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검마(劍魔) 철무혁.
야심한 시각 가운데 그는 홀로 객잔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그의 친형인 사도맹주는 근 십 년간 모종의 이유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폐관 수련이니 천마와의 일전에서 내상을 입어 요양 중이라니 여러 이야기가 많은바.
실상은 중독(中毒)이었다.
철무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입신지경에 도달한 고수를 중독시킬 수 있는 독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설령 그 지독하다는 무형지독을 꿀꺽 삼키더라도 숨 쉬는 것처럼 간단하게 태워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형님이었다.
그런 사람이 피폐해진 몰골로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
이미 깊어진 밤.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도맹주 정도 되는 이를 중독시키려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중독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입신지경의 고수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일이었으니 아주 조금, 그러면서도 오랜 기간 꾸준하게 독을 먹여왔을 터.
철무혁은 제일 먼저 형님의 식사를 관리하는 이들을 찢어 죽였다.
아니, 찢어 죽인 것으로 모자라 그들의 소속과 삼족을 몰살시켰고, 조금이라도 연관된 이들은 전부 잡아 족쳤다.
그러곤 손에 묻은 피 냄새로 겨우 화를 삭이며 그 원흉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을 기다렸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세력은 강호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분명 무언가를 요구하며 접촉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십 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나서면 맹주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약재와 영약을 퍼부어 제 형님의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우습게도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맹주의 부재에 따라 사도맹이 사오분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애초에 사도맹은 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모인 조직이었다.
근간이 되는 이념이 그런 것이었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사도맹 자체의 존재를 위협한다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가증스러운 새끼들.’
사도칠패(邪道七霸).
근래 들어 갑작스럽게 세력을 부풀린 사도맹 내의 일곱 개의 문파를 뜻했다.
그들은 마치 맹주가 중독된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마음대로 설치며 세력을 부풀려 나갔다.
철무혁이 그들을 가증스러워하는 것은 의리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들이 그렇게 활개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다 사도맹이란 조직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지만 저렇게 분열을 자초한다면 사도맹은 얼마 가지 못해 정말로 그 기능을 잃어버릴 터.
당장 눈앞에 이득에 눈이 멀어 스스로 구렁텅이로 걸어가고 있는 그 꼴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후.”
지금 그가 이 자리에 온 이유 역시 현재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 은밀한 회선을 통해 마교로부터 연락이 온바. 그들은 철무혁을 직접 지명해 만남을 청해왔다.
평소라면 더러운 검둥이들과는 엮이고 싶지 않다며 일축했을 터.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가 없었다.
단순히 찔러보기인지 아니면 정말로 중독의 흉수인지 모르겠으나, 마교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었다.
‘형님은 내게 전권을 맡기셨다.’
철무혁은 흉흉한 눈빛을 품었다.
자신이 직접 이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 밑지고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철혈패검(鐵血霸劍) 철무악.
사도맹주이자 자신의 형님은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전신이 피폐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그 걸걸한 성정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
-마교가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네 자존심을 짓밟는 언사를 내뱉는다면 망설이지 말고 쳐 죽여라.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도맹은 마교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사도칠패의 반발이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자신들을 따르는 이들만 데리고 중원에 있는 마인이란 족속을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끼이익-.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인원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
그들의 모습을 본 철무혁의 한쪽 눈이 움찔거렸다.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입구에서부터 농밀한 마기가 그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풍겨 왔다.
“위명이 자자하신 검마(劍魔)를 뵙게 돼서 반갑소.”
“철무혁이오.”
가볍게 포권을 올리며 인사를 해오는 마인의 모습에 철무혁은 앉은 그대로 고개를 까딱였다.
무림의 예의로는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검마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검을 뽑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
마인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 앞에 앉았다. 수하로 보이는 그 둘은 그대로 입구에 서서 자리를 지켰다.
“…그쪽의 소개는 하지 않으시는가.”
철무혁은 질문을 던지면서도 마인의 기세를 가늠했다.
외모로 보자면 많이 쳐줘야 이립 정도가 되어 보였지만,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적어도 자신의 동년배 정도는 되어야 보일 수 있는 깊이지 않은가.
‘외모는 이립, 속은 진갑(進甲) 정도라.’
머릿속으로 여러 고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쉽게도 정확히 들어맞는 이가 없어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소개라. 아쉽게도 이름은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일각에선 혼돈(混沌)이라 불리고 있지요.”
“혼돈이라.”
철무혁은 피식 웃었다.
무림인들이 거창한 별호를 좋아한다지만, 너무 생뚱맞은 이름이 아닌가.
그 초연해 보이는 인상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기에 그저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를 보자고 청한 이유가 무엇이오.”
