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주호는 천천히 단전을 살폈다.
틀림없는 역천의 기운이었다.
망량환혼진에서 빠져나온 직후의 것과 같았으며, 주화입마와 동시에 자신의 몸을 잠식한 것과 같았다.
스스스-.
그는 천천히 청룡신공의 기운을 일으켰다.
내상이 심한 탓에 혈맥이 끊어질 듯 통증이 일어났지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었다.
혹시라도 그때의 이상이 상태창 때문이 아닌 자신의 몸에 자리한 이 이질적인 기운 때문이라면.
또다시 살기에 잠식되어 미쳐 날뛰기라도 했다간 큰 소란이 일어날 터였다.
그렇기에 고통을 무릅쓴 채 운기를 강행했지만,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구나.’
단전에 남아 있는 한 줌의 청룡신공의 진기를 움직여 조심스럽게 역천의 기운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은 동면 중인 곰처럼 꼼짝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고고하게 그 자리에 존재만 할 뿐이었다.
“…후.”
주호는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떴다.
마음 같아선 조금 더 건드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그것을 자극했다가 폭주라도 한다면 자신만 손해였다.
지금 당장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몸이 어느 정도 추슬러지면 제대로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이질적인 건 그뿐이 아니군.”
주호는 천천히 제 손을 주억거렸다.
왼손은 큰 상처가 있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멀쩡한 오른손은 그의 의지를 따라 천천히 침상 옆에 붙어 있는 벽을 더듬으며 움직였다.
결이 느껴졌다.
분명 별 특별한 것이 없는 벽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자체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니, 벽뿐만이 아니었다.
덮고 있는 이불, 누워있는 침상, 그리고 방 안에 자리한 모든 것 하나하나가 보고 있지 않음에도 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며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검마와의 싸움 덕분이겠지.”
[상태창]
이름: 주호
별호: 월영사신
직업: 정천학관 일반교관
나이: 스물여섯
소속: 정천학관, 사신문
경지: 초절정(十/十)
무공: 청룡신공(八成)
상태창에는 그저 단순한 수치로 표시될 뿐이었지만, 경지와 더불어 청룡신공의 성취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아마 상처를 전부 회복한다면 절호조의 검마와 싸운다고 하더라도 절대 밀리지 않으리라.
그런 자신감이 마음속에 충만했다.
저벅-.
그때, 밖으로부터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여럿 있었다.
곧 방문이 천천히 열렸고, 남궁연을 필두로 단상현과 장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무께서도 오셨습니까.”
“제가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덕분에 사도맹의 천라지망을 돌파할 수 있었지요.”
“오랜만에 고생 좀 했네.”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직접 상대한 고수만 하더라도 삼백에 달했다.
천라지망의 규모로 보아 최소 천 이상은 더 있었을 것이니 그 삼엄한 경계를 뚫기 위해 고생을 했을 터.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뭘 그렇게 말하나. 임무 도중 일어난 것을.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것에 집중하게나.”
단상현과 장각이 자리에 앉아 남궁연이 차를 내왔다.
밤이 깊은 시각이었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몸은 좀 괜찮은가. 외상도 그렇고 내상 역시 심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일이 잘 끝났으니 조금 쉬면 괜찮아질 듯합니다.”
주호는 단전 한쪽에 자리한 역천의 기운에 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장각이나 남궁연의 이목이 걸렸기에 대충 둘러대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상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래도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말 그대로라네. 원래 있었던 소란에 더해 황제가 황명을 내려 관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였지. 무림맹도 그와 연계에서 얼마간 이곳을 이 잡듯 뒤졌어.”
“저희는 미곡창의 관리로 옛적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특별한 피해는 없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자신을 배려해 말해준 것이리라.
주호는 장각의 배려에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면에서 검마를 산서성 밖으로 유인해낸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네. 그 탓에 사도맹의 천라지망이 펼쳐졌지만.”
“…검마는 죽었습니까?”
주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쓰러뜨린 기억은 있었지만, 마치 수면 밑으로 비춘 광경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의심을 담아 묻자, 단상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이 확인되었네. 그 때문에 사도맹 쪽도 난리가 났었지. 연이어 그쪽의 고수들이 자네에게 덤벼든 것도 그 때문일 터지.”
“다행이군요.”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교와 손을 잡은 이상 검마 철무혁은 꼭 죽여야 하는 남자였다.
만일 그가 그대로 사도맹에 돌아갔다면 정말로 마교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정도 무림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으니.
‘또다시 접촉을 시도하겠지만, 이전처럼 섣불리 하지는 못하겠지.’
사도맹 측에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지 않았다.
최초 검을 맞댄 검마는 죽었을뿐더러, 그 나머지도 전부 싸늘한 주검이 되지 않았는가.
사도맹은 영락없이 마교가 검마를 죽이기 위해 파놓은 함정이었다고 생각할 터.
그러니 당장은 그 갈등이 해소되지 않으리라.
