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주호 일행과 헤어진 악비산은 천천히 말을 몰아 길을 나아갔다.
본가가 있는 산동악가까지 오는 여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 이틀 밤이 걸렸고, 이내 악가의 위상을 자랑하듯 기다랗게 이어진 벽 앞에 도달했다.
“…….”
말에서 내린 그는 고삐를 움켜쥔 채 천천히 악가의 주위를 맴돌았다.
사천을 떠날 때 산동으로 향하고 있다 서신을 보냈으니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정작 악비산 본인의 발걸음엔 주저함이 서렸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춰 섰다.
세간에선 세가 연합이니 명문 정파이니 하지만, 실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기예를 갈고 닦아 성장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끌어내리기를 더 잘하는 이들.
살아남기 위해, 올라가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는 데에 서슴없고, 비방, 헐뜯는 것 정도야 당연하게 여기는 후안무치한 자들의 집합.
시정잡배와 다른 점이라면 겉으로만은 점잖은 척을 떤다는 것이었다.
‘뭐, 그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이니.’
전대 가주의 서자라는 존재는 악가에 있어서도 크나큰 치부다. 그렇기에 그간은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강호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문이 그를 배척하는 만큼 그 역시 하루빨리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척.
악비산은 마음을 다잡고 악가의 정문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몇 번이고 시선을 마주쳤지만, 이때까지 그를 모른 척했던 문지기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가주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셨습니다.”
“…알겠네.”
악가를 비롯한 소위 명문 정파 같은 제힘에 자신이 있는 무림 문파들은 그 세력을 과시하려는 듯 낮 동안은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렇기에 악비산은 문지기가 한 발자국 물러나자, 천천히 그 경계의 너머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후욱.
코끝을 스쳐오는 답답함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학관 생활에 너무 젖어 있었구나.’
온갖 멸시와 핍박을 받았던 열아홉 해의 삶. 그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근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찰싹.
가볍게 뺨을 두들긴 악비산은 천천히 걸어나갔다.
이곳은 학관이 아니다. 그러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벌써 두고 온 친우들이 그리워졌지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니 꾹 눌러 참았다.
“…….”
악가 내부는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다.
순찰 중인 무인, 잡일을 위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하인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악가의 성씨를 지닌 이들까지.
악비산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우습기 짝이 없게도,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분위기는 그가 등을 보이자마자 반전되었으니.
“학관에 입관했다고 잘난 척하기는.”
“제가 뭐라도 된 줄 알았나 보지. 서자 주제에.”
“듣자 하니 줄을 잘 선 것 같네. 제 어미를 쏙 빼닮았군. 그년도 전대 가주님을 꿰어내지 않았는가.”
듣기 힘든 모욕과 멸시 어린 시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악비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행여나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까 싶어 행동거지에 신경을 집중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패배다. 이때껏 살아오면서 항상 그렇게 생각했기에 창을 짊어진 등과 내딛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렇게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들어갔다.
더 안쪽엔 가문의 대소사를 정하기 위해 모이는 대전이 있었다.
“이건…….”
학관으로 도망치듯 떠날 때는 가주 한 명, 그것도 촌각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대전에 자리한 기척은 적어도 십수 개가 넘었다.
악비산은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며 가주가 기다리고 있다는 대전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귓가에 들려왔다.
“왔느냐.”
“…….”
제일 상석에 자리한 가주를 비롯해 악가의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허허, 비산이의 신수가 훤해졌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학관에 가서 그리 갑작스럽게 두각을 드러낼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후기지수 중에서도 수위로 꼽힌다지. 악가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군.”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없는 존재 취급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제대로 한 사람의 취급을 해주고 있었다.
‘아니.’
악비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바뀐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그 변화의 주된 요소였다.
가까이는 화산의 소신룡이라 불리는 선우연부터, 당가의 직계인 당천유, 남궁세가의 검화 남궁연과 선발 대회의 일 순위를 차지한 천후 등등, 여러 유망한 후기지수가 근접해있지 않은가.
더욱이 현재 강호에 명성을 울리는 검절(劍絶)이 자신의 스승으로 있으니.
아무리 명문정파인 악가라지만, 아니 그런 악가이기에 세간의 이목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로 어떤 이득을 볼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악비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을 내뱉는 것으로 적당히 그들의 분위기에 어울려 주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어쩔 것이냐.”
수많은 이들의 대화 위로 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물음에 다들 입을 닫은 채 이목을 모은다. 현재 주가가 높아진 악비산의 거취에 관한 것은 가문 내에서도 제법 주목도가 높은 관심사였다.
“…이곳에서 잠시 여독을 푼 뒤, 주호 교관님의 본가인 하택 지방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휴관 기간 동안 가르침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가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정도 명성을 쌓았으니 세간에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보여야겠지. 네가 원한다면 본가의 절기를 가르쳐 주겠다.”
그 말에 악비산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밑바닥에서부터 가증스러운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악비산이 익힌 무공은 가문의 말단 무사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전부 어깨너머로 스스로 배워 익혀 가진 재능과 노력으로만 그 경지에 올랐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그토록 원했던 절기들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분노가 차올랐다.
