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핏-.
어깨의 살점이 갈라지며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이내 그것은 팔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듯했지만, 한겨울의 칼바람에 의해 상처째로 얼어붙고 말았다.
“흡-!”
지혈하거나 상처를 돌볼 시간 따위는 없다.
주호는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인 싸움에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흐흐.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보자꾸나!”
철무혁은 눈이 뒤집힌 지 오래였다.
그의 검 끝이 허공을 거칠게 찢을 때마다 재해와도 다름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검마의 진신절기라 알려진 파천패검의 패도적인 초식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고, 이내 사방을 초토화해버렸다.
“청룡검식-.”
주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검마 쪽이 근소하게 우위에 있는 이상 방심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 항목이었다.
이미 한 번 싸움의 초반에 기습을 당한 철무혁은 그 이후로 절대 틈을 주지 않았으니.
지금 그의 몸에 서린 상처들은 모두 주호의 온전한 실력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
물론 주호도 멀쩡하지 않았다.
사흘이 넘도록 벌어진 추격전이었다.
밤낮이 세 번 넘게 바뀌었으며, 산서성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달려오며 서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대단하구나. 무림맹에 네놈 같은 신진고수가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은 없는데.”
사흘간 쉬지 않은 채 격전을 치르던 철무혁은 처음으로 숨을 고르며 차분히 말을 건넸다.
그는 주호를 완전히 무림맹 쪽의 소속으로 생각했다.
자신과 부딪치는 기운은 정순하기 짝이 없다. 휘둘러지는 검식도 정도(正道)의 묘리를 품고 있었으니 당연한 짐작이었다.
“일 년, 아니 적어도 반년만 더 늦게 만났다면 좋은 승부가 되었겠건만.”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오는 철무혁의 모습에 주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부족하다는 것인가.”
“네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 이 싸움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야.”
철무혁은 씩 웃었다.
얼핏 보기에 불꽃처럼 제 몸을 태우며 뒤가 없이 싸우는 것 같지만, 그 나름대로 호흡을 조절했다.
‘젊어 보이는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것은 놀랍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시간이라는 세월과 함께 쌓이는 것을 내공이라 불렀다.
검마 철무혁에겐 일갑자가 넘는 시간을 살아왔다. 그것은 고작해야 이립 정도 되어 보이는 주호로선 따라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
주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철무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평범한 고수라면 그가 말한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
하지만 그는 조금 상황이 다른바. 무황의 비동에서 수많은 영약을 섭취하고 상태창의 힘으로 무황의 절기인 청룡신공을 익혔다.
‘설사 검마라 할지라도.’
무황의 위명에는 감히 비할 수 없지 않은가.
상대 쪽에서 자신을 과소평가해준다면 오히려 좋았기에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은 채 굳게 검을 쥐었다.
휘이잉-.
산맥 가운데 엄동설한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펄럭거리고 머리카락 끝이 얼어붙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기 그지없었으니.
쿵-!
지금이야말로 결착을 낼 적기라 판단한 둘은 떨어져 내리는 눈보다 더 빨리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애액-!
검이 휘두른 궤적을 따라 새하얀 눈이 갈라지며 허공으로 흩어진다. 곧 각각 적청의 색을 품은 강기들이 격렬하게 부딪치며 자웅을 가렸을 때, 그곳에서 비산 하는 편린들이 순백의 색을 물들여갔다.
“…….”
악문 주호의 입가에 피가 흘러나왔다.
누적된 내상과 더불어 피로가 극에 달한 것. 하지만 그는 그럴수록 청룡신공의 진기를 맹렬하게 돌리며 정신을 선명히 하려 애썼다.
‘그는 벽이다.’
검마 철무혁.
그는 손이 부르트도록, 내장이 울리도록 때려도 부서지지 않는 한없이 단단한 벽이었다.
그간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그 누구보다 강했으며, 마주하고 있자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검마라는 이름의 벽을 넘어선다면 자신 역시 크게 진일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하루가 더 흘렀다.
툭, 투둑.
“…….”
주호는 말없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손아귀 사이로 벌어진 상처에서부터 진득한 피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순백의 색이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 열기에 사그라지며 핏빛 점이 찍혔다.
“솔직히 여기까지 버티리라 생각하지 못했건만.”
철무혁은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기상천외한 고수는 많았다.
그 역시 강호에 나온 뒤로 몇 명이나 되는 이들을 만났던가. 하지만 주호처럼 싸움 가운데 시시각각으로 성장하는 이는 없었다.
파앗-.
철무혁은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날에 묻어 있던 피들이 그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흩뿌려졌고, 눈 위에 진득한 흔적을 만들어냈다.
“그 정도 내상으로는 더 검을 휘두르지 못하겠지.”
그는 피 냄새만큼이나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애를 쓰게 만들었지만, 결국 여기까지였다.
주호가 쓰고 있던 가면은 반쯤 부서져 나가 하관이 드러난 지 오래였고, 전신은 이제 몇 발자국 걷지 못해 보일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
주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눌어붙은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고,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확실히. 이전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쉽게도 그 한 발자국은 아직 자신에겐 허락되지 않은 듯싶었다.
내공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신체 쪽이 한계였다.
파천패검의 패도적인 초식들을 받아내느라 그 충격이 계속해서 누적되었고, 이제는 검을 들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스릉-.
그와 반대로 철무혁의 검에 서린 빛은 아직 선명하기만 했다.
그 역시 타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호보다는 비교적 양호한 축에 속했다.
