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남매간의 대련은 성공적으로 끝을 맞이했다.
주예향의 성장이 생각보다 가파른바. 그림의 떡으로 여기던 정천 학관의 입관이 이전보다 더 현실적인 목표가 되었기에 제법 기쁜 마음이 되었다.
“일단 짐부터 풀자꾸나.”
본가에 돌아오자마자 한 것이 주예향과의 대련이었다.
여독은커녕 짐도 제대로 풀지 못했기에 마실을 나갔던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대략적인 준비를 하기로 했다.
“후우.”
주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풍경은 어릴 적부터 변함이 없다. 서책이 꽂혀 있는 책장의 위치, 침상과 탁자, 그리고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장식품들까지.
전부 정겹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잠시간 천천히 그것들을 어루만지던 그는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때를 잘 맞춘 듯 정문에서부터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오랜만이로구나.”
곁에 있는 주산에게 이야기를 들었는지, 어머니인 적가혜는 크게 놀라는 기색도 없이 산뜻한 미소로 오랜만에 돌아온 제 아들을 맞이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서신으로는 꽤 차도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벽대협께서 보내주신 약재 덕분에 꽤 호전되었다. 나중에 돌아가면 감사 인사를 꼭 전해드리거라.”
“알겠습니다. 꼭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호가 맡은 강의 중 하나인 재화 관리의 담당 교관인 금적산 벽진양은 옛적에 주한진과 인연이 있었다.
그 때문에 주한진의 몸이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호를 통해 몸에 좋다는 약재를 한 아름 보낸바. 실제로 차도가 있었는지 두 내외의 얼굴은 이전보다 혈색이 좋아 보였다.
“큼. 바쁠 텐데 뭐 이리 자주 들리느냐.”
주한진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사뭇 반가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 무뚝뚝한 표현이 우스웠던 적가혜는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었다.
“이이도 참. 학관 쪽에서 사건이 있었다는 걸 듣자마자 백방으로 알아봤으면서.”
“…쓸데없는 소릴.”
주한진은 인상을 쓰며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쓸데없는 소리라고요?”
하지만 정작 아내가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향하자, 이내 주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옆에 계신 처자분은 누구신지 소개 좀 해주겠니?”
적가혜의 관심은 이내 주호의 옆에 서 있던 남궁연에게 향했다.
“…….”
어느새 와 있던 것일까.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그녀의 은밀함과 신속함에 주호가 혀를 내두를 찰나, 남궁연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예의를 표했다.
“남궁연이라 합니다. 교관님 밑에서 가르침을 사사 받고 있습니다.”
“남궁, 이라 함은…….”
“네. 그 남궁세가가 맞습니다.”
상대적으로 무림에 관한 정세를 잘 모르는 적가혜는 명문 정파의 아가씨라는 이야기에 감탄을 내뱉었지만, 주한진은 그 이름이 주는 무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히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렴 저와 교관님의 사이니까요.”
“…호오.”
어느덧 모습을 드러낸 천우희가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아무리 자신일지라도 저렇게 뻔뻔스레 말을 내뱉을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는 않았다.
“…저와 교관님의 사이?”
주한진과 적가혜로서는 아무렴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제 맏아들이 천우희와 긴밀한 사이로 알고 있는바. 그렇기에 설명을 요구하는 강렬한 눈빛으로 주호를 바라보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궁색 맞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자꾸나. 아무래도 천천히 나눠보아야 할 이야기 같으니.”
적가혜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렴 아들의 혼사를 정하는 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기에 식사하자는 그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주가장 일가와 객(客)이 한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맏아들을 환영해 산해진미가 가득한 상차림이 준비가 되었다.
식사 자리는 제법 화기애애했다.
대화는 주로 어머니인 적가혜, 그리고 동생인 주예향의 주도로, 천우희와 남궁연은 그에 대답하는 형식이었다.
“…….”
주한진, 주호, 주산 삼부자(三父子)는 잠자코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했다.
주호는 식사 내내 조마조마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천우희는 물론이고 남궁연 역시 폭탄을 한 아름 안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자신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 자리에서 불호령이 떨어질 터니, 슬쩍슬쩍 두 여인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참, 오라버니. 교류 대회 쪽에서 마교가 습격했다는데 정말이에요?”
“교류 대회뿐만이 아니다. 이목이 그쪽으로 쏠린 틈을 타 두 학관에도 공격해왔지. 그 탓에 사상자가 적지 않다.”
“그런가요…….”
주예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이 몇 달간 계획한 일이 잘되어 입관 시험에 통과해 정천 학관에 다니게 된다면 그녀 자신 역시 그러한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무림 정세에 간해선 겉핥기 수준의 지식밖에 알고 있지 못했지만, 천마신교의 마인들이 얼마나 악랄하고 잔혹한지는 충분히 들었기에 절로 긴장하는 마음이 들었다.
“두려운가 보구나.”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그렇다면…….”
“그렇다 할지라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심지가 굳은 눈빛이었다.
주씨 일가의 고집은 윗대로부터 유명한 것이었다. 자신 역시 그러했기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오라버니한테 달려가지요. 어지간한 고수들은 상대가 되지 않잖아요?”
“그렇지. 지금 강호에서 네 오라버니보고 검절(劍絶)이라고 부를 정도니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천우희가 작게 웃으며 말해왔다.
“검절이라. 좋은 별호구나.”
주한진은 대견함을 숨기지 못하는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림에서의 별호는 스스로 칭한다고 해서 붙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한 공적을 세우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굳어졌을 때야 비로소 각인되는 것이었다.
주한진은 상계 가문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 나름대로 강호 정세에 눈이 밝았다.
