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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귀환-123화 (123/300)

#123화

주호와 천우희의 대련이 있은 지 이틀 뒤의 오후, 주가장으로 새로운 얼굴이 찾아왔다.

성성한 백발과 새하얀 도복은 그야말로 신선과 같은 풍모였으니, 정문을 지키던 무사는 본능적으로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꼈고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와 주호에게 이를 알렸다.

“백호를 뵙습니다.”

“잘 지냈는가.”

사신문에서 찾아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백호였다. 일정에 딱 맞춰 도착한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주호의 인사를 받았다.

“아이들은 연무장에서 수련 중입니다. 곧바로 가시겠습니까?”

“아닐세. 굳이 수련을 방해할 이유까지는 없지. 그보다 우희 그 아이도 이곳에 있다고 들었거늘?”

“나름의 성취가 있어서 며칠 전부터 계속 거처에 틀어박혀 있습니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기미가 보이질 않는군요.”

“그건 좋은 소식이군. 어떤가, 이 늙은이랑 차라도 한잔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주호는 곧 백호와 함께 장원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제 아버지와 마주친바,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주한진의 쪽이었다.

“아들이 속해 있는 곳의 고수께서 나오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주씨 일가를 이끄는 한진이라 하옵니다.”

주한진은 주가장을 운영하며 기른 눈썰미가 얕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백호가 심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하고 할 수 있는 극진한 예를 다했다.

“너무 과분한 예의일세. 우리가 속한 곳에서 나와 자네 아들은 같은 위치에 있으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힌 주한진을 붙잡아 일으켜 주었다.

“모자란 아들이지만,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 아들은 충분히 제 몫을 해내고 있으니.”

끝으로 가벼운 인사를 한 후, 주한진은 자리를 떠났다.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호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좋은 부친을 두었군.”

“…제 걱정을 많이 하셔서 말입니다. 아직 제가 미덥지 못한가 봅니다.”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어떻게 손쓸 틈도 없이 행해진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손을 놓고 관망밖에 할 수 없던바. 그런 주호의 표정에 백호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부모의 마음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나. 이리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 같아 보이는 법이겠지.”

“백호께서도 그러십니까?”

“물론. 자네야 아직 청춘이니 먼 미래의 이야기겠지만 말이야.”

그 말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안으로 드시죠.”

응접실에 도착한 주호는 곧바로 차와 다과를 준비했다.

내부로 산뜻한 향기가 퍼져나갈 때, 백호는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들을 즐겼다.

“흔히 차는 향으로 마신다고들 하지. 젊었을 적에는 술을 달고 살았기에 그 말이 이해되질 않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어렴풋이 느끼게 되더군.”

“이전에 보니 지금도 술을 즐기시는 것 같던데…….”

“하하, 소싯적과 비교하면 어림도 없네. 우희 그 아이가 주당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새 발의 피였을 뿐이야.”

백호는 씩 웃으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실제로 사신문에서 함께 술자리를 했을 때, 그 독한 화주를 물처럼 마시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내공으로 주기를 태우지 않았으니, 신체가 젊었을 적엔 얼마나 주당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부상은 전부 회복하신 듯하군.’

[상태창]

이름: 양인철

별호: 백호

직업: 사신문 백호단주

나이: 예순둘

소속: 사신문 백호단주

무공: 백호신공

경지: 초절정(八/十)

호감도: 上中

주호는 백호와 대화를 나누며 그의 상태창을 살폈다.

자신보다 한 수 위로, 탈각이라 일컬어지는 신화경(神化境)에 근접해있는 경지였다.

상태창에 표시된 신체의 정보도 이전과 달리 모두 정상으로 표시되었으니, 상처를 모두 회복한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실례가 됨을 알지만,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상태창을 바라보던 주호는 문득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자 양인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나.”

“…궁기와의 일전을 기억하십니까?”

“자네와 처음 만난 그날 말인가?”

“예. 제가 느끼기로 분명 궁기의 경지가 더 낮았습니다만, 어째서 그리되었는지…….”

무인에게 있어서 왜 패배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주호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당시 궁기의 경지는 고작 초절정 가운데 三에 불과했다. 그와 반대로 백호의 경지는 八에 달했으니, 단순한 수치상으로 비교하자면 후자의 압승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 결과는 양패구상으로 이어졌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것 참.”

“…곤란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타당한 의문이야. 오히려 보는 눈이 정확했다고 칭찬해줄 수도 있겠어.”

양인철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이것 참, 변명하는 것 같아서 말을 꺼내기 조금 그렇네만.”

“아닙니다. 새겨듣겠습니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었네.”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 녀석은 분명 나와 동등하거나 혹은 그 위를 바라보고 있었네.”

양인철은 그때를 회상했다.

궁기의 무공은 사흉수의 악명답게 끈질겼으며, 강맹했다.

드러난 기세와 경지로 보자면 분명 자신이 몇 수 위에 있는바. 그렇기에 압도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끝끝내 양패구상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제한을 두고 있었다는 겁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아니라면 모종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제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거나.”

“흠…….”

