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주호?”
목진명은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별 특색이 없는 평범한 외자 이름이었다.
특출난 고수의 것이라면 단번에 그 별호를 떠올렸겠지만, 어렴풋한 느낌만 주는 것이 그리 알려진 이름은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어딘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 분명 근래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쉬익-.
그 찰나, 한겨울의 삭풍이 사도맹 고수들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뼈가 시릴 정도로 싸늘한 한기였다.
목진명은 본능적으로 제 검을 들어 올렸다.
정말로 무심코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목숨을 구하는 단초가 되었다.
틱-.
검날의 끝이 갈라지며 잔해가 흩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제 주변에 있던 이들의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목진명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떨었다. 그러자 갈라진 검날의 그 끝으로부터 자글자글한 균열이 퍼지며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큭……!”
하지만 그것으로도 막아내지 못했는지 목이 옅게 갈라지며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목진명은 신음을 토해냄과 동시에 제 목을 움켜쥐고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쳐라-!”
쉬시시식-!
사도맹 본단의 정예 고수 일백이 일시에 주호를 덮쳤다.
이들 모두 친맹주파의 고수로 맹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이들이었다.
‘이들이라면.’
검마와의 싸움과 그간의 추격전으로 너덜너덜해진 주호를 쓰러뜨릴 수 있으리라.
목진명은 굳게 믿었지만, 이내 그 기대를 배신당했다.
서걱-.
무색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시릴 정도의 살기가 터져 나왔다.
핏줄기가 솟구치는 것은 덤이었고, 그 주변은 이내 혈향으로 자욱해졌다.
“고작 이 정도의 이들로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주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들 사이에서 날뛰었다.
초식의 발현도 없었다.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그들을 찍어 눌렀지만, 그 누구도 감히 일 검을 받아낼 수 없었다.
“…단주님. 저건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습니다. 물러나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목진명은 제 심복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열 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그 말대로 물러나 대책을 세워야 했지만, 목진명은 고개를 저었다.
“후속부대는 칠패의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녀석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건…….”
그 역시 제 상관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미 상황은 기호지세였다.
어떻게든 감추려 했으나, 산서 쪽에서 일어난 일로 무림맹과 관이 이곳에 일어난 소란을 눈치챈 듯싶었다.
더욱이 후속으로 오는 칠패의 고수들 역시 같은 사도맹의 이름으로 묶여 있으나 아군은 아닌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착을 내야 했다.
철컥.
신검을 다잡은 주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싸늘한 겨울의 공기에 섞여든 비릿한 피 내음이 폐부를 훑는다. 그는 그것이 못내 기분이 좋아 진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좋은 날이구나.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경고]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조속히 조정할 것을 권고합니다.
[비상 프로토콜을 실시합니다.]
[자동 전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말을 내뱉던 도중 눈앞으로 또다시 상태창의 경고가 떠올랐다.
주호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그것을 밀어내려 했으나, 이번은 조금 다른 현상이 일어났다.
쿵.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동시에 머리를 망치로 크게 한 대 후려 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야는 뿌옇게 변했고, 온몸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주호는 황급히 고개를 털어내며 정신을 일깨웠다.
“…이건.”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알아차리지 못한 존재가 펼친 암수인가.
하지만 주위에는 겁에 질린 기색으로 주춤하고 있는 사도맹의 고수들밖에 자리하지 않았다.
“…….”
주호의 시선이 시야 한구석으로 밀려난 상태창의 문구들로 향했다.
[경고]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조속히 조정할 것을 권고합니다.
[비상 프로토콜을 실시합니다.]
[자동 전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이, 빌어먹을……!”
그의 어깨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도대체 무엇이 비정상적인 상태란 말인가.
“놈이 정상이 아니다!”
“몰아붙여!”
주호가 잠시 자리에 멈춰선 채 비틀거리자,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깨달은 사도맹의 고수들이 닥쳐왔다.
“……!”
상태창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던 차라 반응이 늦었다.
몇 자루의 칼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으며, 찔러진 창끝이 옆구리 끝을 꿰뚫었다.
주호는 작금의 상황에 이성을 잃었다.
“기어오르지 마라! 버러지는 버러지답게 구석에 처박혀 죽어라!”
핏빛 강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검기로는 막아낼 수 없는 농밀한 것이었다.
일류 고수들은 전부 사지 육신이 갈려 나갔고, 절정에 이른 이들 정도가 돼야 겨우 몸 성히 막아내었을 따름이었다.
[강제 개입을 시도합니다.]
[자동 전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으아아아아아-!”
상태창의 알림과 동시에 눈앞에 뜻을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떠올랐다.
주호는 절규를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사도맹의 고수들은 이제 그 기백에 질려 도주하려는 모양새였지만, 주호는 한 명도 남기지 않은 채 그들을 모두 찢어 죽였다.
“이, 이 대체…….”
