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오.”
서로 마주 선 주호와 천우희의 모습에 주예향은 두 눈을 빛냈다.
주호가 싸우는 모습을 제일 처음 본 것은 혈사문주를 쓰러뜨렸을 때였다.
그때는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무언가 빛이 번쩍이는 듯싶더니 이내 땅에 머리부터 꽂히지 않았는가.
두 번째는 사신문에서였다.
무슨 진법에 들어가 시련을 거쳐야 한다는 말에 그 밖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기다렸다.
하지만 진법을 빠져나온 오라버니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살벌한 기세로 주위를 둘러싼 이들을 공격까지 해왔으니.
종래엔 잘 해결되었으나, 별로 떠올리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누가 이길 것 같나요?”
주예향은 제 옆에 선 남궁연과 악비산에게 물었다.
주호는 주호대로, 천우희는 천우희대로 서로가 더 강하다고 자신했다.
그녀로서는 그 말의 진위를 가릴 수 없는바. 그렇기에 묻자 남궁연과 악비산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글쎄, 승부는 두고 봐야겠지.”
“그렇군.”
결과는 명백했지만, 그들은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 않았다.
쿵-.
이윽고 주호와 천우희가 움직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 합 일 합 격돌할 때마다 귀청을 찢을 듯한 광음과 더불어 바닥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주예향으로서는 고작 대련을 위해 이런 외진 곳까지 온 것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지금에 와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아요.”
“그러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남궁연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싸움을 바라보았다.
“…….”
악비산 쪽은 이미 온 신경의 집중을 그쪽에 쏟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호와 천우희 둘 다 그들이 오르길 원하는 경지의 고수가 아니던가.
찌르고, 베고, 휘두른다. 기본에 가까운 일련의 동작이었지만, 그 하나하나마저 예사롭지 않았다.
같은 육신을 지니고,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라면 막을 수 있을까.’
남궁연은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이 주호의 앞에 서 있었다면, 천우희의 앞에 서 있었다면 저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단순히 상상만 한 것으로 손을 비롯해 등허리가 식은땀 범벅이 되었다.
“…저게 강기인가요.”
주예향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파랗고 붉은 기운이 크게 몸을 부풀리며 서로를 잡아먹고자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몇 년의 내공을 단전에 축적한 그녀에겐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들이었다.
“그래, 우리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지.”
강기란, 절정의 완숙을 넘어 초절정에 다다른 이들부터 사용할 수 있는 상승 경지의 전유물이었다.
아직 초일류의 경지에 있는 그들에겐 무리였으나, 지금의 성장세로 본다면 그리 머지않아 오를 수 있으리라 보였다.
쿵.
싸움은 곧 절정에 이르렀다.
인간이 부린 조화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여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수십 줄기의 강기는 초목과 산천을 무너뜨렸고, 마치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상황에서 정작 폭풍의 중심에 있는 당사자들은 서로 상처 하나 입지 않았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몸풀기는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지.”
“…에?”
숨을 고를 시간을 갖는지, 잠시간 싸움에 공백이 생겼다.
그 가운데서 들려오는 주호의 목소리에 주예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문성을 내뱉었다.
“…….”
남궁연과 악비산은 긴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저들의 기세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어.”
주예향으로선 그것이 의문이었다.
지금까지로서도 충분히 공전절후의 싸움이었는데 무엇을 더 본격적으로 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입을 막 열었을 찰나.
쿵-.
주호와 천우희를 중심으로 막대한 압력이 터져 나왔다.
그 주위를 노닐던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지상으로 추락한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싸움의 여파로 연약해진 지반 위에 균열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런!”
그 여파가 자신들이 있는 자리까지 미치자 악비산이 신음을 토해냈다.
“악공자!”
남궁연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제 옆에 있던 주예향의 허리를 낚아챈 다음 훌쩍 땅을 박차 뒤쪽으로 물러났다.
곧 그녀에게 따라붙은 악비산은 등에 있던 창을 풀러 손에 쥐었다.
그러곤 맹렬하게 허공에서 휘두르더니 이내 그 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땅이 갈라지며 그에게서부터 일어난 기세가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것들은 곧 허공에서 무언가와 부딪치더니 더 나아가는 것을 멈춘 채 그 자리에서 흩어져 버렸다.
