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산동의 겨울은 예년보다 조금 이르게 찾아왔다.
온 천지가 한 점 티 없는 순백으로 뒤덮였고, 간헐적으로 이는 칼바람은 앙상한 가지들을 괴롭혔다.
“거기, 잘 동여매세! 작년처럼 폭삭 주저앉게 하지 말고!”
주가장의 사람들 역시 한창 활발히 움직이며 다가오는 혹풍의 계절을 맞이했다.
겨울을 날 준비는 이미 옛적에 끝내놓았지만, 예정보다 더 일찍 눈이 내린 탓에 다들 분주한 기색이었다.
“이제 슬슬 떠나야겠네. 겨울이 더 깊어지면 움직이기 힘들어질 테니.”
악비산이 백호의 계승자 후보로 인정받은 사흘째의 아침, 양인철은 사신문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왔다.
요 사흘간 악비산은 솜이 물을 머금듯 양인철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백원결은 반나절 만에 모두 깨우쳤고, 이화창의 초식 역시 하루 만에 외워버렸다.
아직 의념을 담아내는 경지까지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대련 중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럴듯한 형태가 완성되었다.
양인철이 주가장에 오기 전까지 칩거하던 천우희 역시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홀로 폐관 수련을 하다시피 밤낮 가리지 않고 도를 휘둘렀고, 간간이 주호와 양인철을 찾아와 무학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 눈빛이 한층 더 맑아진 것을 보니 제 나름대로 길을 찾은 듯했다.
문제는 주호 쪽에 있었다.
“산서는 일 때문에 가는 것이다.”
“저는 관광을 목적으로 가려고요.”
주호는 사신문의 일로 산서에 가야 하는바. 그렇기에 준비를 하던 찰나, 남궁연이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동행은 힘들다고 했다.”
“따로 가는 것이니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굳이 저를 신경 써주실 필요도 없고요.”
기가 찰 정도로 뻔뻔한 그 모습에 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그녀 말대로 관광하러 가는 것이었으면 모르겠으나, 마교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닌가.
한동안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천우희는 이내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동생 정도면 걸림돌은 되지 않을 테니 괜찮지 않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주호는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며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이번 일은 아마 은밀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컸다.
동태를 조사하는 것이니 가급적 충돌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 사신문의 의견인바. 그렇기에 홀로 조용히 갔다 올 생각이었다.
“아쉽네요.”
남궁연의 뒤에 있던 주예향도 처음엔 슬쩍 같이 가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하지만 주호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며 발작을 일으켰다.
마교와 관련된 일에 동생을 휘말리게 할 수 없지 않은가.
“수련에 매진하기에도 빠듯한 일정이다. 그러니 네게는 내가 자리를 비울 동안 향이의 수련을 맡기고 싶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남궁연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충 이야기가 일단락되던 찰나, 천우희가 새로운 불씨를 지폈다.
“그러면 차라리 향이를 내가 데리고 갈게.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수련의 맥이 끊기는 것도 그러니 입관 시험이 있기 전까지 내가 가르치지 뭐.”
“그건…….”
“두 달 뒤쯤에 하남에서 만나면 되려나? 그러면 입관 시험의 날짜보다 보름이 조금 안 되는 날일 테니.”
천우희가 굳이 주예향을 맡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제 동생의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주예향의 성장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아직 낮은 경지라곤 하나 요 며칠 사이 삼류의 四였던 경지가 지금은 七에 올라 있을 정도로 폭이 가팔랐다.
정천 학관의 신입 관생 평균이 이류의 완숙 정도로 평가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성장세가 계속되었을 때 주예향이 입관 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은 제법 유력해졌다.
“…그게 가장 낫겠구나.”
주호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동생에게 절대로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니.
결정이 내려진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처리되었다.
천우희는 이미 주한진과 적가혜의 신임을 크게 얻은바. 그렇기에 흔쾌히 허락을 맡았고, 하루 만에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 나중에 뵈어요!”
주예향의 인사를 끝으로 넷이 탄 마차가 주가장을 떠났다.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동생이 탄 마차를 바라보고 있던 주산은 제 어깨에 올라온 손에 고개를 돌렸다.
“학관에 돌아가기 전에 다시 들리마. 그때까지 건강하거라.”
“형님도 몸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남궁 소저께는 형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확실히 부탁받았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호의 옆에 있던 남궁연은 살포시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큼. 날씨도 추운데 따뜻하게 가라고 적잖게 넣었다. 남궁 소저도 잘 챙기도록 하고.”
“아버지.”
슬쩍 전낭을 내밀어오는 주한진의 모습에 주호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교관의 월봉이 적은 금액은 아니었기에 그리 돈이 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도 주려던 것은 거절했으나, 구태여 다시 챙겨주려 하는 것이었다.
“혈사문의 일을 정리하고 남은 것이 꽤 있단다. 다른 이들을 도우려고 남겨둔 것인데, 그중 일부를 네 수고비로 빼놓은 것이니 부담 갖지 말렴.”
어머니인 적가혜까지 그렇게 말해오는데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받아들인 전낭 안에 수북이 쌓인 전표를 본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도 문파가 민생의 고혈을 빨아 마련한 돈을 사사롭게 쓸 분들이 아니었다.
필시 자신들의 사재로 채워 넣으신 것이리라.
“그러면 저희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호와 남궁연을 실은 마차 역시 미끄러지듯 주가장을 벗어났다.
