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악비산이 주가장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하루 빠른 엿새가 지났을 때의 정오였다.
“…….”
주예향은 악비산과의 첫 만남에서 두 눈을 크게 뜬 채 주호의 뒤에 숨었다.
“오라버니 저분 엄청나게 크시네요.”
“그렇긴 하지. 태생이 강골(强骨)이라 강호에서도 저만한 이를 찾긴 힘들 것이다.”
주호도 어디 가서 밀리는 체격은 아니었으나, 악비산은 그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으니 가까이 서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악가 핏줄의 특성인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은 평범했지.’
악비산 개인의 특별함일 터.
창을 휘두르는 그에게 있어 큰 키와 긴 팔, 그리고 묵직한 근육은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거리낄 것이 아니었다.
“서둘러 왔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는 교관님의 동생분이군요.”
“주, 주예향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주예향은 쭈뼛거리는 태도와 함께 어설픈 모습으로 포권을 올렸다.
“악가의 비산이라고 합니다. 교관님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악비산은 덩치와는 짐짓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태도로 그 인사를 받았다.
“악공자, 너무 그렇게 다가오지 마요. 향이가 무서워하니까.”
“…이것 참.”
옆에 있던 남궁연이 주예향을 감싸 안고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그러자 악비산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그나저나 저분은…….”
“천우희에요. 저도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잠시 신세 지고 있어요.”
살짝 붉은빛을 띠는 머리카락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해오자, 악비산은 살짝 미묘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영웅호색이라곤 했지만…….’
선우연이나 위천강이 본다면 가슴을 두드리며 분통을 터트릴 모습에 그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본가의 일은 잘 해결되었느냐.”
“얼굴도장은 찍고 왔습니다. 별말은 없었고, 그저 교관님 옆에 붙어서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 유명세를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런가.”
본가의 이야기치고는 상당히 스스럼없는 단어의 선택이었다.
주호는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다쳤구나.”
“…티가 많이 납니까?”
악비산은 민망한 얼굴로 제 옆구리를 매만졌다.
얼굴도장만 찍고 다시 본가를 나왔으면 문제가 없었겠으나, 다른 이들의 도발에 피가 끓어오른 것이 문제였다.
방계의 후기지수들까진 괜찮았다.
그 부분은 요행이라 치부할 수 있고, 또 세간에서 떠도는 공적이 있으니 그 정도 무위를 보여도 악가의 입장에선 거리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직계인 악진양을 한 초식에 쓰러뜨린 것이 화근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가주는 체면이 있는지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그 밑의 똘마니들이 문제였지.’
그 자신도 직계였지만, 직계도 직계 나름대로 서열이 있었다.
비주류인 악비산의 손에 주류 중 주류인 악진양이 당한 것은 악가로서도 체면이 크게 상하는 일. 그렇기에 그것을 쇄신하고자 한바탕 비무 대란이 일어났다.
“하나를 쓰러뜨리니 줄지어 몰려오더군요. 그래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전부 박살을 내주었습니다.”
악비산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악가에 있는 수많은 후기지수가 자신을 상대로 비무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곳에 제 상대는 없던바. 애초에 그중 제일 강한 축에 속했던 것이 악진양이었다.
그조차 일초지적밖에 되지 못했으니, 그 뒤의 결과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면 옆구리의 상처는?”
“…후기지수들로는 안 되겠나 느꼈던지 끝에선 가르침이란 명목으로 일선의 고수가 나오더군요.”
이립이 넘은 신진 고수로, 절정에 근접한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진 이였다.
당연히 악비산보다 몇 수 위의 고수였지만, 그는 올해 중 적지 않은 시간을 자신보다 강한 고수와 싸우는 데에 할애했지 않은가.
심지어 설렁설렁하는 대련이 아닌,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생사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렇기에 손속에 사정을 둔 악가의 고수를 상대로서도 제법 분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쪽도 한 방 먹었지만, 그만한 값어치는 있었지요.”
악비산은 제 옆구리를 매만졌다.
명백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맞은 반격. 상대는 당황이 역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왔다.
마음 같아선 전력을 드러내 이쪽을 찍어 누르고 싶어 했으나, 더 비무를 이어나간다면 그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폭거이기 때문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교관님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그것으로 끝이었겠지.’
하지만 자신은 극복해냈고, 앞으로 향할 길을 찾았다. 그러니 묵묵히 그곳을 따라 걸으면 되는 일이었다.
“점심은 먹었느냐.”
“예. 오기 전에 들려 해결했습니다.”
“그런가. 여독을 풀 시간을 주지 않아서 미안하지만, 수련을 시작할 시간이라서 말이야.”
“아, 교관님 동생 분도 학관에 도전한다고 하셨죠.”
악비산은 천천히 주예향을 바라보았다.
무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거늘, 품고 있는 기세가 사뭇 예사롭지 않았다.
‘자질은 평범하지 않을 테고, 교관님의 가르침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아직 시간은 몇 달이고 남았다.
주호라면 충분히 그녀를 학관에 합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고 악비산은 맹신했다.
“아니, 오늘은 견학이다. 그녀와 비무를 하기로 했거든.”
“오늘은 제 차례랍니다.”
천우희는 가볍게 웃으며 주호의 팔을 잡았다.
그 장난스러운 손놀림에 옅은 미소를 지은 주호는 고개를 돌려 악비산을 바라보았다.
“우희는 천후의 스승이다. 알고 있겠지.”
