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주호가 훌쩍 몸을 날리자 조금 전까지 서 있던 곳 위에 막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후두둑-.
사방으로 튀어 올랐던 잔해들이 비가 오는 것처럼 쏟아져 내린다. 객잔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불길한 소음을 내뿜었고, 휑하니 뚫린 천장의 구멍 사이로 한 인영이 솟구쳐 올랐다.
“쥐새끼답게 재빠르구나.”
주호를 바라보는 철무혁의 두 눈은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안에서 농밀한 살기가 흘러넘치는 것을 보니 단숨에 찢어 죽이려는 심산인 듯했다.
“…….”
주호 역시 고개를 들어 검마 철무혁을 바라보았다.
그 자신은 월영사신으로 활동할 때 쓰던 가면을 착용하고 있기에 이쪽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던바.
하지만 그와 반대로 주호는 철무혁의 정보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상태창]
이름: 철무혁
별호: 검마(劍魔)
직업: 사도맹 태상호법
나이: 예순셋
소속: 사도맹
무공: 파천패검, 수라쇄혼권
경지: 초절정(十/十)
호감도: 下下
‘나보다 한 수위의 고수.’
딱 예상한 대로의 차이였다.
쿠우우웅-.
철무혁이 한 발자국 내딛자, 이제껏 상대해왔던 그 누구보다 패도적인 기세가 느껴졌다.
서로 목숨을 걸고 생사결을 벌였던 청혈도제조차 이 정도 위압감은 주지 못했던바.
마치 한 마리의 야수를 눈앞에 두듯 흉포한 기운이었다.
‘단지 마주 서고 있는 것뿐인데 이 정도 여파라니.’
그러던 차, 주호의 시선이 객잔 안으로 향했다.
그 안에서 철무혁과 대화를 나누던 마인들은 어느덧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상태창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한 탓에 그러지 못했다.
“…….”
그 제일 앞, 자신을 혼돈이라 소개했던 마인이 잠시간 멈춰 선 채 고개를 들었다.
곧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주호는 혼돈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호를 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혼돈.’
사흉수의 수좌로 청룡의 대척점에 이르는 위치였다.
그는 자신을 마교의 마인으로 소개했던바. 하지만 혼돈이라는 이름을 대며 나온 이상, 사흉수와의 연결점을 유력하게 의심해보아야 했다.
“가지.”
혼돈을 비롯한 그들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검마를 상대하는 것보다 그들의 뒤를 쫓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 부디 장각 쪽에서 잘 따라붙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휘릭-.
가볍게 자신의 검을 한 바퀴 돌린 철무혁은 천천히 주호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가를 비틀었다.
“무림맹에서 왔는지 아니면 칠패의 끄나풀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커먼 눈동자에 선명한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것은 이내 거친 살기가 되어 주호를 향했다.
“성히 살아갈 생각은 하지 말도록.”
파아아아앗-!
눈부신 빛이 깊은 밤의 어둠을 갈랐다.
주변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강맹한 공격이었다.
“…쯧.”
피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던바.
섣불리 움직였다간 틈을 노출할 수 있기에 신검을 앞으로 내밀어 왼손으로 검신을 받쳤다.
어느 정도 피해는 감수하려 했던 것이었지만, 전신에 부딪혀 오는 충격인 생각이었다.
콰아아아앙-!
그대로 쭉 밀려 나가 뒤에 있던 건물 몇 개를 부수며 나가떨어졌고, 이내 그 잔해더미 사이에 파묻히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지진이라도 난 것인가!”
주변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건물 몇 채가 단숨에 부서질 정도의 여파가 있었던 직후다. 곳곳에 불이 붙어 어둠을 환하게 밝혔고, 이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소문대로군.”
주호는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잔해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마(劍魔)의 걸걸한 성정은 여러모로 유명한바. 자신과 적대한 이는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켜 버렸기에 마(魔)라는 별호가 붙은 것이었다.
우우우웅-!
철무혁은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지 제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강기가 넘실거리며 그 위로 휘몰아쳤고, 이내 주호를 향해 해일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흡-!”
주호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일방적으로 당해줄 이유는 없기에 그 역시 시퍼런 강기를 피워 올리며 철무혁의 공격에 대응했다.
파아앗-!
다시금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그 주위를 뒤덮었다.
사람들 그 심상치 않은 기류에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먼저 거대한 기운이 그 주위를 휩쓸었다.
쿠구구구궁-!
땅이 뒤흔들릴 정도로 강한 여파였다.
주호와 철무혁의 충돌은 휘말린 영역 위에 아무런 잔해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
어림잡아 수십의 인원이 방금 공방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아무리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주호였기에, 주호는 이를 악문 채 검을 들었다.
‘주변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민간 백성의 학살을 자행하면 관에서 개입하는 빌미를 만들어주는 꼴이 되었다.
더욱이 검마 정도 되는 고수라면 황실에서 예의주시하며 여차할 때는 직접 나설 터.
그렇게 된다면 그가 속한 사도맹은 곤란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행보였다.
타닷-!
주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상대가 인지를 벗어난 존재이니 정공법으로 상대하는 것은 좋지 않은 판단이었다.
“어딜 가느냐!”
철무혁은 금세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눈부신 빛이 번뜩였고, 몇 채의 건물이 무너지거나 수십, 수백의 사람이 그 여파에 휘말렸다.
타다닷-!
