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격렬한 파공음이 귓가를 아울렀다.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장각은 그 문가에 멈춰 선 채 안에서 펼쳐지는 비무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겨루기인 듯 내공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각자의 검에 서린 기세가 사뭇 날카로운 것이 제법 진심으로 보이는바.
‘과연 청룡이로구나.’
장각은 내심 감탄을 흘렸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전승자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은바.
그렇기 때문인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설마 단신으로 검마 철무혁을 쓰러뜨리고 사도맹이 펼친 천라지망까지 뒤흔드는 공적을 세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아직 스물여섯에 불과한 나이로 그런 무위를 보였으니 자연스레 존경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흠.”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향했다.
검화(劍花) 남궁연.
남궁세가의 직계이자 안휘제일미로 꼽히며 천하제일미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되곤 하는 이름이었다.
검에 대한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고 들었거늘, 청룡과 비무를 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전혀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나.’
장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나, 한 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현무께 듣기로 분명 청룡은 주작과 긴밀한 관계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때까지 살펴본 바로 검화가 청룡을 생각하는 마음은 분명 연정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다.
“…뭐, 영웅호색은 호색(好色)이라 하였으니.”
자신이 깊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무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있다가,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쳤을 때가 돼서야 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기다리게 했소.”
주호는 이미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쪽이 개안(開眼)했을 따름입니다.”
“이쪽으로 찾아온 것은 혹…….”
그 물음에 장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사한 자료를 그에게 넘겼다.
“마인들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주호가 검마, 그리고 사도맹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들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행적이 묘연해진 마인들의 뒤를 쫓았고, 마침내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낼 수 있었다.
“회합 때에 확인한 인원은 둘이지만, 그 외에도 스무 명가량 정도가 더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위치는 산서성 북쪽 구역에 있는 비천 표국의 지부입니다.”
“익천 표국?”
그 이름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지었다.
중원을 대표하는 정도의 표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 아니던가.
그 역시 옛적 집안의 일을 도우며 간간이 들어본 적 있던 이름이기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익천 표국이 마교와 관련 있을 줄은…….”
“저희도 이번 일로 처음 알았습니다. 그간 의심이 가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익천이라는 이름은 생뚱맞았지요.”
“무림맹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 모를 가능성이 클 겁니다. 본문의 정보는 무림맹에 뒤처지지 않으니. 그래도 일단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조사하고 그쪽에 슬쩍 흘릴 예정입니다. 마교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니 철저하게 조치하겠죠.”
말하는 것을 보니 한두 번 그랬던 것이 아닌 듯싶었다.
‘뭐, 그편이 제일 깔끔하려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마교의 끄나풀을 밀어버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장각은 말을 잇는 도중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주호가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내니, 그는 면목이 없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사실 몇몇 인원이 어젯밤 그 안쪽까지 접근했답니다. 잠행해 특화된 이들이라 어느 선까지는 걸리지 않고 나아갔는데, 발각된 것인지 소식이 끊겼습니다.”
소식이 끊겼다는 말에 주호는 그들의 운명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변화는 있습니까?”
“눈에 띄는 것은 없습니다. 인원도 배치도 전부 그대로였지요. 땅굴이라도 파지 않는 이상 벗어나지 못합니다. 설사 땅굴을 파낸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이쪽에서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찾아오라는 이야기군요.”
“아마 그럴 듯싶습니다.”
검마를 이용해 사도맹을 움직이려던 것은 주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위험 부담을 계속 안고 있는 채 이곳에 머무르는 것일까.
“…아직 이곳 산서에 쏠린 이목이 많습니다. 무림맹은 물론 황실에서 동창의 고수들까지 파견했다는 소문까지 있더군요.”
“흠.”
주호 개인은 소란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신문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고수가 지켜보는 지금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부담스러울 따름이었으니.
“…일단 몸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겠군요.”
어찌 되었든 부상의 회복이 먼저였다.
***
보름 뒤.
주호는 연공실 안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전신을 따라 푸른 기운이 일어나 파도처럼 움직였고, 이내 그 출렁임이 절정에 이르렀다.
파앗-.
주호가 두 눈을 뜨자 시퍼런 광망이 일렁거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간 그 여운을 즐기던 주호는 이내 고개를 내려 제 단전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가.”
보름간 그는 내상 치유에 집중했다.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스스로 적해(赤海)라 이름 붙인 역천의 기운이었다.
바다의 흐름처럼 고고하기 짝이 없고, 그 색이 피처럼 붉었기에 그리 부르기로 한바.
그러자 상태창 역시 그 이름이 적해로 변경되며 선명히 그 존재를 알려왔다.
청룡신공을 극한으로 운용해도 미동조차 없었다.
