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황제의 칙명을 받은 관아와 무림맹이 성내를 이 잡듯 뒤졌음에도 흉수를 발견하지 못함에 따라 산서성의 분위기는 흉흉해져만 갔다.
이윽고 부서진 성벽을 따라 길게 이어진 싸움의 흔적을 따라 성 밖의 수색도 시작했지만, 궂은 날씨 가운데 그 희미한 자국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욱이 인지를 뛰어난 고수 간의 전투였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못해도 수십 장의 격차가 있었고, 간혹 그 방향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관과 무림맹은 마침내 산서와 섬서로 넘어가는 길목에 천라지망이 펼쳐졌다는 것을 파악했다.
천라지망과 산서성의 사건이 무관계하지 않으리라.
직감적으로 그렇게 깨달은 조사관들은 서둘러 그쪽의 조사를 시작했지만, 이미 주호가 사신문의 고수들에 의해 구출된 지 하루가 지난날의 일이었다.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했음에도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자 관과 무림맹은 천라지망을 펼친 이유를 소명하라 공문을 보내며 사도맹을 압박했다.
사도맹으로서는 곤란한 상황일 따름이었다.
그 자신들 역시 피해자였다.
맹의 기둥 중 하나인 검마(劍魔)와 더불어 수백에 달하는 고수가 명을 달리했다.
천라지망까지 펼치며 그 흉수를 사로잡으려 했지만, 수확이라곤 얼어붙은 싸늘한 주검밖에 없지 않은가.
사도맹으로서는 억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제삼자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끄응.”
열흘 가까이 침상 신세를 졌던 그는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일 먼저 한 것은 그간 쌓인 찌뿌둥함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연무장 위에 갓 내려앉은 새하얀 눈을 쓸어내고 그 위에 섰다. 고작 열흘간의 침상 생활이었지만, 두 발로 오롯이 서 있자니 왜인지 어색함이 느껴졌다.
‘나태한 타성에 젖었군.’
끼니때마다 남궁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편히 식사하고, 나머지는 서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등 휴식에 전념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게을러진 것 같았기에 두 손으로 제 뺨을 힘껏 두드리며 물러진 정신을 일깨웠다.
“후우…….”
한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와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겨울은 이미 완연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달포 뒤쯤에 천우희 일행과 하남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이곳에서의 일 때문에 시일을 뒤로 미뤘다.
외상은 열흘 동안 얼추 회복한바.
내상 역시 사신문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칠할 정도 치료할 수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유일한 한 가지는, 아직도 단전 한 구석에서 자리잡고 있던 역천의 기운이었다.
“후-.”
주호는 이내 잡생각을 버렸다.
먼저 그간 물러진 몸을 다잡을 작정이었다.
몸에 남은 상처가 회복되어간다지만, 아직 격하게 움직일 정도는 아닌바.
그렇기에 신검을 뽑아들고는 천천히 청룡신공의 기수식을 취했다.
근간이 되는 청원결(靑源結)을 시작으로 각 초식 하나하나를 이어가며 검을 휘둘렀다.
쉬익-.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균일한 속도로 선이 그어지며 한 마리의 청룡을 그려내었으니.
뚝, 뚝-.
열흘 만의 수련인 탓일까, 그의 몸은 금세 땀으로 물들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기만 했지만, 연무장 위에 남아 있던 눈의 잔재는 어느덧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녹아버렸을 따름이었다.
‘확실히, 다르다.’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달라진 것은 오감만이 아니었다.
검을 따라 이어지는 결이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이전보다 더 완성에 가까운 경지에 근접해 있었다.
한 줌의 내공조차 일으키지 않은 상태로 이러하거늘, 십성 공력을 전부 검에 담으면 어찌 될까.
“아니, 다음의 경지로 나아간다면.”
「입신지경(入神之境)」
무림맹주 검선(劍仙) 단철량.
사신문주(四神門主) 하월벽.
