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24화 (124/300)

#124화

“어느 정도의 이야기는 이 친구에게 들었겠지.”

“예.”

악비산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명운이 바뀔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지 아니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전력을 부딪쳐 후회 없는 마음으로 결과를 맞이할 생각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다. 마침 적당히 몸을 달군 것 같으니 시기도 좋구나.”

양인철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그 뒤에 서 있던 주호는 악비산에게 무어라 조언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닫았다.

‘각오는 이미 충분한가.’

두 눈동자엔 이미 비장함이 서려 있다.

여기서 더 무어라 말하는 것은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일 네가 나를 따라나선다면 악가의 이름을 버려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나지막한 물음이었다.

보통 일반적인 문파에선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소속을 옮기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혈계(血繼)로 구성된 세가 형태의 문파일수록 그 잔향이 짙게 나타나는바.

무공을 폐쇄하기 위해 단전을 부수고 사지 근맥을 잘라 폐인을 만드는 것도 예삿일로, 비전의 유출을 막기 위해 척살대를 보내어 목숨을 거두는 곳도 더러 있었다.

특히 명문이라 불리는 곳일수록 자신들의 전승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 필사적이었고, 처절한 면모를 보였으니 산동악가의 소속인 악비산에게 있어 그런 우려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악비산은 창대를 쥐고 그 앞에 섰다.

그러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서자입니다.”

“서자?”

“예. 그것도 전대 가주의.”

“…….”

주호는 한쪽 눈을 살짝 치켜떴다.

속사정이 평범하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하였지만, 설마 전대 가주의 서자 정도나 되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렇군.”

양인철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그는 창을 다루는 무인으로서 산동악가와도 어느 정도 연결점을 지녔다.

특히 같은 연배인 전대 가주와는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기에 그가 말년에 얻은 서자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악비산이 바로 그 본인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기구한 삶을 보냈겠구나.’

전대 가주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등장한 서자가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아왔을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짐작하신 대로 어렸을 적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히는 것도 힘들었고, 남들을 따라 하는 것이 고작이었죠.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강해지고 싶은 일념밖에 없었습니다.”

“강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지?”

“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담담한 악비산의 대답에 양인철은 빙그레 웃었다.

“날붙이는 어떤 사람이 쥐고 휘두르느냐에 따라 그 용도가 달라지는 법이지.”

곧 그의 손 위로 짧은 막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인철이 그것을 허공에 가볍게 휘두르니, 이내 쉬릭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길이가 늘어나며 한 자루의 백색 창이 되었다.

“…그건.”

생전 보지 못한 조화였다.

악비산은 물론, 그 등 뒤에서 지켜보던 주호까지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람을 보였다.

“신창(神槍)이라 불리는 것이다.”

“…신창 백호.”

짐작가는 것이 있는지 악비산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명검(名劍)이라 불리는 것들 가운데 제일(第一)을 꼽으라 함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창을 쥐는 이라면 그 누구든 제일로 꼽는 것이 바로 신창이었으니.

전설로나 들어볼 법한 그 이름에 악비산은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제 창을 힘껏 쥐었다.

“그러면, 어디 실력 좀 볼까.”

주호의 입회하에 둘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스윽-.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악비산은 가늘게 숨을 들이마셨다.

주호에게 듣기로 양인철은 그보다 동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고수라 했다.

자신에게 승산이 없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인바. 그렇다면 보여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꾸득.

창을 쥔 손등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올랐다.

확실히 그는 동년배와 비교해서 내력이 부족했다.

친우인 당천유의 도움으로 조금이나마 그 공백을 채우긴 했지만, 같은 악가의 후기지수와 비교하자면 손색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부족함을 갈고닦은 기술과 단련한 완력으로 메꾸었다.

더욱이 주호에게 가르침을 받아 성장한 지금, 그의 감각은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쐐애애액-!

창끝이 벼락처럼 내질러졌다.

탐색 따윈 없었다.

앞서 말했듯 상대와의 차이는 절대적인바. 그렇기에 초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을 생각이었다.

휘릭-.

양인철은 신창을 들어 자신에게 닥쳐온 창끝을 흘려냈다.

그러면서 그 끝에서부터 창대를 휘감아 나갔으니, 종래엔 적의 힘을 이용해 창을 빼앗아 올 심산이었다.

“흡-!”

힘찬 기합성과 함께 악비산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휘감아온 신창에 서린 것은 유(柳)의 묘리, 악비산은 그것보다 더 강한 힘으로 창대를 들이밀었다.

“…….”

양인철은 자신에게로 닥쳐오는 창끝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무공의 격차로 본다면 썩은 나뭇가지로도 악비산의 창을 튕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그 나름대로 예의를 표한 것인바. 더욱이, 악비산이라는 남자의 창이 지닌 본질을 보고 싶었다.

‘잘 자랐구나.’

올곧음이 느껴졌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가 있었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제 몸을 아끼지 않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짐짓 투박할 수 있으나, 제 나름대로 깊은 묘리를 품고 있었으니.

이 정도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악가의 창법은 기본적으로 선점의 묘리를 지닌다. 상대의 수법을 꿰뚫고, 흐름을 뒤틀며, 맥을 끊어버리지.”

