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목진명은 짜증 섞인 시선으로 막사 끝자락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검마의 시신이 발견된 지 사흘째.
그들은 그 흉수를 잡기 위하여 천라지망을 펼쳤으나 오히려 이쪽의 피해를 가중시키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허, 허나,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살았는지 찾을 수 없습니다. 절벽 밑을 수색해보아도 시신은 없었으니 다른 곳으로…….”
더군다나 겨우 몰아넣었다고 생각한 적을 놓쳐버리기까지 했으니.
목진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경직된 모습으로 서 있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검마께서 타계하셨다. 이건 이제 우리의 일만이 아니야. 흉수를 사로잡던지, 아니면 쳐 죽이던지 결과를 내야 사도맹의 체면이 오롯이 서는 것이다.”
목진명은 이곳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의 손을 붙잡는 부맹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검마가 사망했다는 것이 비공식적으로 확실시되자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고작 며칠 만에 초췌해진 모습을 보일 정도로 심력의 소모를 많이 한 듯 보였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마교놈들.’
목진명은 친맹주파의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검마가 산서로 간 내막이 간략하게나마 전해 들은바.
맹주의 중독과 마교의 은밀한 초대, 그건 검마로서도 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설사 함정을 파놓았다 하더라도 능히 돌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 터.
“그래서, 흉수의 정체는 파악했나?”
목진명은 흉수가 마교의 고수라 생각했다.
검마를 쓰러뜨리고 천라지망을 이리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정도라면 수라마제(修羅魔帝)나 지옥혈귀(地獄血鬼) 같은 초고수들일 터.
‘하지만 그들이라 할지라도 제 상태가 아니겠지.’
하지만 만만히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벌써 세자릿수가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지 않은가.
하지만 본단에서 정예 고수들이 투입되었으니 찾기만 한다면 쓰러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리라.
“정체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검을 사용하고, 시신에 남은 흔적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패도적인 것으로 보아 수라마제가 아닐지…….”
“흠.”
수하들 역시 같은 의견을 내놓자 그의 마음도 기울었다.
“그러면…….”
“단주님!”
목진명이 지시를 내릴 찰나, 막사 안으로 누군가 급히 뛰쳐 들어왔다.
“흉수를 발견했습니다! 위치는 북서쪽으로…….”
“가지.”
목진명은 그 말에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본단의 고수들과 직접 나설 생각이었다.
‘더는 활개 치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곧 수십의 고수가 눈 덮인 설산의 위를 달려나갔다.
***
[입신지경에 실패했습니다.]
두 눈을 뜨이자 보이는 상태창의 알람에 주호는 작게 입을 열었다.
입신지경에 실패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니,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좋았다.
그러니 겨우 자신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하하하.”
주호는 웃었다.
아니, 주호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언가는 입가를 비틀며 웃었다.
“서로를 구분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구나.”
자신이 주호였으며, 주호가 자신이었다.
이때까지는 저 수면 아래에서 관망하는 것밖에 할 수 없던 신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직접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선명했고, 손과 발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태창의 조화인지 전신의 상처는 이미 치유된 지 오래였다.
쇠한 기력은 전부 회복되었고, 단전엔 대해(大海)와 같은 내공이 가득 차 있었다.
저벅.
주호는 망설임 없이 동굴을 빠져나왔다.
가볍게 발을 놀려 절벽 위를 올랐고, 눈 덮인 산맥 위에 걸음을 내디뎠다.
“…여기다!”
그의 기척을 눈치챈 사도맹의 고수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주호의 눈에는 그들이 불나방처럼 보였다.
자신이 타 죽을 운명인지도 모른 채 달려드는 것이 그저 유쾌할 따름이었다.
[경고]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조속히 조정할 것을 권고합니다.
돌연 눈앞으로 상태창의 경고가 나타났다.
동굴에서 나온 직후부터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으로 괴상한 소리와 함께 붉은빛을 번뜩이며 계속해서 울려온 것이었다.
“성가시긴.”
주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러 그것들을 모두 밀어내 버렸다.
무엇이 비정상적인 상태란 말인가.
자신이 주호였고, 주호가 자신이었다.
변한 것은 없지 않은가.
[다수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새하얀 산맥 위로 다시금 수십, 수백의 붉은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사도맹의 정예가 도착한 듯싶었다.
철컥.
주호는 검을 다잡았다.
신검(神劍)은 그 이름을 증명하듯 수백, 수천 번이 넘는 싸움 동안 날이 상하거나 이가 나간 부분이 전무했다.
처음 그 모습을 세상에 등장시켰을 때처럼 새하얀 날을 시리게 치켜뜨고 있었으니.
하지만 그 위에서 이전과 같은 정순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제 본연에 충실한 날카로운 예기만을 뿜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
주호는 그것이 못내 즐거웠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비릿한 피 내음, 그리고 눈 덮인 산맥 위로 쌓인 수많은 시신까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거둔다는 행위만큼 전율이 이는 것은 없었다.
파바바밧-!
수십의 흑의인이 몸을 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개인의 기세는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치 한 몸인 듯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인바.
곧 주호가 발을 뗄 찰나, 주호를 포위하듯 둘러싼 흑의인들이 손을 뻗어왔다.
촤르르륵-!
