림이었다.
붓질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으며, 그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만큼의 고수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절대 검마의 밑이 아니다.’
설마 입신지경을 뛰어넘은 경지일까.
혼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리송하기 짝이 없었다.
보통은 상태창이 없어도 상대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지만, 그에게선 단철량이나 남궁한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어렴풋한 기운만 느껴졌을 따름이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선뜻 결론이 나지 않은 마음에 주호는 탁자 밑으로 신검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혼돈은 그의 표정에서 그러한 기색을 눈치챈 듯 이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다툴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관이나 무림맹의 이목이 쏠린 이상 더 소란이 나면 곤란하거든.”
“난 상관없는데 말이지.”
주호가 곧바로 도발하듯 씩 웃으며 말하자, 찻잔을 놓은 혼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도발은 단순히 말로만 그치지 않았다.
드드드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해나갔다.
처음은 찻잔이었다.
반쯤 남아 있던 내용물 위로 파문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찻잔 자체가 진동하며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탁자가 흔들렸고, 이내 그들이 있는 자리까지 모조리 그 영향권에 휩쓸렸다.
“후후.”
혼돈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 진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찻잔의 내용물이 허공에 튀어 올랐다.
어둠 사이로 반짝이는 알갱이가 흩어져 내리려 했으나, 그것들은 이내 누군가 붙잡고 있기라도 한 듯 허공에 우뚝 멈춰 섰을 뿐이었다.
쿠웅-.
동시에 사방으로 묵직한 압력이 내려앉았다.
경망스럽게 떨리던 방 안의 모든 것이 짓눌렸고, 찻잔 밖으로 빠져나와 허공에서 붙들렸던 것들도 이내 시간이 되감아 지듯 그 안으로 되돌아갔다.
“…….”
신기(神技)에 달한 허공섭물.
주호는 마치 전신이 농밀한 늪에 빠져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창밖엔 성성한 빛을 내는 만월이 선명하건만, 방안은 깊은 심연에 가까웠다.
숨도 내쉴 수 없는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고, 기이한 공포가 폐부를 옥죄어왔다.
파아앗-!
곧 그 위로 한줄기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으니, 주호의 눈 위로 청명한 빛이 깃들어 심연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호오.”
흔들리지 않고 오롯이 자신을 향하는 그 눈동자에 혼돈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로서도 사신문과의 충돌은 오래된 일인 바.
전승에 의하면 항상 백중지세를 이루었다고 하거늘, 과연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결과였다.
서로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와 한치의 밀림 없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극히 높고 고절한 수법이기에 밖에선 일말도 느끼지 못할 것이었지만,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린다면 활화산처럼 폭발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쿵.
서로 기세 싸움을 겨루는 도중, 주호는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 건…….’
돌연 잠자고 있던 적해(赤海)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경로는 청룡신공과는 정반대되는바.
아마 혼돈의 기운에 자극을 받은 듯 꿈틀거리며 백회를 향하기 시작했다.
츠즈즈즈-.
그러자 주호의 몸 위로 일렁거리던 무형의 기운에 점차 색이 어리기 시작했다.
본디 청룡신공의 푸른색이 아닌, 마치 피를 머금은 듯한 적색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요사스럽게 몸을 부풀리며 허공에서 일렁거리는 그 기운에 혼돈의 두 눈이 커졌다.
“…그건.”
옛적, 어디선가 많이 보아왔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손을 뻗은 것은 정말로 본능적인 일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참사를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촤아악-!
일렁거리는 적해의 기운을 건드리려 한 손끝부터 피부가 찢어지며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
혼돈은 이내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손을 내뺐지만, 적해는 그를 그리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꽈득, 꽈드득-.
마치 그의 손이 진미(珍味)라도 되는 듯 게걸스럽게 탐하며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살점은 짓이겨졌고, 근육은 찢어졌으며, 뼈는 뒤틀려 나갔다.
콰아앙-!
혼돈은 거칠게 손을 뿌리쳤다.