“그래서, 검마가 마교와 접촉한 이유가 무엇인가.”
단상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한 가지를 알아내기 위해 이때까지의 수고와 시간이 들었다.
그러니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정보이길 기대했고, 주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사도맹주가 중독되었다고 합니다.”
“중독……?”
“예. 천망(天網)이라는 독으로 마교에서 옛적부터 초고수들을 중독시키기 위해 개발한 것이라 했습니다.”
“허면 근 십 년간 그가 일선에 나서지 않은 것도…….”
“예. 듣자 하니 칠보추혼이나 그런 종류처럼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 오랜 시간 꾸준히 섭취하게 하여 상태를 망가뜨리는 것이라 하더군요.”
“허어…….”
장각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작금 강호 무림의 패자 중 한 명인 철혈패검(鐵血霸劍)이 중독되어 와병 중이라니.
천망이란 독의 존재 역시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굳이 검마가 나선 것과 더불어 마교란 이름의 존재감은 그 가능성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그래서 마인들은 철혈패검의 목숨을 대가로?”
“예. 마교가 중원을 침공하면 정도 무림과 공동 전선을 펼치는 척하다가 자신들의 편에 서라 했습니다.”
주호의 말이 끝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깊이 가라앉았다.
사도맹주의 와병, 천망독, 전쟁.
그 어느 것 하나가 가벼이 볼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이것들이 우리 귀까지 도달했다는 것이군.”
“본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마교에선 무림맹의 개입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이 이후에 어찌 나올지 예상하기 힘들겠군요.”
검마가 죽었으니 정보가 새어나간 것은 당연지사라 생각할 터.
그러니 기존의 계획을 폐기하거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수정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건 본문에 긴급으로 알려야겠군. 자네는 어찌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무림맹 쪽에 알리는 것이 좋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마교 측에 숨어든 혈천신교나 사흉수의 끄나풀들은 사신문의 존재도 의식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준다면 이쪽에 쏟아지는 시선을 조금이나가 덜 수 있을 터.
“맹을 이용한다면 본문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숨길 수 있겠지요. 그쪽도 지금 마교의 움직임에 촉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으니 좋은 먹잇감이 될 겁니다.”
“그러는 것이 좋겠군. 문주 쪽에는 내가 말해놓겠네. 자네는 일단 몸을 추스르는 것에 집중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주작은 무어라고 이야기했는지…….”
주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단상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자네 동생에겐 전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연락이 왔네. 몸 제대로 추스르고 약속대로 하남에서 보자는 말도 함께 말이야. 문주에게 듣자니 당장에라도 이쪽에 오려고 난리 치는 것을 백호께서 말리느라 진땀을 빼셨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주호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예향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은 그녀 나름대로 배려해준 것이리라.
동생에게까지 걱정 끼치긴 싫었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자, 일단 급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네. 더 붙잡고 있다간 제명에 죽지 못하겠군.”
“…….”
그 말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가 심각한 것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호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한바.
이제 막 깨어난 직후라 몸을 움직이는 데 많이 불편할 것이 분명했다.
밤이 깊었으니 조금 더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감히 그사이에 끼어들 수 없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물론 단상현은 처음부터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따름이었으니.
“…그렇군요. 급한 이야기는 끝났고, 밤도 깊었으니 지금은 푹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각도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왔다.둘은 이내 자리를 떠났고, 방 안에는 주호와 남궁연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저, 정리할게요.”
그녀는 손님들이 마시고 간 찻잔과 자리를 치웠다.
그러곤 다시 주호의 몸을 천천히 눕혀주었고, 이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보겠노라며 문가로 향했다.
“연아.”
“…….”
주호의 나지막한 부름에 남궁연은 어깨를 흠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껏 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던바.
그렇기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이 살짝 벌려졌지만, 왜인지 부끄러웠기에 고개를 돌리진 않은 채, 문가에 기대섰다.
“고맙구나.”
“…말로만요?”
그 대답에 주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녀에겐 미안할 따름이었다.
자신의 선택이었다곤 하나 괜히 이곳까지 동행하게 해서 고생시키지 않았나.
“내 몸이 낫고.”
그렇기에 주호는 제 진심을 담아 천천히 말을 골랐다.
“날이 좋아진다면, 이전처럼 나들이를 가자꾸나.”
“단둘이서요.”
“그래, 단둘이서.”
아이가 칭얼거리는 듯한 어조에 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지만, 교관님이 기분전환을 하고 싶으시다면.”
남궁연은 문가에 기대 고개를 절반만 돌렸다.
그러곤 기대가 잔뜩 담긴,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주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동행해드릴게요.”
“…부탁하마.”
솔직하지 못한 제자의 모습에 주호는 실소를 머금었다.
곧 남궁연은 좋은 밤 되시라며 작게 고개를 꾸벅이곤 이내 방을 떠나갔으니.
타다다닥-!
곧 멀어져 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에서 경쾌하게 울려 왔기에 주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