눈 밑에 잠자고 있던 사슬이 솟구치며 주호의 몸을 옭아맸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아차 하는 순간 신검을 놓쳤고, 그대로 온몸이 포박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본대의 고수들이 올 때까지 유지한다. 모두 긴장의 끈을 놓지 말도록.”
가장 앞에 선 흑의인이 말하자 사슬을 당기는 힘이 더 팽팽해졌다.
“귀여운 짓거리를 하는구나.”
주호는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피식거림이었던 그것은 실소로 바뀌었고, 이내 폭소로 변해 설산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가 되었다.
“무엇이 그리 웃기지?”
흑의인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을 옭아맨 사슬들은 단단함에서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흑철(黑鐵)로 만든 것이었다.
초고수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거기의 수십 명의 내력까지 더해진바.
사실상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잡스러운 것에 집착하니 약한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도록 하여라.”
“사로잡힌 주제에 입만 살았군. 본대의 고수들과 마주하고도 그리 말할 수 있는지…….”
주호의 말에 흑의인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수하들에게 사슬을 더 옥죄라고 명령할 찰나, 그의 전신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핏빛 혈기(血氣)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쳐라-! 사슬을 벗어나게 내버려두지 마!”
쉬시시식-!
사슬을 움켜잡고 있는 흑의인들 위로 각자 병장기를 날카롭게 세운 사도맹의 고수들이 몸을 날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주호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살기에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멸천(滅天)-.”
청룡신공(靑龍神工) 멸천(滅天).
그를 중심으로 거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제일 처음 갈가리 찢겨 나간 것은 몸을 옭아매고 있던 사슬이었다.
“피, 피해!”
흑철이니 뭐니 할 것 없이 종잇장처럼 산산이 조각나버린 사슬에 흑의인은 기겁하며 외쳤다.
하지만 그 노력이 부질없게도 주호의 몸에서 뿜어진 기파는 거대한 공진을 이루며 영역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짓눌렀다.
퍽-!
주호에게 제일 가까이 도달한 고수부터 그 몸이 가죽 주머니처럼 터져버렸다.
살점이며 뼈며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오로지 남은 혈흔만이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 알려줄 뿐이었다.
쿠구구구궁-.
거대한 지진이 산맥을 휩쓸었다.
그 여파에 다른 곳에선 눈사태가 일어나는 등 연쇄적인 영향이 사방에 닥쳐왔다.
“후우…….”
대지의 민낯이 드러난 균열 가운데, 주호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깊은숨을 내쉬자 일렁거리던 혈기가 가라앉았다.
“이래도 모자람이 없는가.”
주호는 제 손을 몇 번 주억거렸다.
이전이라면 막대한 진기 소모에 적잖은 탈력감을 느꼈을 터이지만, 지금은 호수에서 물 몇 바가지를 퍼낸 정도의 소모밖에 없었다.
단 한 가지, 거슬리는 것이라면 여전히 시야 한구석에서 삑삑거리고 있던 상태창이었다.
툭.
주호는 제 앞에 박혀 있던 신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공진의 끄트머리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흑의인에게로 다가갔다.
“으으으…….”
흑의인은 제일 먼저 심상치 않은 이변을 알아챈바.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고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목숨만 부지했다.
두 다리는 공진의 끝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짓이겨졌으니, 달려서 도망치는 것도 하지 못했기에 바닥을 질질 기며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비참하구나. 약자란.”
주호는 그 추한 모습에 이죽거림을 흘렸다.
흑의인은 바로 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러곤 더 빨리 팔로 바닥을 기며 나아갔지만, 매정하게도 신검의 끝이 그 심장을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푸쉭-.
신검을 빼내자 그 끝을 진한 핏방울이 뿜어져 나왔다.
“시시하군.”
주호는 더 강한 상대를 원했다.
마침 조금 전 흑의인이 본단의 고수를 언급한바.
그렇다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쐐애애애애액-!
찰나, 귓가를 가로지르는 파공성에 주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때까지와는 사뭇 다른 강맹함이었다.
신검을 들어 그 앞을 막자, 묵직한 충격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호오.”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흘렸다.
제법 경지에 오른 고수가 발출한 강기였다.
그렇기에 고개를 들자 저 위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일단의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목진명은 침중한 낯빛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간 누적된 피해가 작지 않기에 최대한 정면 싸움을 피한 채 발목만 묶으라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주변은 이미 한차례 폭풍이 분 듯 초토화된 이후였으니.
쿵.
목진명은 힘껏 몸을 날려 주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직후 사도맹의 정예 고수들이 속속히 그 뒤를 따랐고, 이내 주호 앞에 늘어서게 되었다.
“네놈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지?”
제일 처음 든 의문은 그것이었다.
목진명은 수라마제나 지옥혈귀 같은 마도의 고수와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착의나 기세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주호는 그와 부합되는 특징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하관은 분명 노고수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이하고, 깊은 기운은 대체…….’
흰색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전체를 파악할 순 없었으나, 드러난 부분이나 손의 모습을 보았을 때 분명 젊은 청년이 분명했다.
“내 정체가 무엇이냐고?”
초절정 고수가 하나, 그 뒤에 선 나머지는 모두 절정에 이른 고수들이었다.
제법 심심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한바.
“주호, 그것이 내 이름이다.”
그렇기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신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