남궁세가주 검제(劍帝) 남궁한.
매화검선(梅花劍仙) 선청우.
안면이 있는 이들을 비롯해 마교의 천마나 소림의 방장, 그리고 무당의 장문인까지 강호를 대표하는 고수들만이 올랐다는 경지였다.
주호의 나이는 곧 스물일곱이 되었다.
고금제일인이라 일컬어지는 무황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고작 스물일곱에 이러한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이가 없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주호는 깊게 숨을 내쉬며 끓어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혔다.
자만은 이 여정의 끝에서 온 천하를 굽어보며 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녹슨 몸을 갈고 닦는 데에 집중했다.
“…교관님.”
이어진 청룡신공의 초식이 마침내 결말에 다다랐을 때, 검을 내리고 호흡을 가다듬던 주호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느냐.”
“몸은 좀 어떠세요?”
“흠.”
남궁연의 물음에 주호는 제 어깨를 매만졌다.
오랜만에 활동적으로 움직여 조금 뻐근하긴 했지만, 신검에 관통당한 왼손을 제외하곤 남은 상처 중 그리 큰 것은 없어 보였다.
“괜찮은 것 같구나. 이리 땀을 흘릴 정도로 움직여도 그리 통증이 느껴지지 않으니.”
“다행이네요.”
괜찮다는 말에 남궁연은 살포시 웃어왔다.
그녀는 사신문의 협력자지만, 직접 적으로 관여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기에 주호가 회복할 동안 홀로 무공 수련에 매진해왔던바.
남궁연은 눈이 녹은 연무장 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살짝 머뭇거리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오랜만에 어떠신가요?”
“흠.”
[상태창]
이름: 남궁연
별호: 안휘제일미, 검화(劍花)
나이: 스물
소속: 남궁세가
무공: 창궁무애검법
경지: 초일류(四/十)
잠재력: 上上
호감도: 上上
자신을 가두고 있던 한계를 부순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단순한 속도로만 보자면 주호가 비동 안에 있을 때의 성취보다 더 뛰어났을 정도였으니.
올해 초 위천강의 경지는 진작 따라잡았고, 조만간 그 본인에까지 도달할 듯싶었다.
‘무언가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 건가.’
주호는 그녀의 머뭇거리는 눈동자에서 희미한 기대를 읽어냈다.
아마 홀로 해결하기 힘든 종류의 문제인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에게 찾아와 비무를 이야기하는 것일 터.
“스승 된 도리로서 제자의 청을 무시할 순 없지.”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한계에 부딪혔다면 남에게 의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에게 이러한 부탁을 해왔다는 것 자체가 기꺼울 따름이었다.
“대신 내공은 제한하마. 아직 내상 쪽은 완벽히 다스리지 못한 처지라.”
“그리할게요.”
주호의 말에 남궁연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비무 정도에서 내상이 도질 일은 없었지만, 단전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역천의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처음부터 원천봉쇄를 했고, 순수한 실력으로만 겨루고자 했다.
척.
곧 연무장의 중심에서 주호와 남궁연이 마주 섰다.
‘확실히, 성장했구나.’
주호는 자신을 향해 검을 겨눈 그녀를 보며 두 눈을 가라앉혔다.
내디딘 발, 보폭, 비튼 허리, 검을 쥔 자세, 시선, 어깨의 방향.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한 것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형태였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안 되지.’
무릇, 고수란 자신의 부족함 또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알았기에 고수(高手)라 하였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극한으로 제어한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하수라면 문제가 없었다.
완전무결(完全無缺)의 무위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할 터니.
하지만 그 반대의 상성이라면,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의 고수를 상대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정반대로 달라졌다.
완벽하기에 천장은 정해져 있다.
싸움의 승기를 잡는 요소 중 가장 큰 것은 실력이었지만, 그다음 가는 것은 불확실성에서 오는 가능성이었다.
