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주호와 남사일이 화산을 떠났을 때, 후기지수들 또한 그 사정을 전해 들었다.
대부분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부디 그 둘이 무사히 자소단을 얻고 돌아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잘 풀리면 좋겠는데…….”
하지만 선우연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가?”
“그것이 말이네.”
위천강의 물음에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장로님께서 십오 년이 넘도록 화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일은 유명한 사실이지. 세간에서는 그분께 방랑벽이 있어서 그런 줄 아나, 실상은 조금 다르네.”
“다르다?”
“나 역시 전해 들은 것이지만, 위쪽과 마찰이 있다고 하네. 주로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회 쪽이겠지.”
“흔히 있는 이야기로군.”
“이번 휴관 기간에도 역시 사문으로 돌아오라 내 쪽을 통해 서신이 내려왔네. 적힌 것으로는 이것이 마지막 통첩이고 만약 응하지 않을 시 직접 잡으러 오겠다는 서슬 퍼런 이야기도 있었지.”
“…하지만 교관님께선 함께 사천으로 오시지 않았는가.”
철대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선우연 역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런 사정 때문에 사천으로 향한다고 했지만, 사문에서는 허울 좋은 핑계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다시 화산으로 간다면…….”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걱정하지 말게. 교관님이 함께 가셨는데 뭔 일이야 있겠는가.”
보다 못한 악비산은 입을 열어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하려 했으나, 그것이 무색해지게 남궁연이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호 교관님은 얼핏 본다면 냉정하고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주변을 모두 초토화시키셨죠.”
“음…….”
그 말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 그렇지 않았는가.
오히려 그 자신이 더 큰 폭풍이 되어 주변을 휩쓸어버리기에 십상이었으니 걱정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럴 무력도 충분히 지니고 계시니…….”
선우연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악비산이 네가 그러면 어쩌냐는 표정을 지었다.
“화산이지 않은가. 설마 무슨 소란이 있겠는가. 남교관님도 현명하신 분이니 잘 처리하시겠지.”
“그러리라 믿을 수밖에 없겠군.”
선우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며칠 뒤, 주호와 남사일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자소단을 얻었는지 그들 역시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서둘러 밖을 나가니 이전보다 초췌해진 행색으로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들과 마주쳤다.
“교…….”
남궁연은 반가운 얼굴에 주호를 부르려 했으나, 이내 그 눈빛에 말을 멈췄다.
흘러가는 상황이 제법 심각한 듯싶었다.
그렇기에 잠자코 기다렸고, 이내 당소혜가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다행이로군. 교관님이 나섰으니 당연히 될 줄 알았다네.”
“축하드려요, 당공자. 그간 고생 많이 하셨을 텐데.”
소식을 전한 당천유에 모두가 축하를 전했다.
“이제 무공 수련 빼먹지 말라고.”
그 무뚝뚝한 악비산 역시 긴장했었는지 호쾌한 웃음과 함께 제 친우의 등을 펑펑 때려왔다.
“…다들, 정말 고맙군.”
당천유는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체면이 있는지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제 쌓였던 고민이 전부 해소된바. 그렇기에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사천 관광에 나섰다.
당정학은 당연히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모든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고, 하려는 일들을 모두 최고급으로 처리해 부족함이 없도록 말 그대로 성심을 다했다.
그리고 이틀 후의 새벽.
“…정말로 가려는가. 며칠 더 있지 않고.”
당정학은 아쉬운 얼굴로 정문에 선 주호의 손을 붙잡았다.
“저도 더 있고 싶지만, 애초에 예정이 있었습니다. 목적이 잘 해결되었으니 그만 떠나도 되겠지요.”
“…그런가. 당가는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을 걸세. 언제든 찾아와도 환영할 것이고, 언제든 요청한다면 두 손 두 발을 벗고 자네를 도우러 갈 것이라네.”
당정학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했다.
주호 역시 감사히 받아들이겠다며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그 옆에 있던 남사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나머지 이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할 것까지야 있나. 전부 제 앞가림을 잘할 아이들이거늘.”
요 이틀간 그들은 충분한 휴식을 즐겼다.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볼거리까지 모두 빠지지 않았으니 부족한 것이 없었다.
다만, 주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개인적인 일인바. 괜히 꼬리를 달고 우르르 몰려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남교관님.”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게.”
그렇기에 동행하는 것은 가볍게 포권을 올리며 인사하는 남궁연과 같은 산동에 본가를 두고 있는 악비산 뿐이었다.
“학관에서 봅시다, 남궁 소저. 비산 자네도 잘 다녀오게.”
“남궁 소저. 조심히 가시오!”
다른 후기지수들도 전부 시원섭섭한 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몇 달 뒤에 학관에서 다시 볼 사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헤어진다는 것에 아쉬운 표정들이었다.
“출발하지.”
그들은 당가에서 마련해준 마차에 탑승했다.
모두가 배웅하는 가운데 당가를 떠났고, 이내 저 멀리 한 점이 되었을 때 창문을 닫았다.
“후.”
주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한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애초에 그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다.
그렇기에 바퀴의 달그락 소리, 마차를 이끄는 말의 발굽 소리만이 들려오는 내부의 적막함은 제법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었다.
“참. 비산, 너는 본가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었나.”
“예. 어차피 얼굴도장만 찍고 올 겁니다. 늦어 봐야 이레가 걸리겠군요.”