목진명은 입을 덜덜 떨며 뒷걸음질쳤다.
일백에 달하는 고수가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전부 몰살당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
엉망이 된 주호는 핏발 선 눈으로 목진명을 노려보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이는 그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수급을 취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재차 떠오른 상태창의 알람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동 전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다시금 정신이 아찔해지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지만, 주호는 이내 근처에 있던 나무에 머리를 부딪쳤다.
쾅, 쾅쾅-!
“……?”
목진명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주호는 그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내 반 토막 난 가면이 그의 얼굴에서 떨어져 내렸다.
곧 피에 젖었지만, 수려한 외모가 세상에 드러난다. 그것을 바라본 목진명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검절, 검절이로구나!”
검절(劍節) 주호.
정천학관의 최연소 교관이자, 마교의 대대적인 습격이 있었던 교류 대회에서 뛰어난 전공을 보인 절정의 고수.
‘절정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구나.’
고작 절정의 경지로 검마를 쓰러뜨리고 사도맹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천라지망을 이토록 헤집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
목진명은 벼락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마는 마교와 은밀한 만남을 위해 산서로 향했다.
하지만 어째서 검절과 사투를 벌였는가.
‘검절이 마교의 소속이다?’
이 정도 고수라면 필시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으리라.
하지만 사도맹으로서도 별다른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바.
만약, 만약 마교가 정도 무림에서 명성과 신뢰를 얻으려 키워낸 고수라면.
‘비단 검절뿐만이 아니겠지.’
목진명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마교가 잠자코 있은 지도 반백 년이 훨씬 지났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중원에 풀어놓았겠는가.
비단 정파만이 아니라 사도맹에도 그러한 수작을 벌여 놓았을 수가 있었다.
‘어서 빨리 그 사실을 알려 간자를 색출해내야 한다.’
목진명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호는 제 상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은밀히 움직이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도주할 수 있을 터.
“어딜 가지?”
“……!”
하지만 몇 발자국 떼지 못했을 때, 바로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목진명은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쉬익-.
한줄기 파공성이 귓가를 스쳤다.
그는 힘껏 제 몸을 비틀었으나, 그 노력이 애석하게도 왼팔이 무참히 찢겨 허공에 날아가고 말았다.
“…크윽.”
지혈할 여유도 없이 잘려나간 왼팔을 부여잡고 자리를 박찼지만, 서늘한 감각이 등 뒤에 닿으며 그의 가슴까지 꿰뚫어 버렸다.
“커헉-!”
급소를 관통당했다.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른 목진명은 제 입에서 토해져 나온 내장 부스러기에 침중한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빌어먹을.”
심복의 말을 들어 태세를 가다듬었다면 조금이라도 결과가 달라졌을까.
그는 고개를 돌려 잘게 떨리는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주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야수와 같이 흉흉한 눈동자였다.
핏발이 잔뜩 서 있고,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은 흉포한 살기였으니.
“…네놈도 그 끝이 그리 평온하진 못하겠구나.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으마.”
목진명은 피를 흘리면서도 비릿한 미소를 지었지만, 주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그 목을 베여 숨을 거두었다.
“…….”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는다. 아직 얼어붙지 않은 시신이 꿀렁거리며 피를 뱉어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을 뿐이었다.
빠드득-.
주호는 거칠게 이를 갈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눈앞에 떠오른 빌어먹을 상태창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연신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을 따름이었다.
핏줄이 터진 눈에서 시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니, 어지간히 간담이 좋은 이라 할지라도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넌 누구지?
“닥, 쳐-!”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주호는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터지고, 이마는 또다시 금세 피로 물들었다.
-무엇에 그리도 화나 있는가.
“닥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는 거칠게 손을 뻗어 목진명의 몸에서 신검을 빼내 들었다.
그러곤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제 왼손을 바라보았으니.
푹-!
이내 신검의 끝이 제 손등을 파고들었다.
피륙이 갈라지고, 혈향이 코끝을 찌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주호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난, 주호다. 내가 주호란 말이다!”
그러자 머릿속의 목소리도, 상태창의 알람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으하하하하하-!”
주호는 광소를 터트리며 승리한 기분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말미였을 따름이었다.
[자동 전투 시스템을 종료합니다.]
“……!”
최후의 통첩을 하듯, 강렬하게 떠오른 상태창의 문구에 그의 몸이 들썩였다.
이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반향이 전신을 휩쓸었다.
항거할 수 없는 기세였다.
눈꺼풀이 감기며 의식이 멀어지는 것이, 마치 깊은 수마가 찾아오는 듯싶었다.
“…찾았……!”
“교관님!”
귓가를 스치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주호는 손끝을 움직였지만, 그것이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발악이었다.
‘다음엔 이리 물러나지 않겠다.’
최후, 그는 핏빛이 성성한 눈동자로, 제 머릿속을 향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