완벽하기에 하수를 상대로 패배할 가능성은 무(無)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할 가능성 역시 무(無)에 가깝다.
즉, 한계가 명확했다.
남궁연은 이것을 깨부수려 하는 것일 터.
서늘한 기세를 발(發)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호는 내심 궁금해졌다.
‘더 위의 완벽을 추구함으로 타파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일 것이냐.’
어떤 형태의 꽃이 피어나든, 그 잎은 활짝 만개하며 향기로움을 풍길 것이다.
곧 남궁연의 검이 허공에 어지러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창궁무애검법이 아닌, 선우연의, 화산의 산검(散劍)을 닮은 형태였다.
한 번의 휘두름이 두 개의 그림자가 되고, 또 그것이 나뉘어 공백을 채웠다.
비록 매화 검법과는 그 형태가 달랐지만, 품고 있는 의지는 비슷하기 매한가지였다.
‘제 친우들의 것을 흡수했나.’
비무는 수백 번을 넘게 했고, 같이 검을 맞댄 횟수가 수천 번을 넘었다.
남궁연의 재능이라면 올 한 해 동안 같이 수련을 거듭한 이들의 검을 배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터.
하지만 지금의 비무에 그런 모습을 보인다니 의뭉스러울 따름이었다.
쉬익-.
곧 그 검세(劍勢)가 변했다.
형식과 뜻을 품은 것에서, 지극히 실리만을 추구하는 메마른 검이었다.
‘위천강인가.’
마찬가지로 형태는 달랐지만, 그 골조가 되는 것은 같았으니.
곧 그녀의 검은 천후의 것처럼 패도적으로 변했고, 악비산의 것처럼 무겁고 날카로워졌으며, 당천유의 것처럼 은밀해졌고, 철대환의 것처럼 기묘해졌다.
“…허?”
그 끝에서, 주호는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마지막 차례는 영락없이 남궁연, 그녀의 검을 보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상을 깨고 나온 것은 형태와 의지 모두 어설프나마 청룡검법을 흉내 낸 것이었다.
“제법이다만…….”
주호는 남궁연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겨우 범재에 미치는 재능에 불과했으며, 상태창이 아니라면 삼류도 그럭저럭인 인생으로 마감했을 터였다.
하지만 남궁연은 태생부터 다르지 않은가.
어릴 적부터 남궁 세가의 가르침을 받았고, 수많은 고수를 보며 자라왔다.
지닌 재능 역시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녀가 펼친 검의 허점을 찾고,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완벽이란 이름에 흠집을 내었다.
캉-!
날카로운 금속성이 연무장 안에 울려 퍼졌다.
남궁연의 손에 들린 검이 튕겨 나가 허공을 부유하다 바닥에 떨어져 내린 것이었다.
“…….”
남궁연은 제 목에 겨눠진 신검(神劍)에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제 안에서 무언가를 고민하듯 천천히 곱씹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기색이 바뀌었을 찰나, 주호가 입을 열었다.
“대답은?”
나지막한 물음이었다.
남궁연은 잠시 입을 우물거리며 할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요. 더 복잡해졌네요. 비무 전까지는 분명 손을 뻗으면 잡을 듯 말 듯 아리송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멀어진 느낌이에요.”
그녀는 복잡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주호는 옅게나마 미소를 지어주었을 따름이었다.
“더 나은 길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태여 못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
“…방향이 바뀌었다는 소리인가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너만이 알겠지.”
“…….”
남궁연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 말을 자신의 마음에 새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면.”
제자 쪽의 가르침도 일단락되었으니.
주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까 전부터 연무장의 입구에서 기다리던 장각을 바라보았다.
“기다리게 했소.”
“아닙니다. 이쪽이 개안(開眼)했을 따름입니다.”
“이쪽으로 찾아온 것은 혹…….”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 한창 바쁠 이 시각에 찾아오진 않았을 터.
그 말에 화답하듯 장각은 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인들의 소재를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산서성에서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