갔다 오는 시간을 고려하면 하루도 본가에 머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얼굴도장만 찍고 올 심산이 가득한 그 표정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슬슬 오실 때가 되셨군.’
악비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생각이 백호에게 미쳤다.
천우희의 말로는 부상 회복 후 이곳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던 것이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로, 슬슬 그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비산. 내가 전에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느냐?”
“전에 했던 이야기 말입니까? 아, 혹시 그 건이라면…….”
악비산의 두 눈이 빛났다.
주호는 이미 옛적에 언질을 두었다. 백호가 도착했다고 해서 다짜고짜 데려간다면 악비산으로서도 당혹스러울 터니 이미 충분한 밑밥을 깔아 놓은 지 오래였다.
-더 강해지고 싶은가.
이미 주호의 강함에 매료된 악비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걸리는 것은 산동악가라는 그의 출신이었으나, 정작 그 본인은 주호의 우려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저는 악가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이 쌓아올린 무력 역시 저 혼자만의 피와 땀을 흘려 얻어낸 것이지요. 그러니 그들이 감히 저에게 무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쉬이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악비산의 각오는 충분히 확인했다.
‘만약 그가 제대로 된 악가의 무공을 전수받았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겠지만.’
악비산은 서자(庶子)였다.
무림에 있어 서자란 존재는 그리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특히 재능이 있는 이들을 양자로 삼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서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대 가주의 서자라는 것이 크나큰 문제였다.
현 가주의 서자였다면 지닌 무재(武才)를 인정받아 악가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로 우뚝 섰을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한 대를 건너뛴 서자의 존재는 악가에서도 터부시되는 일이었다.
배분으로만 따지자면 현 가주의 형제로 그 아비인 전대 가주가 현역으로 있을 때는 그리 큰 화제로 대두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대 가주가 사망했고, 현 가주가 그 자리를 물려받으며 대두되었으니, 악비산은 순식간에 악가 내에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눈에 띄는 차별은 없었다.
명문 정파답게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압력은 존재했다.
비록 서자라 할지라도 악가의 직계인바. 그렇기에 지엄한 가문의 규율에 따라 그 역시 악가창법을 익혀야 했다.
하지만 압력은 바로 그런 부분에서 그 불합리한 효력을 발휘했다.
악비산이 익힌 내가기공과 창법은 전부 알맹이가 쏙 빠진 열화판이었다.
세가의 말단이나 혹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이 익힐 만한 것으로 절대 직계에게 줄 법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악비산은 그 불합리함에 대해 성토할 수 없었다.
지켜보는 눈은 수십 개였고, 조금이라도 반향을 드러낸다면 쑤셔올 가시가 수백 개는 되었다.
그러니 그 뒤부터는 묵묵히 노력할 뿐인, 고난의 연속이었다.
부족한 무공은 어깨너머로 훔쳐 배우고, 엿들으며 그 구멍을 메워나갔다.
때때로 그를 불쌍히 여겨 다가온 이들에게 호의를 받았거나, 혹은 그 노력을 가상하고 갸륵히 여긴 이들의 동정을 받았다.
물론 그것을 제외한 대부분은 온갖 멸시와 경멸이었으니.
하지만 악비산은 절대 좌절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노력하는 것마저 포기한다면, 자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니까.
뼈를 깎아 근육을 채워 넣었고, 살을 잘라 부족함을 더했다.
이윽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은 채 당당히 악가를 나왔다.
그 뒤엔 친우인 당천유의 도움으로 정천학관에 입관 신청을 했고, 당당히 시험에 합격함으로 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나는 더 높이 올라갈 거다.’
옛적부터 악비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집착과도 같은 본능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이 허울뿐인 성씨 따위는 떼어내 버릴 각오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내친김에 주씨 성으로 개명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악비산의 농에 주호는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리 머지않아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교관님 옆에 철썩 붙어서 기다리겠습니다.”
***
마차가 산동에 도착했다.
악비산은 사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본가에 들리기 위하여 떠난바. 곧바로 다시 돌아오겠노라며 고하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오롯이 둘만 있게 되었네요.”
남궁연은 조금 기쁜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이제 주호의 고향인 하택 지방까지 하루거리에 도달했다.
조금 무리를 한다면 늦은 새벽까지 도착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러할 필요는 없으니 그 앞의 도시인 허단(墟團)에서 하룻밤을 쉬어가기로 했다.
“내일 일찍 출발할 것이니 푹 쉬도록. 나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볼일이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주호가 밖으로 나서려 하자 남궁연이 눈을 빛내며 따라붙었다.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동생의 생일이 얼마 전이었다. 서신으로는 축하했다만,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니 이런 것이라도 준비해야겠지.”
“…그런가요. 복 많은 동생이네요. 이런 오라버니도 있고.”
들뜬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던 남궁연은 살짝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녀의 오라버니는 비동혈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바. 이제는 먼 과거가 되었지만, 그리운 것은 그리운 것이었다.
탓.
남궁연은 우울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주호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
주호는 움찔하며 슬쩍 멀어지려 했지만, 남궁연은 개의치 않으며 더 강한 손길로 그의 팔을 붙잡곤 밖을 가리켰다.
“얼른 가봐요. 저도 하나 챙겨주게.”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서로 일면식이 없지는 않지만, 스치듯 지나갔던 사이가 아닌가.
대화 한 번 해본 적도 없는데 선물을 받기엔 미안한 감정이 있어 고개를 저었으나, 남궁연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주호를 잡아끌었다.
‘점수를 딸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찾아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의 신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