“예,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의 무공은 천후와 비교하자면 완성에 가까운바. 대련을 잘 지켜본다면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겠습니다.”
악비산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 천후를 넘어서지 못했다.
휴관 동안 그 역시 먹고 놀지는 않겠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기필코 서로 간의 격차를 좁히리라 다짐한 바가 있었다.
“그러면 움직일까.”
주호와 천우희는 설렁설렁 대련할 마음이 없었다.
요 며칠간 주예향이나 남궁연의 수련을 도와주며 가볍게 무공을 가다듬었다곤 하지만, 무인에게는 제힘을 발산하고 싶다는 욕구가 쌓이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주가장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해 사람의 인적이 드문 산맥 멀리까지 자리를 옮겼다.
“여파에 휘말릴 수 있으니 멀찍이 물러나거라. 그리고 향이가 영향을 받지 않게 부탁한다.”
“맡기세요.”
“생채기 하나 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남궁연과 악비산이 믿음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지에 도달한 고수들의 싸움은 그 주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파에 휘말릴 수 있었다.
가벼운 것이 내상이었고, 심하면 내장이 터져 죽을 수도 있는바.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이고 그것을 운용해 제 몸을 지킬 줄 아는 그들은 상관없었지만, 아직 여러모로 미숙한 주예향은 그 위험도가 높았다.
“절대로 이 둘의 옆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네.”
주예향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주호는 고개를 돌려 저 한가운데 이미 자리를 잡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천우희를 바라보았다.
스르륵-.
등 뒤에 매고 있던 주작신도를 들곤 도신을 덮고 있던 천을 풀어 해치고 있었다.
‘싸울 마음이 가득하군.’
그도 그럴 것이 그녀 또한 그간의 일을 겪으며 적지 않은 성취가 있었던바.
학관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이후로 다시 싸운 적이 없기에 설레는 마음이 드는 것은 피차일반으로 보였다.
[상태창]
이름: 천우희
별호: 주작
직업: 사신문 주작단주
나이: 스물여덟
소속: 사신문
무공: 주작신공
경지: 절정(十/十)
호감도: 上上
천우희의 상태창을 확인한 주호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절정의 완숙에 불과했던 그녀는 이제 초절정의 초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릇이 가득 찬 상태이니 조그마한 무언가가 계기를 주어 툭 건드린다면,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넘쳐흐를 터.
주호 역시 그것을 보았기에 먼저 대련을 제안한 것이었다.
“난 준비 끝났어.”
붉은빛이 번뜩이는 주작신도를 든 천우희가 기세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스릉-.
주호 역시 그것에 대답하듯 신검을 뽑아들었다.
청룡신공의 내기가 그 위에 주입되자, 평범하던 검신 위로 시퍼런 물결이 요동치며 살을 에는 듯한 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싸움인가. 처음에는 당신이 승기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기대하도록 하지.”
주호는 검 끝을 까닥였다.
먼저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승자의 아량으로 선공은 양보한바. 그것을 알아들은 천우희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 내쉬며 발을 움직였다.
핏-.
일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뻘건 궤적이 허공에 그어지며 순식간에 주호의 지척으로 쇄도한바. 곧 시뻘건 강기에 휩싸인 주작신도가 날카로운 기세로 휘둘러졌다.
캉-!
마찬가지로 푸른 강기에 휩싸인 신검이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맞닿은 검과 도가 덜덜 떨리며 서로의 여력을 해소하려 했고, 그 뒤에 있던 주호와 천우희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더 빨라졌군.”
“아직 시작도 안 했는, 데!”
천우희는 거칠게 도를 떨치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정공법으로 상대하면 내게 승산은 없겠지.’
처음 만났을 땐 별 차이 없을 줄 알았던 서로가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 있었다.
특히 얼마 전, 교류 대회를 습격한 청혈도제와 싸우던 주호의 신위는 그녀로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더라면 몇 초식이나 받아낼 수 있었을까.
열 초식? 아니, 다섯 초식이라도 온전히 막아내면 잘했다고 칭찬을 들었으리라.
“흡-!”
천지인 중 천(天)의 묘리를 품은 주작신도가 맹렬한 기세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앙-!
주호는 신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한 손으로 검신을 받친 채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 여파는 피할 수 없었는지, 그가 딛고 선 땅이 움푹 파이며 자글자글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거든!”
파아아아앗-!
주작신도를 휘감은 강기가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한다. 이윽고 그 불꽃은 하나의 원을 만들어냈고, 이내 주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일륜(一輪)-.”
파아아아앗-!
불꽃의 세례였다.
강기마저 태워 버리는 화마의 폭풍이 사방을 휩쓸며 그에게 닥쳐갔다.
“후우…….”
폐를 녹여버릴 것만 같은 그 뜨거운 공간 가운데, 주호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잠운.”
파바바밧-!
십수 줄기의 강기가 그의 검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쇄도했다.
떨어져 내리던 일륜을 찢고, 뜯어 발겼으며, 종래엔 그 중심을 꿰뚫었다.
한치의 밀고 밀림 없는 백중지세였으니.
파스스스-.
파랗고 붉은 그 파편들이 허공에 스러져 내렸다.
천우희는 훌쩍 몸을 날려 거리를 둔 채 떨어져 내렸을 때, 검을 거둔 주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주작의 불꽃은 두 번 변한다지. 몸풀기는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보지.”
이제 막, 전초전이 끝났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