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19화 (119/300)

#119화

“……?”

악인벽은 두 눈을 뜸과 동시에 보이는 푸른 하늘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자신이 누워 있는 것인가.

분명 형제들과 함께 연무장에서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외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바. 악비산이 가문으로 돌아온다곤 들었지만, 그것이 오늘이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재회였지만, 제법 흥미가 동했다.

꼴에 악가의 이름을 달고 있다고 정천 학관에 입관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나.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천무 교류회의 인원을 뽑는 선발 대회에서 상위권에 뽑히는 기염을 토해냈다고 했다.

하지만 악비산의 실력은 가문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익힌 무공 또한 반쪽짜리에다가, 그간 여러 차례 비무에서 또한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더욱이 악인벽 그 자신 역시 몇 번이고 압도적인 격차로 짓밟은 적이 있기에 그때의 손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벽, 괜찮은가?!”

“…어?”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그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쪽 눈이 시퍼렇게 물든 제 형제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너, 얼굴이 왜 그래?”

“…네가 할 소린 아니다.”

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품에서 동경을 꺼내 악인벽을 비췄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제 형제의 것과 마찬가지로 시퍼런 멍이 얼룩져 있어 제법 우스운 꼴이었다.

“이,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악인벽이 의문을 토해낼 찰나, 누군가가 그들 곁으로 날아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으으.”

그 역시 얼굴이 시퍼렇게 물든 모양새였다. 거기에 더해 어디를 잘못 맞은 것인지 입에 거품을 문 채 전신을 바르르 떨고 있으니 그렇게 추할 수가 없었다.

“…….”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연무장 위에서 홀로 창을 든 채 서늘한 시선을 내뿜는 악비산을 볼 수 있었다.

“대련 상대로 나올 이는 더 없는가. 나에게 패배한 것을 설욕하고 싶다면 다시 도전해도 상관없다.”

평소 같잖아 보이던 그 몸이 이젠 왜 이렇게 커 보이는지.

설욕하고 싶다면 다시 도전해도 상관없다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악인벽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제길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뿌옇던 정신이 돌아오자,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앞에 펼쳐졌다.

분명 악비산은 연초까지 자신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의 일합조차 받아내기 힘들어졌으니.

우연이라 치부하며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형제 다섯 명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들어왔다.

“쯧, 수련 상대도 되지 못하나.”

악비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까지는 그리도 의기양양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패배로 꼬리를 만 개보다 못한 패기를 보였으니 그저 한심할 따름이었다.

“악가의 이름이 우는구나. 그래놓고 지금껏 그리도 설치고 다녔는가.”

“…검절에게 무슨 가르침을 받은 것이냐. 설마 다른 무공을 익힌……?!”

누군가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추론을 꺼냈다.

그들 역시 정천 학관, 혹은 천무 학관에서 가르침을 사사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악비산이 주호 밑에서 총애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은바,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악비산에게는 코웃음이 나오는 말이었다.

주호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은 것은 맞지만, ‘아직은’ 악가의 무공 이외에 다른 것을 배운 적은 없었다.

“애초에 너희는 내 상대가 아니었을 따름이다.”

그는 제 창의 밑부분을 바닥에 강하게 내려찍으며 말했다.

“…….”

그 광오하기 짝이 없는 선포에도 불구하고 장내는 조용했다.

이미 다섯 명은 처참하게 패배를 겪어버린 후였고, 남은 셋 역시 쓰러진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명문 정파 특성상 체면에 신경 쓰기 마련. 구태여 나서서 벌주를 마시고 싶진 않기에 말을 아꼈다.

“그러면 나는 어떨까?”

“……!”

그리고 그런 침묵을 깨고, 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째 도련님!”

누군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는 담벼락의 위, 수려한 외모의 사내가 그곳에 걸터앉아 장내의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와중이었다.

“읏차.”

그는 이내 가볍게 몸을 날려 연무장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곤 제 허리 부근을 툭툭 털더니, 들고 있던 창을 어깨에 기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문의 위상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숙부(叔父)께서 돌아오셨다는데 내가 또 인사드리지 않을 수가 없지. 그렇지요?”

“…….”

악비산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악진양, 현 가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악가는 소가주, 후계 구도가 공고했다.