다만, 서로 물과 기름처럼 상극의 성질을 지녔기에 각자의 영역에 머문 채 범접하지 않았다.
‘불완전 요소는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달포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난 싸움에서 입은 피해를 전부 회복했다.
상태창 한쪽에 적혀 있던 주화입마의 상태 이상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연공실 앞에서 장각이 기다리고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오늘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달이 차면 움직이겠습니다.”
더는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장각 역시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면 저희도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리지요.”
밤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필 날이 보름인지라, 하늘엔 만월(滿月)이 떠올라 있었다.
잠행에 어울리는 시기는 아니었으나, 주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스스슥-.
밤이 깊은 와중이었다.
마을 역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주호를 비롯한 사신문의 고수들이 은밀히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익천 표국의 지부로 향했다.
-그러면 저희는 여기서.
곧 목적지에 도착하자 사신문의 고수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주위로 산개했다.
그들은 싸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도주 동선을 비롯한 무림맹과 관의 동향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대비한 만큼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하는 따름이었지만, 무림의 일은 언제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 않은가.
“후.”
짧게 한숨을 내뱉은 주호는 망설임 없이 그 벽을 타고 넘었다.
탁.
딱히 몸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굳이 이런 초장에서부터 공격을 가해 소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사뿐히 벽을 넘고 그 가운데로 떨어져 내리자 곳곳에 숨어 있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호는 개의치 않고 발을 내디뎠고,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예상했던 대로 공격은 없었다.
정말로 그 자신을 기다린 느낌마저 받았으니.
처음 오는 곳이었으나, 주호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전각 가운데, 마치 보란 듯이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이가 있지 않은가.
주호는 얼굴을 매만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피면구는 처음이라 어색하군.’
이번 잠행을 위해 장각이 준비해준 인피면구였다.
그간 월영사신으로 활동할 때나, 신분을 숨기고 싶을 때는 가면을 착용했던바.
하지만 처음 착용한 인피면구는 정말 사람의 피부처럼 착 달라붙는 것이, 어지간히 눈썰미가 좋은 이가 아니라면 그 이질감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끼이익-.
전각 안으로 들어간 주호는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그 앞으로는 쭉 이어진 길만이 펼쳐져 있었으니.
곧 그 끄트머리에 도착한 주호는 커다란 창이 활짝 열린 방 안에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한 달간의 여정이 드디어 끝을 향해가고 있어서 말이네.”
혼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수풀이 우거진 가운데, 청명한 만월이 떠오른 풍경.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과 똑 닮아 있는 것이었다.
어찌나 생생한 그림인지, 창밖을 보는 것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툭.
주호는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댔다.
조금 정도 기다려주지 못할 정도로 인내심이 없진 않은바.
그렇기에 잠시간 침묵을 지키며 그 앞을 바라보았다.
“후.”
혼돈은 이내 붓을 내려놓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내왔고, 빈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짧은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거부할 것도 없었기에 주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 앞에 앉았다.
다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엔 시선도 두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서로 통성명, 을 하는 것이 좋을 거로 생각하지만, 자네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
혼돈은 사뭇 여유로운 태도로 차를 마셨다.
주호는 그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부동의 자세를 지킨바. 그러자 혼돈은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독 같은 건 타지 않았네. 질 좋은 차이거늘, 마시지 않는 건가.”
정말로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그 태도에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날 기다린 것인가?”
방 안으로 들어온 다음 꺼내는 첫 마디였다.
그 말에 혼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있던 그림을 가리켰다.
“본래라면 협상이 끝나는 대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검마를 쓰러뜨릴 정도의 고수가 누구인지 궁금했거든. 덕분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지만, 계획이 조금 꼬이게 되었어.”
그는 정말로 곤란해졌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엄살 같지는 않아 보였다.
실제로 회합의 당사자인 검마가 사망했으니 당분간 사도맹과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한바.
재차 접촉을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관계의 골이 깊어져 이전만큼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어떻게 보이지?”
달포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냐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혼돈은 발뺌하듯 작게 웃었다.
“글쎄, 이쪽은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없거늘.”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잠시간 뜸을 들인 주호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혼돈(混沌).”
“…….”
혼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날 그렇게 불러준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네.”
“…역시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군.”
주호는 침중한 낯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회합 중 기척을 알아챈 것은 검마 쪽이라 생각했으나, 혼돈은 처음부터 그를 파악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구태여 혼돈이라 칭한 것은 이쪽에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함이었을 터.
“나는 잘 모르는 이야기네만.”
“같잖은 연극은 그만하도록. 피차 서로 사정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 말과 함께 주호는 망설임 없는 태도로 인피면구를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