“후우.”
남궁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옆구리에 대롱대롱 들고 있던 주예향의 몸을 내려놓았다.
“…방금 그건 뭔가요?”
주예향은 산발이 된 머리와 함께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의 싸움은 서로의 영역을 다투는 거거든.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이 일어난 거야. 이 정도 물러났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판단했네.”
“영역이요?”
“그래. 흔히 기세 싸움이라고 하지. 파락호들 같은 경우엔 주먹다짐하기 전에 고성을 지르거나, 째려보는 걸로 위압감을 주려고 하잖아. 이것도 같은 맥락이야. 다만, 그 여파가 상상을 초월할 뿐이지.”
그 말에 악비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이 약한 자라면 단지 그 안에 휘말리는 것으로 몸이 짓눌려 사망할 수 있다. 우리도 이 가장자리에서 버티는 것이 고작이니.”
“…아.”
주예향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싸움은 절정을 넘어 극에 달했다.
이윽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니, 그 절반을 뒤덮고 있던 시뻘건 불꽃이 점차 백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염인가.”
악비산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불꽃의 색이 바뀌고, 천우희의 기세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천후는 그와 싸울 때 저런 것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손은 창대를 굳게 움켜쥐었을 뿐이었다.
***
사방을 뒤덮었던 시뻘건 불꽃이 이제는 찬란한 백색으로 물들어갔다.
눈앞에 펼쳐진 그 장엄한 광경에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백염(白炎). 이것이 두 번째 불꽃인가.”
“놀라긴 아직 이른데.”
천우희는 씩 웃으며 주작신도를 거칠게 휘둘렀다.
백익(白翼) 만륜(萬輪).
절정의 기세가 그녀의 전신에서 터져 나왔다.
이때껏 마주했던 어느 때보다 강렬한 그 기운에 주호는 신검을 끌어당기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승부를 보려는 것인가.’
백염이 그녀의 머리 위로 다시 륜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라 수십여 개에 달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으니.
파아아아앗-!
일순간 그것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모두 평범한 강기가 아닌, 하나하나 의념이 담긴 것들이었다.
“…….”
주예향을 비롯한 그 셋이 무사히 뒤로 물러난 것을 확인한 주호는 다시 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십 개의 백색 화륜이 사방을 찢어발기며 자신에게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거기에 더해 분명 이때까지의 거친 싸움의 여파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터인 땅 위로 불길이 번지면서까지 그에게 압박을 전해오고 있었다.
‘만륜. 만검과 같은 수준의 초식.’
사신문주 하월벽에게 듣기로 사신수의 무공은 모두 같은 맥락으로 통한다고 했다.
만검은 청룡검식의 절초, 만륜 역시 주작도법의 절초일 터니 그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리라.
“만검(萬劍).”
주호는 검을 끌어당겨 그 가운데 오롯이 세웠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사방을 뒤덮었고, 그 주위로 하나의 선을 그려내었다.
파아앗-.
경계를 넘어 그 안을 침범한 불길이 짓눌린다. 곧 해일처럼 제 기세를 부풀려오던 만륜의 고리와 백염의 해일은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것처럼 멈춰서고 말았다.
쉬이이이익-!
제 공격이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천우희는 직접 몸을 날려왔다.
‘예전에 한 번 봤어!’
청혈도제와의 싸움에서 본 적 있는 초식이었다.
제 주위의 영역 자체를 뒤덮는, 신기루와도 같은 현상,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극한의 쾌검이었다.
단 한 번만, 단 한 번만 막아낸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터.
일 점에 응축된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며 휘둘러졌다.
신도(神刀)와 신검(神劍)의 싸움이다. 병장기의 강도로는 부족하지 않다. 의구심이 드는 것은 그 뒤에 선 자신이 뚫어낼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샤아아악-!
주작신도가 거칠게 허공을 찢어발기며, 그녀의 발이 영역 안쪽으로 한 걸음 내디뎌졌다.
단지 그것뿐인데 공간 자체가 품고 있는 예기만으로 살이 갈라지고 피가 튀며 쓰라린 고통이 뼛속까지 잠식했다.
“…….”
천우희는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경종이 울린다. 생명의 위기를 감지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으며, 그간 자신의 목숨을 수도 없이 살려준 본능이 뒤로 물러날 것을 경고해왔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벽이었다.