“내 예전에도 몇 번 네 창술을 칭찬한 바가 있었지. 옛적부터 제대로 된 무공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문제없을 터.”
악비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제 형을 바라보았다.
그로선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창술에 대해 칭찬을 받았을 때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알량한 희망과 기대를 주어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수작인가. 아니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을까.
사흘 밤낮을 고민했던 적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그 속내가 훤히 보였을 따름이었다.
‘날 묶어 놓을 심사인가.’
악가라는 성씨, 그리고 혈연과 별 볼 일 없는 무공으로 관계를 묶어 두기에는 너무나 약한 연결 고리였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자신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 넣으려는 것일 터.
“…제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익힌 무공만으로 벅찰 것 같습니다.”
“음.”
담담한 악비산의 대답에 가주는 잠시간 침음성을 흘렸다.
“네 뜻이 그리하니 더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 이야기하도록.”
“따르겠습니다.”
그 뒤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얼마간 지속되다 자리가 끝났을 따름이었다.
대전을 뒤로한 악비산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익숙한 풍경을 따라 걸었다.
“…….”
악가의 전각은 대부분 그 위용을 자랑하듯 화려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 끝에 도달한 건물만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크기였다.
“…어머니, 아들이 왔습니다.”
소운(小雲)이라 불리는 작은 장원이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모친이 기거하는 방앞에 서서 말하자 안쪽으로부터 부산스러운 기척이 느껴졌다.
“오셨습니까.”
“항상 수고하십니다.”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옛적부터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수발을 들던 악가의 하녀였다.
“어머님은 어떠십니까.”
“항상 같으십니다. 언제까지고 도련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계셨죠.”
그 말에 악비산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러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왔니, 아가야.”
침상에 누운 여인이 어렴풋한 미소를 짓는다. 얼굴은 생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고, 눈은 이미 멀어버린 지 오래라 탁하기 그지없다.
악비산은 그런 제 어미를 볼 때마다 한결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련한 사람.’
무엇이 그리 욕심났기에 나이 많은 늙은이와 정분을 텄을까.
세간에서는 전대 가주와의 애틋한 이야기로 퍼져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들인 그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막 세력을 부풀리는 중소 문파의 딸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몸인 탓에 문파를 물려받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힘을 얻고 싶었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이 바로 악가의 전대 가주를 유혹한 것이었으니.
작은 문파를 넘어서 악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미 다음 후계자는 결정된 상황이었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기에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악가 내에서 악비산의 취급이 이러한 지경까지 떨어지게 된 것은 어머니 쪽의 지분이 가장 큰바.
어릴 적엔 원망도 했고, 증오도 했지만, 병상에 누워 얼마 남지 않은 명줄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니 그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내 이리 누워 있어도 듣는 귀가 있다. 학관 쪽에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잘 생각했다.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이 힘들면 외부로 시선을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계속 그렇게 움직여나가거라. 그렇게 무게를 쌓는다면 악가에서도 일각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야.”
초췌한 낯빛 가운데 이미 멀어버린 눈이 그를 향했다.
분명 그 시야에 보이는 것은 없을 터였지만, 악비산은 탁한 눈동자에 맺힌 숨길 수 없는 열망과 욕심의 불꽃을 볼 수 있었다.
“…….”
역겹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무서웠다.
‘어찌 이런 지경까지 이르러서 그런 것들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여기까지 이르렀기에 그런 것들밖에 보이지 않는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악비산은 그런 마음들을 모두 숨기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을 내뱉었다.
말싸움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그저 비위를 맞춰주며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위로해줄 뿐.
“쉬십시오. 아들은 잠시 방에 둘러보겠습니다.”
“그래, 아가야. 내 항상 너를 믿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끝까지 자신을 옭아매는 그 말에 진절머리를 토해내며 악비산은 방을 나왔다.
일 년 가까이 비웠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천천히 그곳을 바라보던 그는 답답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수련이라도 할까.”
오랜만에 돌아오는 고향이었건만,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렇기에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소운을 벗어나 공용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련만큼 잡념을 떨치기 좋은 것은 없었으니, 전신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창이라도 휘두를 심산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근래 명성이 자자한 악비산 대협 아니신가.”
연무장엔 선객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그를 신경 쓰는 일 없이 각자 할 일을 했을 터이지만, 동년배의 후기지수라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그 대부분이 옛적부터 시비를 걸기 좋아하는 악동(惡童)들이었으니.
“어때, 본가에서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옛날 추억도 할 겸 비무나 한 번 하는 것이?”
“…비무라.”
악비산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창을 풀어 손에 쥐었다.
어릴 적부터 시비가 걸려왔을 때 그는 고개를 굽히며, 그 불합리한 폭력에 순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무공의 경지가 얕았던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것은 익히지 못했지만, 어정쩡한 후기지수 한둘 정도는 충분히 찜쪄먹을 만한 힘과 실력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 내적의 일로 사려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설령 그들을 꺾는다고 하더라도 그 뒷감당을 홀로 받아낼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따름이었으니.
“일일이 상대해주기 귀찮으니 한 번에 들어오너라.”
받은 가르침을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제자의 도리. 그렇기에 악비산은 씩 웃으며 창끝을 까딱였다.
“버러지 같은 것들.”
물론 청출어람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