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29화 (129/300)

#129화

[경고]

주화입마(走火入魔)가 시작됩니다.

시작은 회음혈이었다.

본래의 정순한 청룡신공의 진기와는 다른 기운이 들끓어 올랐다.

곧 요유혈을 지나 명문혈로 올랐고 이내 지양혈까지 치솟았으니.

“……!”

주호는 제 팔이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항거할 수 없는 역천(逆天)의 기운이었다.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요동치며 전신을 휩쓸었고, 이내 역류하며 백회를 향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철무혁은 주호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하는 핏빛 기운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의 정순한 기운과는 정반대의 성질이지 않은가.

잠력을 터트린 무언가의 부작용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것이 뜻하는 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주화입마인가.”

철무혁은 지금까지 여러 부류의 주화입마를 보아왔다.

대표적인 것이 상승 경지의 깨달음 혹은 외부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가는 비암(碑庵), 그리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처럼 역천(逆天)의 기운을 발하며 제 생명을 초개와 같이 태우는 적마(赤魔)가 있었다.

“손을 쓸 필요도 없겠군.”

철무혁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기세를 거두었다.

적마(赤魔)에도 여러 단계가 있었다.

보통은 그 몸에 서린 색으로 단계를 구분하기 마련, 핏빛 혈기가 선명히 보일 정도라면 이미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끄으윽-.’

주호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상태창에게 신체의 주도권을 넘겼다곤 하지만, 그 감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단전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역천의 기운은 온몸을 갈가리 찢는 듯했다.

순식간에 전신의 모공이 열리며 무복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다행이라면 상태창 역시 제 주인의 위기를 깨달은 듯 조치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절정의 기세로 일어난 청룡신공의 기운이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역천의 기세를 억눌렀다.

근육이 찢어지고 피부가 울긋불긋 솟으며 요동친다. 안쪽에선 뼈가 뒤틀리는 고통에 핏물이 울컥 올라왔으나, 핏발선 두 눈으로 그것을 감내했다.

하지만 그 결사의 각오가 무색해질 정도로 거세게 치솟은 역천의 기운은 기어코 주호의 백회로 도달했으니.

쿠웅-.

스멀스멀 그 주위를 뒤덮어 가던 혈기(血氣)가 가라앉았다.

주호의 신형은 제자리에 우뚝 선 그대로였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생기(生氣)는 이미 지리멸렬했다.

“선 채로 죽었나.”

철무혁은 그 꼴사나운 최후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주호의 수급을 취하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을 찰나.

쉬이익-.

귓가를 스치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바람도 요란하구나. 저승으로 가기 싫어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이더냐.”

철무혁은 조소를 흘리며 왼손을 들어 올렸다.

싸움 도중 눈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을 간지럽히는바. 그렇기에 그것을 쓸어올리려 했지만, 팔꿈치 위로 그어지는 붉은 실선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툭.

곧 잘려나간 왼팔이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읍……?!”

철무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 팔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잘려나간 부분으로 핏줄기가 튀어 오르며 바닥에 쌓인 눈을 적시기 시작했다.

“대체.”

굳은 얼굴로 제 팔의 혈도를 집어 지혈한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어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던바.

설마 다른 이의 조력인가 싶어 거칠게 사방을 훑어봤지만, 쥐새끼 한 마리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꽈득-.

철무혁은 핏발 선 눈으로 검을 다잡았다.

왼팔을 잃은 것은 큰 손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마(劍魔)의 이름이 퇴색되지 않았다.

“무슨 술수를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다시금 제 패검 위로 시뻘건 강기를 피워 올렸다.

방심은 한 번으로 족했다. 그렇기에 단숨에 주호의 목을 쳐내려 했다.

“……!”

하지만 조금 전까지 자신 앞에 자리한 주호의 신형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큭!”

왼쪽 대각, 지척에 다다른 막대한 기운에 철무혁은 신음을 흘리며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신검과 패검의 충돌이었다.

비슷한 색의 강기가 부딪치고, 둘이 딛고 선 땅이 무너져 내렸으니.

“이건…….”

철무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쁜 숨을 토해냈다.

이전까지는 분명 서로 간에 분명한 격차가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맞댄 검에서 느껴지는 충격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무게가 서려 있었다.

“…허, 참. 설마 그 검둥이 개새끼들이 날 제거하려고?”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었다.

애초에 은밀한 자리이지 않았던가. 고의로 정보를 노출하지 않았더라면 꼬리가 붙을 일도 없었을 터.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녀석은 세간의 상식과는 규격을 벗어난 존재였다.

기상천외한 것들을 개발해내는 마교라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빌어 처먹을 새끼들-!”

이미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긴 철무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을 보니 이미 칠패와 손을 잡은 듯싶었다.

친맹주파인 중추인 자신을 제거해 그 일가를 실각시킨 뒤 칠패를 이용해 사도맹을 집어삼키려 하는 것일 터.

콰아아앙-!

패검에서 솟구친 수십 줄기의 강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주호는 신검을 끌어당겨 제 몸 앞에 세웠다. 몇 줄기의 강기가 그 위를 거칠게 긁고 지나갔지만, 선명하리만큼 치솟은 호신강기를 뚫어내지 못했다.

“이제 같잖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

“……!”

순식간에 그 지척으로 이른 철무혁이 패검을 힘껏 그어 내렸다.

마치 해일이 휘몰아치듯 둔중한 압력이었다.

주호는 왼손으로 검신을 받치고 그것을 받아낸바. 딛고 선 바닥이 움푹 내려앉으며 그 주위로 균열이 터져 나왔다.