그럼에서야 겨우 적해에게 먹혀가던 손을 내뺄 수 있었던바.
하지만 손가락은 뼈마디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팔꿈치에 이르는 부분까지 짐승에게 뜯겨 먹힌 것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런.’
혼돈이 기운을 거두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주호 역시 몇 번 가쁜 숨을 내쉬며 기운을 가다듬었다.
동요하고 싶지 않았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역시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적의 팔 한 짝을 짓이겼으니 차라리 잘 된 상황이라며 기세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적해가 어찌 될지 모르니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거야 원, 두 번 호기심을 보였다간 팔이 남아나질 않겠군.”
혼돈은 엉망진창인 제 팔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통에 겨워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칠 법도 하건만,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식은땀 하나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이 꼴이 되었으니 말이네.”
혼돈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호를 바라보았다.
명백한 축객령이었으나, 그는 서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직 날 만나고자 하는 목적을 듣지 못했는데.”
혼돈은 한숨을 내쉬었다.
푸른빛이 흉흉하게 깃든 그 눈동자를 보아하니 대답해주기 전까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는 이야기도 좀 하고, 설득도 좀 하려 했거늘 말이네. 세상일이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군.”
그는 툴툴거리며 불평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
“내 쪽이 먼저 하지.”
“흠, 문답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혼돈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호는 말을 이었다.
“네놈들의 목적에 대해서다.”
“그날 듣지 않았는가. 사도맹주를 빌미로 마교의 편에 붙게 하려는 것이지.”
예상외로 그 대답은 순순히 나왔지만, 주호는 두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그리고 중원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혈천신교가 발족하려 하는가.”
혼돈은 허를 찔렸는지 잠깐 움찔하고는 이내 씩 웃어 보였다.
“눈치가 빠르군. 뭐, 멍청이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겠지.”
“어째서 그리 쉽게 말해주는 것이지?”
“말해준다고 해서, 무얼 할 수 있는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수십 년이었다. 그간 준비한 대계가 수십, 수백 개가 넘는다. 사신문? 고작 한 단체가 움직인 것으로 우릴 전부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
“원천봉쇄를 하고 싶다고 하여도 혈천신교와 사흉수의 본단은 세외에 있지. 기껏해야 천 단위인 자네들로 공격해올 수 있겠는가? 아니라면, 지금 자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조차 우리 계획일 수 있거늘. 그건 믿을 수 있겠는가?”
“…말로는 이미 중원을 정복한 것 같군.”
“그리 쉬우면 좋을 따름이네.”
주호는 잠시 머리를 정리하려 했으나, 한 번에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았다.
사흉수나 혈천신교나 작금 강호 정세에 너무 예민하게 얽혀 있는바.함부로 속단하는 것은 이르기에 이 자리에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보류했다.
“…그래서 네 질문은?”
“정직하군. 굳이 응해줄 이유가 없음에도 들어주려는 것인가.”
“나 역시 사실을 말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하, 이건 한 방 먹었군.”
혼돈은 잠시 질문을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묻고 싶은 게 좀 있었는데, 되었네. 나중으로 미루지.”
“나중?”
“기다렸던 손님의 대접도 끝났으니 곧 이곳을 뜰 생각이네. 다음 목적지는 감숙이지. 자네는 분명 정천학관에서 교관을 하고 있었나. 하남에서의 일정은 아직 시일이 남았으니 재회는 꽤 오래 뒤의 이야기겠군.”
혼돈의 말에 주호는 피식 웃었다.
그러곤 혈기(血氣)가 선명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치 야수가 으르렁거리듯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다음은 후계를 생각해놓고 오도록.”
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나갔다.
“…….”
곧 방안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잠시간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던 혼돈은 이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구나, 쉽지 않겠어.”
너덜너덜해진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 그 위로 어둠이 감쌌고, 촌각이 지나자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분명…….’
하지만 주위에 묻은 핏자국은 아직 선명하기만 한바.
떠나간 주호의 자취를 쫓는 혼돈의 두 눈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