“사도 맹주께선 정정하십니까?”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철무혁은 두 눈을 치켜뜨며 혼돈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한다면 당장에라도 출수하겠다는 기세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이야기가 빨라서 다행입니다.”
혼돈은 옅게 미소를 짓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천망(天網)이라는 독입니다. 신교에서 오랫동안 개발한 것으로 육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설령 입신지경에 든 고수라 할지라도 중독시킬 수 있지요.”
“…….”
철무혁은 입을 닫았다.
마교의 저력은 그 무력에만 있지 않았다. 사도맹과 달리 역사가 깊은 그들이었기에 저런 대계(大計)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사도맹주를 중독시켰으니 무림맹주까지 손대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네놈들은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것…….”
“맞습니다. 신교는 성전(聖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철무혁의 입이 벌어졌다.
그 말은 아무리 검마(劍魔)라 할지라도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었다.
말이 성전이지 결국엔 중원의 영역을 침범하는 전쟁이었다.
‘허세를 떠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칠십여 년 전.
철무혁이 태어나기 십 년 전쯤 정사연합과 마교의 전쟁이 있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더 많은 이가 다쳤다.
그가 청년이 될 무렵이 되어서야 무림대전의 피해가 모두 복구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 않은가.
“칠십 년 전의 비극을 반복할 셈인가.”
“신교는 이미 준비를 끝냈습니다. 나머지는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내게 말을 해주는 것의 저의(底意)는?”
철무혁은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사실 돌아가는 흐름을 보자면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누구나 느꼈을 터.
하지만 전쟁이란 이름은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았는가.
마교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극비에 달하는 정보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는다는 것은 자신을 이 자리에서 제거할 생각이거나 이미 습격을 시작했다는 소리가 되었다.
“…….”
혼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미소를 짓는 것으로 철무혁의 불안감에 기름을 끼얹었다.
“설마 손을 잡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적의를 읽을 수 없었던 철무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것이 정답이었는지 혼돈은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실 공식적으로 의견을 표명해준다면 좋겠지만, 사도맹도 나름의 입장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철무혁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마교는 여러 번 전쟁을 일으키며 중원을 침공했지만, 단 한 번도 완벽하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끝끝내 중원 무림이 승리를 거머쥐었고, 마교는 항상 퇴로에 올라 대천산으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당장 사도맹으로 돌아가 마교의 편에 서겠다고 하면 크나큰 반발이 있을 터.
무림맹과 척지는 것도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중 첩자 질을 하라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신교가 출정하게 된다면 필히 정사 연합군이 결성되겠지요. 그렇다 한들 이번엔 절대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혼돈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철무혁은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로구나.’
형님이 했던 말처럼 수작을 부려온다면 가차 없이 그 목을 베어낼 생각이었지만, 전쟁이라는 주제는 그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여기서 거절하게 되면 필시 그 반동이 있을 터.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죽고 사도맹이 와해 될 수도 있었다.
“…그 대가는 천망이란 독의 해독제인가.”
“그리고 사도맹의 존속과 중원의 양분이지요.”
양분이라는 말에 철무혁은 코웃음을 쳤다.
마교 무리가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모르지 않는바.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로 쓰인 사도맹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것이 분명했다.
“약조하겠다. 때가 되면 이쪽에서 움직이지. 그러니 해독제를…….”
“그런 말을 믿을 정도로 신교가 물러 보입니까.”
날 선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뒤바뀐 혼돈의 분위기에 철무혁 역시 가늘어진 눈동자로 대응했다.
“맹의 결집력이 약화하였다. 그 중심을 잡기 위해선 맹주의 존재가 필수적이야. 그러니 마교의 계획에 동조하기 위해선 형님이 움직이셔야 한다.”
“그렇다고 덥석 놓아준다면 애써 잡은 인질을 놓치게 되는 꼴이겠지요.”
인질이란 소리에 철무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혼돈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으나, 출수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대신하겠다. 검마(劍魔) 정도의 이름이라면 조금 모자라나마 사도맹주를 대신하기엔 충분하겠지.”
“흠.”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지 혼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해보겠습니다. 신교 내에서 상의를 해본 다음 다시 연락을 드리죠.”
“…빠른 연락을 기대하겠다.”
침중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철무혁의 모습에 혼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쥐새끼의 처리는 맡겨도 되겠습니까.”
“그쪽에서 하지 않으면 내 직접 하려 했다. 걱정하지 말도록.”
“……!”
그 말에 객잔 지붕의 위에서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던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막대한 기운이 밑에서부터 솟구쳤고, 이내 객잔 자체를 무너뜨리며 그가 있는 자리까지 닥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