“…같잖은 수법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쾅-쾅쾅-!

철무혁은 몇 번이고 패검을 내리쳤다.

검마의 이름에 걸맞은 초식도 무엇도 없는, 그저 일방적이고 단순한 공격이었다.

귀청을 찢는 폭음이 울려 퍼질 때마다 핏빛 강기의 파편이 허공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동시에 주호의 위치는 점점 낮아졌고, 종래엔 땅속에 파묻힐 정도로 밀려들어갔다.

쿨럭.

주호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피를 토해냈다.

땅속에 파묻힌 채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누적된 충격이 작지 않은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스릉-.

철무혁은 싸늘한 눈으로 그 위에 서서 검 끝을 주호의 목으로 가져갔다.

“검마의 팔 한쪽이면 염라 앞에서도 떵떵거리기 나쁘지 않겠구나. 그 밑바닥에 이 검마에게 찢어 죽임당한 이들이 많을 테니 자랑이라도 하도록 하여라.”

푹-.

패검의 끝이 땅 깊숙이 박혔다.

얼어붙은 대지 위로 찐득한 피가 퍼져 나왔지만, 철무혁의 표정은 경직되기 짝이 없었다.

“…이, 건.”

그는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검을 쥔 손을 놓았다. 그러곤 제 가슴에 난 십자(十) 형태의 자상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뒷걸음질쳤다.

“…….”

조금 전까지 흐리멍텅한 표정으로 땅에 박혀 있던 주호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시뻘건 혈기가 그 눈을 잠식하고 있는바. 그는 먼저 제 목의 끄트머리를 베고 지나간 패검을 뽑아들었고, 천천히 목을 일으켰다.

“이 무슨 살기(殺氣)인가.”

철무혁은 창백한 얼굴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 흉흉한 안광에 서린 살기는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악귀에 씐 것 같지 않은가.

아니, 고작 악귀에 불과하다면 자신이 위압감을 느낄 리 없었다.

“…….”

철무혁은 머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일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극히 일부, 특별한 체질을 타고난 고수가 주화입마에 든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형태로 발현이 되었다.

그리고 세간에선 그것을.

“…천살(天殺).”

천살성(天殺星)이라 불렀다.

쉬이익-.

날카로운 바람이 다시 한번 주위를 휩쓸었다.

전신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싸늘한 한기에 철무혁은 하나 남은 팔로 무심코 제 목을 매만졌다.

하지만 붉은 실선은 그의 이마에서부터 시작되어 턱 끝까지 그어져 내렸으니.

투둑-.

반으로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팔이 잘렸을 때와는 달리 그리 피가 많이 나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뒤로 넘어간 철무혁의 몸 주위로 핏빛이 점차 번져 나갔을 뿐이었다.

“…….”

주호는 검을 든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시진, 두 시진.

석양이 지고 완연한 어둠이 깔린 뒤에도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

내리는 눈이 점차 그 위에 쌓이기 시작한다. 어느덧 바닥에 누워있는 철무혁의 시신이 순백의 무덤에 완전히 파묻히게 되기 직전인 찰나, 한 무리의 인원이 그들의 흔적을 쫓아 이 자리에 당도했다.

“이쪽이다-!”

온몸을 흑의로 두른 사도맹의 인원들이었다.

은밀히 마교의 인원과 접선하기로 했던 검마의 소식이 끊기자 부맹주는 사람을 풀어 그를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산서성에서 큰 소란이 있었던 것을 파악했고, 그 밖으로 이어진 싸움의 흔적을 추격해 이곳까지 이른 것이었다.

파앗-!

신호탄이 하늘로 쏘아졌다.

밝은 주홍빛이 밤하늘을 가르며 제 몸을 불태웠을 때, 횃불을 든 사도맹의 고수들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이게.”

눈 더미 밑에 쌓인 시신이 입고 있는 의복이 익숙했다.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눈을 파헤쳤고, 이내 머리가 사선으로 절반이나 잘려나간 철무혁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 검마께서 돌아가셨다!”

“대지급 서신을 보내라! 부맹주께 알려야 한다!”

그들은 철무혁의 시신을 수습함과 동시에 다시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혹시라도 모를 흉수의 흔적을 찾아내려는 목적이었다.

곧 시신의 바로 옆에서 나머지 머리를 찾았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 앞쪽을 수색하던 고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큰일이로군.’

친맹주파의 중심이었던 검마가 사망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칠패 놈들이 미쳐 날뛸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엔 반란까지 일어날 수 있는 사안, 그러니 최대한 빨리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툭.

사도맹의 고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눈앞에 있는 얼어붙은 설목(雪木)의 밑부분을 발로 찼다.

“……?”

하지만 이내 발끝에 닿는 이상한 감촉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충격으로 설목을 뒤덮고 있던 눈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고, 이내 그것이 나무가 아니라 서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그는 입을 열었다.

여기 시신이 또 하나 더 있노라.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흉수 중 한 명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리려고 할 찰나, 죽은 줄 알았던 시신이 두 눈을 번쩍 떴다.

우우우웅-.

시뻘건 혈기가 그 안에 휘몰아쳤다.

“아, 아아…….”

그 위압감에 짓눌린 사도맹의 고수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목을 베여 그 머리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 그런 어정쩡한 소리만 내는 것이 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

거센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다수의 기척을 감지했습니다.]

시커먼 어둠 위로 수십, 수백 개의 붉은 점이 찍혔다.

잠시간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그 붉은 점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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