악진양 역시 옛적부터 그쪽은 마음을 접었고, 내키는 대로 살아오기를 계속했다.

좋게 말해 풍류 공자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한량이었으니.

하지만 지닌 실력은 진짜였다.

직계의 핏줄로부터 기인한 재능과 세상만사를 즐길 것 같은 그 가벼운 언행 뒤편에 있는 피나는 노력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고수 못지않은 빼어난 경지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세간에서는 그 분야의 신진 고수를 뜻하는 창절(槍絶)의 이름에 가장 가까운 이라 할 정도였으니.

다만, 악비산에게는 악가에서 받은 괴롭힘의 주된 요인 중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어떤가, 숙부 말대로 이런 시시껄렁한 이들보다 나와 싸우는 것이. 저는 제법 손맛을 느끼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반말과 존댓말이 섞인 말이었다.

명백히 조롱의 표현을 나타낸 것이었으나, 악비산은 짧게 숨을 토해냈다.

이전이라면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을 터다. 다른 이들과 달리 악진양과의 격차는 지닌 기량으로 메우기엔 제법 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수그릴 이유가 전혀 없었을 따름이었다.

“나쁘지 않지. 세 초식을 양보하마.”

배분으로만 따진다면 숙부인 악비산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현실은 여러 요소를 적용해야 하는바. 전대 가주의 서자인 그가 배분을 운운하기에는 그리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악비산은 지금의 상황이 더더욱 기꺼웠다.

평소 하지도 않던 오만한 표정으로 턱 끝을 까닥였고, 얼마든지 덤벼오라며 가슴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악진양의 이마 위로 시퍼런 힘줄이 불쑥 튀어나왔다.

악비산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이전부터 자신을 핍박하던 이들 따위야 어렵지 않게 꺾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제 처지를 잘 깨닫고 있기에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근래 들려오는 소문들은 거슬리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너무 나대지 못하도록 기를 찍어 눌러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하려 했다.

‘가문의 중진들이 모두 주목하고 있는 와중이라 적당히 손만 봐주려 했거늘, 스스로 벌주를 자초하다니.’

휘릭.

악진양은 등 뒤로 창을 돌리며 멋들어진 기수식을 취했다.

그 한 수만으로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뽐냈으나, 악비산의 표정은 이전과 다름없이 덤덤했을 따름이었다.

“…정말로 세 초식이나 양보할 생각인가?”

“원한다면 더 주지.”

마치 아량을 베푸는 듯한 대답에 악진양은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실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 앞에서 이리 당당할 수 있는 것인가.

“세 초식도 필요 없다. 한 초식으로 끝내주지.”

재능? 인정한다.

노력? 인정한다.

그런 반쪽짜리 무공으로 그 위치까지 올라간 것도 솔직히 대단했다.

하지만 절대로 자신과 견줄 수준은 아니었으니.

탁.

악진양의 발이 내디뎌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아!”

연무장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악가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경악을 토해냈다.

감히 자신들로는 따라갈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흡-!”

악진양이 행한 초식은 창술의 기본적인 형태인 분찰(奮擦)이었다.

떨치고(奮) 짓누르다(擦) 라는 이름처럼 그의 창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일말의 반항 따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는 공격이었다.

쿵-!

일격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창을 떨쳐내고, 창대로 그 몸을 짓누르는, 기본적인 형태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상대와의 격차를 적나라하게 보이는 수법이었으니.

“한 초식이라. 그렇다면 그리 알겠다.”

악비산은 여전히 침착한 눈으로 제 창을 들어 올렸다.

회전의 묘리로 자신의 창을 튕겨 내려 하는 수법은 이미 읽은 지 오래, 하지만 지금의 그는 고작 그런 수법에 당해줄 정도로 녹록치 않았다.

‘다른 이들의 공격이 훨씬 더 매서웠다.’

당천유의 암기는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은밀했고, 철대환의 보법은 아차 하는 순간에 지척까지 다다랐으며, 위천강의 검은 마치 끈적거리는 늪처럼 자신을 옭아맸다.