어설픈 점이 보였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무공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이때까지 본 악가의 무인 중 가장 훌륭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쉬익-.

신창이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파공성을 내며 휘둘러졌다.

양인창은 그것으로 대련을 끝낼 생각이었다.

보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이룬바. 나머지는 직접 굴리며 수련시키면 될 일이었다.

캉-!

매서운 기세를 지닌 두 창이 부딪쳤지만, 튕겨 나간 것은 악비산의 쪽이었다.

그것은 원을 그리며 허공을 부유하더니 이내 연무장 구석으로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

악비산은 침중한 기색으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창을 놓치지 않으려 힘을 주었지만, 손바닥만 찢어졌을 뿐 그 힘에 대응할 순 없었다.

“어떻습니까.”

비무의 결판이 났다.

양인철의 표정은 더없이 흡족해 보였지만,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주호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대 백호의 이름으로 그가 계승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겠다.”

“다행이군요.”

그 말에 주호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악비산에게 다가가 품에서 천을 꺼내 피가 흐르는 손에 둘러주고는, 장하다는 얼굴로 그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했다. 지금까지도 잘해왔지만, 오늘은 더욱 잘했다.”

“…그러면 저도 무림맹의 소속이 되는 겁니까?”

“무림맹?”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는 의문을 표했다.

그러던 찰나 제자들은 자신을 무림맹주 직속의 그림자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탄식을 내뱉었다.

“아니, 난 사실 무림맹 소속이 아니다.”

“…예?”

주호는 지금까지의 일들과 사신문의 존재를 이어서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악비산의 입은 서서히 벌려졌으니, 끝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군요.”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그렇기에 혈천신교에 대한 이야기는 해주었으나, 사신문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계승자가 될 후계는 찾았으니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나.”

“그러면 바로 수련에 들어가는 겁니까?”

양인철의 말에 연무장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제 창을 주워온 악비산이 의욕적인 표정을 보였다.

“그러고 싶지만, 먼저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이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렇지요.”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황의 비동에서 상태창은 처음부터 청룡신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 기반이 되는 청원결(靑源結)이란 호신공을 먼저 익혀 신체와 기운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백호신공을 익히려면 백원결(白源結)로 심신을 다스려야 한다. 일단 먼저 문으로 돌아가 문주에게 인정을 받고 시련을 통과해야 온전한 계승자가 되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악비산은 살짝 아쉬운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상승 무공을 익힐 수 있을 줄 알았건만, 건너야 할 벽이 많이 있다는 소리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 모습을 본 양인철은 쓴웃음을 지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전까지 익힐 만한 적당한 무공이 있으니. 혹, 이화창이라고는 들어는 보았는가?”

“이화창이라면!”

악비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고 보니 이분의 성씨가…….’

양씨세가의 양가창법이란 무공이 있었다.

다른 별칭인 이화창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했으며, 창술을 꼽을 때 악가의 것과 더불어 쌍벽을 이룰 정도로 고절하다 알려진 것이었다.

“이화창의 기본적인 틀인 군대를 훈련시키려는 목적으로 창안된 것이지. 하지만 양씨세가의 비전은 다르다. 악가의 절기와 견주어 보았을 때 부족함이 전혀 없을 것이야.”

“그걸 단지 수련의 명목으로 알려주신다는 말씀입니까.”

떨떠름한 악비산의 말에 백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흔히 악가와 양가의 창술이 쌍벽을 이룬다고 하는데, 잘못된 사실이다. 그 두 개를 합한다고 하여도 백호신공의 창술에는 이르지 못하지. 아무렴 신창을 다루는 것을 기반으로 펼치는 무공인데 수준이 낮을 리가 있을까.”

“…그렇군요.”

악비산은 제 손을 주억거렸다.

아직 지금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기에 주호가 입을 열 찰나, 연무장의 문을 열고 천우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은 잘 끝난 것 같네.”

“보다시피.”

화기애애한 장내의 분위기를 본 천우희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께선 그 아이와 함께 문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시죠?”

“그렇네. 문주를 보아야 하니.”

“저도 동행할게요. 아무래도 얼마간은 안쪽에서 폐관 수련이라도 해야 하나 싶어요.”

“가는 길이 심심치는 않겠군.”

양인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천우희는 다시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 보고 싶어도 참아. 더 강해져서 나올 거니까.”

“기대하지.”

사뭇 섭섭한 말이었으나 주호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 천우희는 깜빡했다는 듯 품에서 서찰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참, 문주님이 보내신 전언이야.”

“문주님이?”

“응. 상세한 내용은 그 안에 적혀 있을 건데, 출장 임무야. 위치는 산서, 마교가 그곳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고 하네.”

“…마교가.”

“응. 백호께선 계승자의 일로 복귀하실 거고, 나도 중요한 기로니 나서기 힘들고, 현무께선 본문을 지키고 계시니 남은 건 당신밖에 없네?”

“어려운 일은 아니군.”

그간 사신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서찰에 적힌 위치라면 이곳에서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바.

“향이의 무공을 돌보아주려면 빠르게 처리해야겠군.”

주호는 씩 웃으며 서찰을 쥐었다.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잠시나마 월영사신으로 되돌아갈 때가 도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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