절(絶)이라는 별호는 강호의 신진 고수 중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붙는 칭호와도 같은 것이다.
그중 일석을 아들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쁘기 그지없을 따름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과소평가 된 것이긴 한데,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잖아요.”
남궁연 역시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해왔다.
“오라버니가 그 정도의 고수신가요?”
“그래, 내가 그 정도는 되는 사람이다.”
주호의 호언장담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몸조심하거라. 너도 느꼈겠지만, 돌아가는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주한진은 이때만큼은 솔직한 속내를 보이며 말해왔다.
하택 지방에서 상계 가문을 운영하는 그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을 정도로 강호 정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올해 들어 특히 이상할 정도로 폭풍전야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번 마교의 습격이 기폭제가 된 듯 그 반향이 한두 군데씩 툭툭 튀어나오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호 역시 평소와 달리 사족을 덧붙이지 않은 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었다.
***
식사가 끝난 후, 주한진과 적가혜는 젊은이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떠났다.
주산 역시 아직 처리할 업무가 남았다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간바. 문을 나서며 제 동생인 주예향에게 눈치를 줬으나, 그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몰차게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 따름이었다.
‘누가 새언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둘 다 친하게 지내야지.’
주예향은 천우희와 남궁연 둘 모두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애초에 그 위로 두 남자밖에 없지 않은가.
첫째 오라버니라는 것은 강호인이 되고 싶다며 약관이 되는 해야 뛰쳐나간 말썽꾸러기고, 둘째 오라버니는 종일 서류 더미에 파묻혀 사는 애늙은이였다.
환경이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녀로서도 외롭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새로이 생긴 예쁘고 강한 언니들과 떨어지기 싫다는 것이 솔직한 속내였다.
“내친김에 오늘, 같이 잘까? 여자끼리 할 이야기도 많은 것 같고.”
“좋아요! 연언니도 어떠세요?”
“나도 그렇게 할게.”
남궁연은 작게 미소 지으며 주예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문 내에서 항상 금지옥엽의 취급을 받았다.
연배로 따져도 제일 어린 축에 속했으니 당연한 일인바. 그렇기에 옛적부터 항상 동생을 원했었다.
그러던 찰나에 주예향과 만나게 되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사모하는 이의 동생인 것과 더불어 그 싹싹한 성격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만난 지 하루 차이지만, 벌써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같이 서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음을 흘렸다.
“아, 당신은 끼워주지 않을 거니까 혼자 자.”
“…애초에 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호는 천우희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녀 혼자라면 몰랐으나, 남궁연에다가 동생인 주예향까지 있는 상황이다.
애초에 그사이에 끼어들 생각을 하는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슬슬 잠자리에 들어라. 내일 열심히 수련하기 위해선 푹 쉬는 것도 중요하다.”
“오라버니도 좋은 꿈 꾸셔요.”
달이 차오르고 밤이 깊어갔다.
그렇기에 내일을 기약하자, 주예향은 제 오라버니에게 눈을 찡긋하며 답했다.
“당신은 잠깐 이야기 좀 하지.”
곧 세 여인이 방으로 향하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호가 말했다.
“천언니만요?”
“그래. 일 이야기다.”
“…….”
일 이야기라는 소리에 남궁연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녀도 형식상 사신문의 협력자인바. 그렇기에 같이 자리하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투정을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우린 먼저 가 있자.”
“…네.”
주예향은 슬쩍 남궁연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그들의 인기척이 전부 사라졌을 때가 돼서야, 천우희는 입을 열었다.
“앉아만 있으니 그런데, 밖으로 나갈까?”
“그것도 괜찮군.”
그믐달이라 하늘은 어둡기 짝이 없지만, 주가장은 곳곳에 밝혀진 화롯불 덕분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둘은 곧 내원을 산책하듯 거닐었다.
어느 정도 시원한 밤공기를 만끽했을 찰나, 천우희가 입을 열었다.
“며칠 뒤에 백호께서 오실 거야.”
“몸은 좀 괜찮으신가.”
“응. 대부분 회복하셨다고 하더라. 나머지는 여기서 당신이랑 비무 하면서 재활하신다고 하니.”
“좋군. 나도 근질근질했던 차다.”
화산에서 있었던 조원일과의 싸움은 제법 싱겁게 끝났던바.
그에게도 불완전하게 해소된 욕구가 남아 있기에 백호와의 싸움은 반가운 이야기였다.
“악비산이라고 했던가, 그 아이는 언제쯤 와?”
“늦어도 이레 안에는 온다고 했다.”
“백호께서도 열흘 안쪽으로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셨으니 얼추 맞겠네. 과연 어떻게 될까?”
천우희는 백호의 후계 후보로 거론되는 악비산에 대해 관심이 가는 눈치였다.
“천후에게 이야기 듣지 못했나?”
“그 아이는 남을 평가하는 기준이 후하거든.”
“그렇다 할지라도 보는 눈은 있을 테니 말이야. 천후에는 미치진 못하겠지만, 그 지닌 자질과 성정은 뒤떨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악가에서 배척받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정도 경지까지 올라섰으니 심지 하나만큼은 인정해줄 만하지.”
“당신이 그렇게 평가할 정도니까 흔히 널린 이들보단 낫겠지.”
“그보다 혈천신교 쪽은?”
“청해 쪽으로 제법 많은 움직임이 있었나 봐. 문에서도 지금 그곳을 예의주시하는 중이야.”
“청해면 곤륜파가 자리한 지역인가.”
“그래. 아무렴 구파일방의 저력이 있으니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겠지만…….”
“무너지게 된다면 그곳부터 시작이라는 소린가.”
주호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의 아버지가 걱정한 대로 강호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