만일 이것을 뛰어넘는다면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단초가 될 것이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제껏 그녀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었으며, 지금 도망친다면 또 언제가 돼서야 마주할 수 있게 될지 몰랐다.
그렇기에 천우희는 주작신도를 다잡고 그 안으로 전신을 집어넣었다.
콰아아아아앙-!
신검이 신도를 강타했다.
단 일격으로 주작신도를 감싸고 있던 백염의 대부분이 휩쓸려 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뒤로 쭉 밀려 나가 저 멀리까지 가서야 겨우 멈춰 설 수 있었다.
“…….”
천우희는 고개를 들었다.
막대한 충격으로 일순간 모든 감각이 상실됐지만, 다시 숨을 내쉬자 피가 돌며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겨우 고개를 들자 튕겨 나온 곳에서부터 지금 서 있는 자리까지 이어진 두 줄기의 흔적이 보였다.
주호의 공격을 최대한 버텨 보려 한 결과였다.
흘려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
울컥.
입가에서부터 피가 흘러나왔다.
적잖은 내상을 입었으나, 호흡을 가다듬고 신체를 정리했다.
‘한 점에, 폭발적으로.’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었다.
주호는 태산이었다.
거대한 방패였고, 넘기 힘든 벽이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자신의 모든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주고 있었다.
“후.”
상대 쪽에서 저렇게까지 해주는데, 포기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가볍게 제자리에서 몇 번 통통 뛰어오른 그녀는 일순간에 내력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앙-!
딛고 선 땅이 움푹 파여 나가며 천우희의 신형이 순식간에 다시 주호의 지척으로 쇄도했다.
일격마다 혼신을 담아 휘둘렀다.
신도와 신검이 부딪칠 때마다 대장장이가 시뻘겋게 달군 검을 두드리는 것처럼 새하얀 편린이 떨어져 내렸다.
말 그대로 그녀는 자신을 제련하고 있었다.
주작이란 이름에 더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부러지지 않는 견고함을 더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주호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원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엔 그저 가벼운 대련일 뿐이었다.
그간 쌓인 욕구의 해소와 천우희의 실력을 시험해볼 겸 하는 의미에서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백염을 꺼내 공격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간절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계기를 자신이 직접 주기로 했다.
파아아앗-!
검신을 잡고 나아갔다.
한계에 이른 시퍼런 기운이 눈부신 광휘를 내뿜으며 사방을 휩쓸었다.
멸천(滅天)이었다.
천우희가 발한 백염이 단번에 휩쓸리며 자취를 감추었고, 그 주인을 다시 한번 밀어냈다.
“크윽……!”
천우희는 이를 악물었다.
황급히 도신을 당겨 전신을 감쌌지만, 그 여파를 온전히 막아내기에 자신의 실력이 부족했다.
미증유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고, 도신을 역수로 쥐며 오히려 그 폭풍 가운데로 몸을 밀어 넣었다.
“흡-!”
새하얀 불꽃 위로 청명한 색이 깃든다. 그녀 자신은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지만, 이내 그것은 느리게나마 주호의 강기를 베어 가르며 그 목을 향했다.
캉-!
날카로운 고성과 함께 주작신도가 허공에 튕겨 올랐다. 그것은 이내 여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 몇 번 회전하더니 이내 바닥에 푹 박혔다.
“…읏.”
천우희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앞을 향해 쓰러져 내렸다.
여력을 끌어모은 마지막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이 막혀버리고 말았으니.
탁.
주호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넘어가던 그녀의 몸을 받아들었다.
곧 그 품 안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당신, 신기해.”
“무엇이?”
“글쎄.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네. 그냥…….”
천우희는 태어나서 남에게 의지해본 적이 없었다.
사신문에서도 그랬으며, 주작이 된 이후로 밖에 나와서도 항상 같았다.
하지만 주호를 볼 때마다 드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스윽.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매만졌다.
상처투성이인 자신과 달리 그는 땀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아 괘씸했지만, 그 모습마저도 자신의 눈길을 빼앗았다.
“큼.”
가벼운 헛기침 소리에 둘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수고하셨어요, 두 분 모두.”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남궁연이 살짝 불편한 얼굴과 함께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