“검을 들어라. 시작이 창대했으면 그 끝 역시 빛나야 하는 법.”
철무혁은 이 싸움의 끝을 고했다.
주호가 살아남는다면 이전에 결심했던 대로 사지를 자른 뒤 개 목줄을 걸고 사도맹까지 돌아갈 것이었다.
만일 죽는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없었다. 이 정도의 고수가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없었으니 머리만 잘라가면 배후를 캐내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 아쉽게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가 싶군.”
“……!”
의미심장한 주호의 말에 철무혁은 두 눈을 크게 뜨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모든 것이 검마(劍魔)를 잡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었다.
지금까진 그것을 배제한 채 싸웠으나, 서로 기력이 쇠한 지금이라면 마땅히 경계해야 할 만한 요소였다.
하지만 기감으로 주변을 훑어도 쥐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요 며칠 그와 싸우며 산서성에서 한참을 벗어나 내달렸으니 추격대가 붙기도 어려울 터.
더군다나 한파(寒波)가 계속되고 있다. 쏟아지는 눈이 이곳으로 이어지는 흔적을 가려줄 테니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같잖은 수작을.”
주호가 자신을 농락한 것이리라 생각한 철무혁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기에 다시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천천히 그에게 걸어간바. 담담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주호는 이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이것에 의지하긴 싫지만…….”
[자동 전투 시스템 가동]
이전 궁기와의 싸움에서 발휘되었던 상태창의 기능이었다.
자신의 몸은 의지를 벗어났고, 마치 누군가가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정교함과 매서움이었다.
버릴 것은 버리되 취할 것은 마땅히 취했다.
그 흐름에 한 가닥 비효율이 없었고, 단 하나의 쓸모없음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호는 궁기와의 싸움 이후에도 간간이 이 기능을 사용했고, 익숙해지려 애썼다.
어찌 되었든 위급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 큰 무기가 되어줄 것이 분명해 보인바.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무기질적인 움직임은 익숙해지지 않았기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을 제외하면 쓰지 않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었다.
꽈아악-.
신체의 주도권을 넘기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전신의 근육이 꽉 조여졌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하던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출혈이 멎고, 손상된 조직이 다른 것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현상이 몸에 일어났으니, 몸의 주인으로서는 그것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
천천히 주호를 향해 걸어가던 철무혁은 발을 멈췄다.
갑작스레 그에게서 느껴지던 기세가 일변했다.
‘잠력이라도 터트린 것인가.’
철무혁은 가늘어진 눈으로 검을 끌어당겼다.
이 정도의 고수가 마음먹은 필사(必死)의 각오가 무겁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인바. 몇 수 정도만 적당히 흘려 넘기면 제풀에 지쳐 자멸할 것이 자명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
철무혁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을 찰나, 그는 고개를 든 주호의 눈으로 시퍼런 광망이 서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때는 노을이 지며 사방에 땅거미가 서리기 시작한 시각. 하얀 눈 위로 짙은 음영이 지며 그 색을 바래게 했다.
그 시퍼런 광망은, 이내 음영 가운데로 길게 이어지며 사라져 버렸으니.
“……!”
순식간에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난 주호의 움직임에 철무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캉-!
거친 소음에 사방에 울려 퍼졌다.
철무혁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검을 맞댄 주호를 바라보았다.
“정말 잠력이라도 폭발시킨 것이더냐.”
그그그극-.
맞댄 검을 통해 느껴지는 힘이 적지 않다.
오히려 이쪽이 밀릴 정도였으니 정말로 무슨 술수를 벌인 것이 아닌지 유력한 의심이 들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철무혁은 거칠게 검을 뿌리치며 다시금 제 기운을 부풀렸다.
파천패검의 초식들이 다시금 주위를 휩쓸며 주호의 사지를 찢어버릴 듯 그에게 닥쳐갔다.
파아아앗-!
검이 밀쳐지는 틈을 타 뒤로 물러난 주호 역시 제 검을 들어 올렸다.
곧 그 끝이 날카롭게 세워졌고, 그의 전신에서도 시퍼런 청룡기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청룡검식(靑龍劍式)
만검(萬劍), 경계의 검
내력의 소모가 컸기에 결정적일 때에 사용하고자 아껴두었던 절초였다.
시스템은 만검을 펼칠 적기가 지금이라고 판단한바.
스스스스-!
철무혁은 그 영역에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이때껏 느끼지 못했던 날카로운 예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들었다.
쿵-.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철무혁은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을 막아내었지만, 영역 안쪽으로 내디뎠던 발이 도로 한 발자국 물러나게 되었다.
“…감히.”
철무혁은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껏 몇 번이고 밀고 나간 적은 있어도 밀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방금은 달랐다.
정면에서의 충돌이었지만, 분명 자신이 밀려 나갔다.
“무슨 술수를 벌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넘실거리는 강기가 그의 패검 위로 다시금 피어올랐다.
강한 저항은 보다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 그렇게 철무혁이 진득한 살기를 풍겨낼 찰나.
“…….”
주호의 두 눈은 당혹스러움에 잠겼다.
상태창의 기능을 활성화한 것까지는 좋았다.
밀리던 싸움을 단숨에 역전시키진 못했지만,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만검의 초식으로 승기를 굳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의 눈앞으로 상태창의 경고가 떠올랐으니.
[경고]
체내에서 비정상적인 흐름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속한 수정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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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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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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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주화입마(走火入魔)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