주호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당장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대로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 싸울 생각이었다.
“일단은 그 다리부터 잘라버려야겠구나!”
파아아아앗-!
성벽에 다다랐을 때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철무혁의 검에 서렸다.
곧 개벽의 역사를 구현하듯 어둠을 베어 가른 검이 주호에게로 닥쳐왔다.
쉬시식-!
극성에 이른 운룡보가 기이한 움직임을 밟으며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해내었다.
그러자 주호를 지나친 철무혁의 공격은 이내 도시를 뒤덮고 있던 두꺼운 성벽을 가격했다.
콰아아아아앙-!
마치 강력한 벽력탄이라도 터진 듯한 광음이었다. 성벽의 한쪽이 우르르 무너지며 그 위도 삽시간에 난리가 났다.
“도망치는 것도 이제 끝인가.”
주호가 자리에 멈춰서자 철무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간 짜증이 많이 쌓였던바. 눈앞의 쥐새끼를 찢어 죽임으로써 그 화를 풀어낼 생각이었다.
“민간 백성에 이어 관군까지 공격하다니 뒷감당하기가 힘들 텐데.”
“내가 그따위 것을 신경 쓸 것 같더냐.”
철무혁은 피식 웃으며 검 끝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목격자가 있으면 전부 죽이고 유유히 떠나면 될 따름이다.
그는 제 검을 들어 올려 주호에게 그 끝을 겨눴다.
마치 지금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자신의 목숨밖에 없으리라는 그 모습에 주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저 관망만 하려 했거늘.”
“네 명운을 탓해라. 그저 오늘이 끝이었을 따름이다.”
“글쎄.”
주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벽에서 인기척이 분주하게 느껴지는바. 아니, 도시 전체가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린다면 관에서 포졸들이 나오겠으나, 그러면 의미 없는 인명 피해는 늘어날 따름이었다.
“…….”
주호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기운을 가다듬었다.
전날 저녁, 최악의 경우 철무혁과 싸우게 되었을 때의 상황까지 상정한 바가 있었다.
성내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당연히 큰 피해가 일어날 것이 자명한바.
그러니 성 밖으로 그를 끌어내어 결판을 볼 생각이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군. 신진 고수 중 감히 검을 버틸 수 있을 이는 드물 텐데 말이야.”
철무혁은 주호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다.
혼돈과의 대화 말미까지 그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 가까이 접근을 허용할 정도면 제법 상당한 고수의 경지라고 짐작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그 목소리로 유추해보아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교와 손잡은 추레한 늙은이 따위가 무엇이 대수라고.”
“…빌어먹을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내뱉는구나.”
“그렇지 않나? 마교가 쳐들어온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꼬리를 내리는 개와 다를 바 무엇이지?”
그 말에 철무혁은 피식 웃었다.
“같잖은 격장지계 따위. 그리 도발하지 않아도 네 친히 네 사지를 찢어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
파아아앗-!
주호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습적인 일격을 가했다.
철무혁은 같잖다는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끼며 검을 들었지만, 자신의 지척까지 닥쳐온 살벌한 검 끝에 두 눈을 부릅떴다.
핏-!
지금까지 권태롭던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힘껏 고개를 뒤틀었다.
하지만 그 여파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내 그 뺨 위로 기다란 실선이 그어졌다.
“…….”
철무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뺨을 훑었다. 그러자 상처에서부터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그 손바닥에 묻어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실력을 숨겼다? 이 철무혁을 상대로?”
툭.
주호는 가볍게 검을 털어내며 그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궁지에 몰렸던 듯한 그 태도를 버리곤 가면 뒤쪽에서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왜 그리 덜떨어진 표정을 짓는 것이지? 지금껏 궁지에 몰았다고 생각했나?”
“허허…….”
철무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피인가.
아니, 그 이전에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시커먼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기억하는가. 올해 초에 사도맹과 마교가 너무 설치는 것 같아 안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는 지부 수십 개가 박살 난 것을.”
“…뭐?”
“그 정도 했으면 정신을 차렸으리라 생각했는데, 조금 모자랐나 싶군.”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철무혁은 의문성을 토해낸다. 그러곤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열었다.
“설마, 네놈이 월영사신이라고.”
뿌득.
철무혁의 이가 갈렸다.
주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사도맹 지부를 박살 내며 활개를 치던 월영사신이라는 잡것 때문에 큰 피해를 보지 않았던가.
그 자신이 직접 처리하려 안휘까지 내려갔으나, 그와 동시에 잠적해버리고 말아 허탕을 친 적이 있었다.
콰아아앙-!
철무혁은 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스스로 월영사신이라 칭하는 눈앞의 녀석을 쓰러뜨린 뒤 사지를 잘라 그 목에 줄을 매어 사도맹까지 개처럼 끌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
자신을 금방이라도 쳐죽일 듯 닥쳐오는 철무혁의 모습에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월영사신이라는 비밀을 밝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도발하고자 했다.
다행히 그것은 효과적으로 먹힌 것인지 철무혁은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이와 같은 경지에 오른 고수라면 어지간해서는 먹히지 않을 수법이었지만, 그 명성이 자자한 검마(劍魔)라면 어렵지 않게 꿰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타다닷-!
주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부서진 성벽을 타 넘었다.
곧 철무혁 역시 그 뒤를 쫓았고, 기나긴 추격전의 서막을 알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