사흉수는 사신문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조직이었다.

혈천신교의 계급 구조를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존(四尊)이라는 직급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상위층에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드러난 무위만으로 보자면 청혈도제보다 하수다. 그러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쪽이 유력한가.’

주호는 손안에서 찻잔을 굴리며 그때의 기억을 복기했다.

당시엔 아직 초절정에도 이르지 못했기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지금이라면 압도적으로 승기를 가져올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군.”

주호가 양인철를 알아보았듯, 백호 역시 주호의 경지를 가늠했다.

이전에도 나이에 비해 뛰어난 성취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턱밑까지 쫓아온바.

이젠 정확하게 그 무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조만간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 빨리 계승자를 정해 백호의 자리를 넘기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네.”

혈천신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상, 머지않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 전에 한시라도 빨리 세대교체를 해서 일선에 젊은 피를 수혈해야 했다.

자신 같은 늙은이는 수련에 집중해 여차할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걱정이 기우로 끝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겠으나, 우리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했네. 그러니 내가 이리 서두르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백호에 이어 현무도 세대교체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무 역시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바. 그렇기에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끼이익-.

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이틀간 거처에서 두문불출하던 천우희였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잠도 얼마 자지 못해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찾아왔어요. 제가 늦은 건 아니죠?”

“호오. 나름의 성취가 있었다고 들었거늘, 벽을 허물 정도였느냐?”

“그렇게 되었어요. 제가 또 재능이 좀 뛰어나잖아요?”

주호는 천우희의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절정의 끄트머리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경지가 어느덧 당당히 초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축하한다.”

“고마워.”

담백한 주호의 말에 천우희는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 둘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양인철은 깜빡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계승자의 건을 깜빡했구나.”

“슬슬 수련을 끝냈을 겁니다. 가시죠.”

“나는 씻고 올게. 며칠간 칩거 생활을 했더니 찝찝해.”

“그러는 것이 좋겠군. 조금 쉰내가 나는 것 같다.”

“…….”

천우희는 매섭게 노려보는 얼굴로 주호의 가슴팍을 한 대 후려치곤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제 가슴을 문지를 찰나, 양인철은 흐뭇한 미소로 말해왔다.

“사이가 좋군.”

“더 좋다간 뼈가 부러지겠습니다.”

“자업자득 아닌가. 그래서 혼례는 언제 치를 생각이지?”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는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것은 오히려 양인철 쪽이었다.

“문주에게 이미 동침한 사이라 들었네. 아니면 설마 무책임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아니겠지?”

“…끄응.”

주호는 차오르는 수치심에 신음을 내뱉었다. 사신문에서 술에 취해 벌인 소란이 문주의 귀까지 들어간 듯했다.

“저는 몰라도 그녀 쪽에서 그럴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우희가? 하지만 시간을 생각한다면…….”

양인철은 돌연 입을 닫았다. 그러곤 침중한 안색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역시 무언가 병이 있는 겁니까?”

“그 아이는 자신에 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네. 구태여 미움받을 필요는 없겠지.”

“…그렇습니까.”

말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현에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후우…….”

악비산은 천천히 제 창을 내렸다.

전신이 흠뻑 젖을 정도로 격렬하게 수련을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는 아직 이틀 전 주호와 천우희가 벌였던 대련에 사로잡혀 있었다.

검과 도가 휘둘러지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깊은 묘리와 치밀한 계산이 담겼다,

공방은 서로 사전에 짜둔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마치 검무를 추는 것과도 같았다.

자신이었더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요 이틀 동안 시간 대부분을 수련에 할애해도 도출되는 결과는 절대적인 부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쿵.

창끝을 바닥에 강하게 내려찍은 악비산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지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반쪽짜리 무공으로는 절대 자신들을 꺾을 수 없다고 자신하던 악가의 후기지수들 모두 처참한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조금만 더 시간을 기울이면, 조금만 더 노력을 쏟으면 분명 자신도 가능하리라, 그렇게 믿었다.

“…교관님.”

악비산은 문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주호와 함께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련은 끝냈나.”

“예. 막 끝낸 차입니다. 혹시 옆에 계신 분께서…….”

“그래. 내가 이전에 말했던 그분이시다.”

악비산은 두 눈을 빛냈다.

주호보다 더 뛰어난 무공을 지닌 창술의 고수. 그런 이에게 가르침을 사사 받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악가의 비산입니다.”

그렇기에 정중한 태도로 예의를 갖추었다.

“양인철이라 하네.”

양인철은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가 쓸만한 재목이라 장담해오기에 적잖게 기대하고 있던바. 하지만 눈앞에 자리한 악비산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재였다.

근골은 흠잡을 것 없다. 체구가 장대하고, 뼈가 굵어 보이는 것이 창을 다루기에 타고난 신체 같았다.

더군다나 그 몸에 서린 은은한 기세는 역발산의 기개를 내포한 것이었으니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력이 조금 부족해 보이나, 신공을 익혀야 하니 오히려 이점이 되겠군.’

생각보다 조금 빠르게, 백호의 계승자를 찾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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