원래 산서까지는 마차로 길어야 닷새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 눈에 내리는바. 한가득 쌓여 길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으나, 하루 이틀 정도는 지연될 듯해 보였다.
“풍경이 예쁘네요.”
남궁연은 기분이 좋은 듯했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문을 통해 휙휙 바뀌는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들뜬 모습을 보여왔다.
“이미 알겠지만 나는 놀러 가는 것이 아니다.”
“알아요. 사신문의 일로 가시는 거잖아요? 저는 교관님을 도와드리면 도와드렸지, 방해할 생각은 없어요.”
그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 역시 사신문에 대해서 아는바. 이왕 이렇게 된 것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향이의 성취를 보셨나요? 천 언니가 조금만 더 다듬어주면 정말로 내년에 입관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보았다.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겠지.”
“…살짝 입김을 넣어볼까요? 교관님이 직접 움직이시면 모양새가 조금 그러니, 제 쪽에서 세가의 이름으로.”
“괜찮다. 향이는 그런 걸 바라지 않을 테니.”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주씨 가문의 고집은 특별하다.
설사 합격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래도 합격점에서 근소하게 차이가 난다면, 움직이는 것을 고려해볼 법했다. 지금의 자신에겐 그럴 힘이 있으니까.
“…가끔 보면 향이도 교관님이랑 비슷하더군요. 평소엔 시원시원한 태도를 보이다가, 어느 하나에는 이상할 정도로 어설프기 짝이 없으니.”
“내가 어설프다?”
“네. 주로 여성 관계에 대해서요.”
“…….”
그 말에 주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예로부터 숱한 여성의 관심을 받아왔던바. 그중 행동이 어설프다고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
굼벵이 앞에서 주름을 잡다니.
그저 우스울 뿐인 주호였다.
***
산서까지의 여정은 날씨의 여파로 예정했던 것보다 하루 더 늦어지게 되었다.
그간 상황이 급변했으면 어쩌려나 싶었지만, 다행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은바. 그렇기에 주호는 곧바로 지부를 향했다.
산서성 사신문의 지부는 미곡창(米穀倉)이었다.
‘업종을 잘 선택했군.’
미곡창인 만큼 휘하에 인원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도 별반 부자연스러운 것이 없었다.
더욱이 사람의 왕래가 잦아 정보의 파악이 용이했고, 자연스럽게 주위에 녹아들 수 있었으니 안성맞춤인 환경이었다.
“청룡을 뵙습니다. 장학이라 합니다.”
장학은 평범한 상인처럼 생겼지만, 절정의 경지에 있는 고수로 이곳 산서 지부를 책임지는 지부장이었다.
“일반적인 사안이라면 저희 쪽에서 처리했을 터지만, 아무래도 시류가 심상치 않다 보니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교나 사도맹의 인원이 강호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이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다음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지만, 어지간한 흉악 범죄자가 아닌 이상 조용히 넘어가는 추세였으니.
하지만 이번 사안은 그리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들었습니다. 검마(劍魔)가 와있다는 것을.”
검마(劍魔) 철무혁.
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전에 활동했던 사파의 노고수였다.
알려진 경지는 초절정에 달했다고 했으며,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사도맹이 발전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마교 쪽과 접촉한 적은 있습니까?”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감시를 뿌려두긴 했으나, 아무래도 초고수의 이목을 피하긴 힘든지라.”
“흠.”
“일단 계속 상황을 주시하겠습니다. 변화가 있다면 말씀드리지요.”
“부탁드립니다.”
장학이 떠나간 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남궁연이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검마 철무혁인가요. 사도맹의 소속이었던 고수가 어째서 마교와 접촉을. 설마, 말년에 입교라도 하려는 걸까요?”
“검마 정도 되는 고수라면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그리 움직이는 걸 테지.”
주호는 장각이 건네준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검마 철무혁에 관한 신상과 그 행적에 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었다.
“검마는 전대 사도맹주의 동생이다. 어쩌면 사도맹의 사자(使者)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겠군.”
“검마가 사자로요?”
남궁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문을 표했다.
고작 그런 일로 검마가 움직이기엔 이름값이 높지 않은가.
그 정도 되는 고수라면 자존심이 강할 테니 어지간한 일로는 움직이지 않으려 할 터.
“그러니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야겠지. 이쪽 지부에서도 그러니 날 부른 것일 테고.”
주호는 기록된 검마의 행적을 보며 그의 무위를 가늠했다.
사신문의 평가로는 입신지경인 신화경에는 이르지 못한바. 검제 남궁한이나 그 비슷한 고수들과 비교하자면 한 수 아래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나와 동수 혹은 근소하게 우위에 있다는 것일 터.’
하지만 당장 부딪친다는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정말로 최후의 일이 될 터. 그전까지는 은밀히 움직이며 사태를 관망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푹 쉬어라. 내일부터는 조금 바빠질지 모르겠구나.”
첫날은 그렇게 별 탈 없이 흘러가는 듯싶었다.
하지만 밤이 깊었을 무렵, 누군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그의 처소에 찾아왔다.
“장각입니다.”
이미 그 기척을 느꼈을 때부터 잠에서 깨어나 있던 주호가 문을 열자, 다급한 표정의 장각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검마가 움직였습니다. 현재 마인들과 접촉하고 있는 와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