선우연의 검은 올곧기 그지없었고, 남궁연의 검이 펼치는 초식은 자신의 수준으로 따라잡기에 고절했으며, 천후의 도는 아직도 그 상대법을 찾지 못했을 만큼 패도 적이었다.

더욱이 눈앞에서 느껴지는 악진양의 투기는 주호의 것과 비교하자면 아이의 투정이나 다름없었으니 같잖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퉁-.

“윽?!”

악비산은 상대의 수법을 역이용했다.

이쪽을 튕겨내려던 기세를 이용해 오히려 상대의 창을 튕겨냈다.

다만, 한 초식을 봐주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에 악진양이 신음을 흘리며 허점을 노출했을 때, 악비산은 그저 내질렀던 창을 회수했을 따름이었다.

“이, 자식……!”

악진양의 눈이 뒤집혔다.

지금껏 만만히 보던 녀석에게 치욕을 당한 것과 더불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서린 분노였다.

그렇기에 튕겨 나간 창을 다잡고 이를 악물며 다시 달려들었지만, 악비산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분명 한 초식이면 충분하다 했었지.”

쿠웅-.

일순간 그의 기세가 반전했다.

수세(守勢)를 버리고 공세(攻勢)를 취하자 연무장 안으로 묵직한 존재감이 내려앉았다.

압도된 후기지수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그 앞에 선 악진양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꼈다.

‘위험하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단순히 이전처럼 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힘껏 내력을 끌어모았다.

파아앗-!

창끝으로 시퍼런 내기가 휘몰아친다. 눈에 뚜렷이 보일 정도로 선명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곧 허공을 가르며 악비산의 가슴으로 찔러졌다.

“흠.”

악비산의 대응은 침착했다.

정면으로 찍어 눌러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그간 주호에게 받은 가르침은 단순한 힘겨루기만이 아니었다.

휘릭-.

내지른 창대가 회전한다. 마치 뱀처럼 몸을 뒤틀더니, 이내 매서운 기세로 제 주인을 찔러오는 악진양의 창을 휘감았다.

“…무, 슨!”

동귀어진의 수라도 펼치겠다는 것인가.

악비산이 방어는 도외시한 초식을 펼치자 악진양은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켜보는 눈이 많다. 대련 간에 일어난 실수이니 큰 문책은 없을 터.’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힘껏 창을 내지르며 공세를 더했다.

어쭙잖은 기예라도 부리려 하는 것 같았지만, 악가의 창은 그런 잡술로 파훼하기에 그 깊이가 얕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각-.

“……!”

악비산의 창이 휘감으며 가한 압력에 악진양의 창대에 금이 갔다.

분명 자신의 내력으로 보호받고 있을 터인 그것에 균열이 생기자, 악진양의 두 눈이 흔들렸다.

믿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증거가 눈앞에 있다. 그렇기에 기겁하는 마음으로 창을 비틀었지만, 그것이 최대의 악수(惡手)였다.

콰직-!

창대가 부러져 나가며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 한다. 단 한 초식으로 상대의 창을 부숴 버린 악비산은 순식간에 악진양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자, 잠깐-!”

위기감을 느낀 악진양이 손을 내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악비산의 손이 그를 둘러싼 내기를 흐트러트리며 멱살을 움켜잡았다.

“난 누구처럼 옹졸하지 않다. 그러니 그간의 앙금은 이것으로 끝내지.”

휘릭-.

악진양은 세상이 회전하는 것을 느꼈다.

천지가 반전되고 이내 자신의 머리는 연무장 바닥을 향해갔으니.

쿵-.

곧 연무장 가운데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 조카를 냅다 바닥에 꽂아버린 악비산은 손을 툭툭 털어낸 뒤, 등에 창을 짊어졌다.

“재미 삼아 배운 초식인데 요긴하게 쓰는군.”

철대환과의 대련 중 배운 금나수 법의 일종으로 회축(回築)이라는 초식이었다.

상대를 제압하려는 목적으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초식이라기에 가볍게 익힌 것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

연무장에 우두커니 서 있던 후기지수들 사이로 믿을 수 없다는 경악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악비산은 그런 이들을 바라보더니 나중에 철대환에게 술이라도 한잔 사줘야겠다며 중얼거리곤 일말의 망설임 따위 섞이지 않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곳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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