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주호와 남사일은 화산을 빠져나왔다.
행여나 정신을 차린 조원일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뒤쫓아올까 싶어 한참을 내달렸고, 화산을 벗어난 뒤에야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골랐다.
“…미안하네. 나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어.”
“아닙니다. 덕분에 자소단을 얻을 수 있었으니 남는 장사이지요.”
자조 어린 남사일의 말에 주호는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발목을 잡힌 것을 제외하면 자소단을 비롯한 온갖 약재와 영약을 얻고, 또 매화검객이나 되는 고수와 본격적으로 손속을 겨뤄볼 경험을 얻지 않았던가.
청룡신공의 경지가 오른 만큼 아직 여러모로 미숙한 부분이 많았다.
그 상황에서 비슷한 경지의 고수와의 비무는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든 자소단을 손에 넣었으니 되었어.”
“…그나저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주호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화산의 장문인이라는 것은 쉬이 말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품에 있는 자소단을 당소혜의 치료에 사용하게 되면 장문인 자리는 정말로 물 건너가게 되는바.
누구는 목숨을 걸고 쟁취하고 싶어 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그것을 거론하자 남사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애초에 뜻이 없었을 따름이라고. 그리고 설령 장문인의 자리에 뜻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 이름이 하나의 생명보다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네.”
“…그렇습니까.”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올곧은 눈빛에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그 역시 얼마간 강호 생활을 하며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남사일처럼 남을 위해 기꺼이 제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니, 그저 존경이 들 뿐이었다.
“이거 참. 생색내려 한 것은 아니지만 쑥스럽군. 하여튼 얼른 서두르세. 언제 저들의 마음을 바꾸어 쫓아올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화산의 고수는 매화검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문인이 마음만 먹으면 그 휘하의 수많은 이들이 추격해올 터니 서두르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사흘 후.
주호와 남사일은 화산으로 향할 때보다 더 가벼운 몸으로 사천을 향했다.
당소혜의 상태가 어찌 되었을지 모르기에 최소한의 쉬는 시간만을 가진 채 발걸음을 재촉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한나절 더 이르게 당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돌아왔다고?!”
주호와 남사일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정학은 헐레벌떡 정문으로 뛰어나왔다.
“…아.”
근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퀭한 얼굴이었다.
눈 밑은 거뭇거뭇하며 입술은 잘게 떨렸고 호흡은 가쁘기 그지없었다.
무공을 수련하는 중이었다면 주화입마의 전조인 심마(心魔)가 끼었다고 의심해볼 수준으로 그간 마음고생을 많이 한 듯싶었다.
“이,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행히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아…….”
남사일이 품에서 목함을 꺼내며 말하자 당천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말로 감사하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것이야.”
그는 주호와 남사일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꾸벅였다.
주호는 슬하에 자식이 없기에 그의 심정을 온전히 공감하진 못했다.
하지만 동생인 주예향이 만약 같은 상황에 닥쳤더라면 아마 당정학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어렴풋이 상상했을 뿐이었다.
“감사보단 치료부터 먼저 서두르지요.”
“그렇지. 내 생각이 짧았네.”
주호의 말에 당적학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들은 다시 내원의 심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관님?”
그때, 주호와 남사일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남궁연을 필두로 한 후기지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알겠습니다.”
그들 역시 사정을 아는 것인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
이윽고 주호는 다시 당소혜의 앞에 당도했다.
익숙한 약재의 향이 코끝을 스침에 그는 상태창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자네가 독기를 몰아내 준 뒤로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네. 아직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당정학은 이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말해왔다.
확실히 당소혜의 상태는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전신이 무형지독에 잠식당했을 땐 마치 살아있는 목내이를 보는 듯했지만, 이젠 조금씩 피부가 생기를 회복했고 푸른 혈관도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서두르길 잘했군.’
하지만 주호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 더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무형지독의 독기는 다시 슬금슬금 뻗어 나와 전신을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가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든 말 만하게.”
“일단 가부좌의 자세를 해야 합니다.”
“음.”
그들은 당소혜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뼈와 근육 모두 많이 손상된 상태라 그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당소혜의 몸이 가부좌를 틀었을 때,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께선 계속 그 자세를 유지하게 해주십시오.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겠네.”
주호는 남사일에게서 받아든 목함을 열었다.
그러자 곧 청아한 향이 방안에 내려앉았고, 비단에 감싸인 자소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
주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당소혜의 입을 열었다. 그러곤 자소단을 넣고 목의 근육과 혈도를 움직여 그것을 삼키게 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부탁하네.”
당소혜를 치료하는 방법은 임독양맥을 타동하는 것이었다.
이미 이 신체에는 무형지독이 골수까지 찌들어 있는바. 그러한 종류의 변화가 아니라면 완벽하게 몰아내기 어려웠다.
‘후…….’
주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물론 그 자신도 무황의 비동에서 환골탈태를 하면서 임독양맥의 타동을 겪었다.
하지만 남에게는 처음 해주는 것이었기에 살짝 긴장되는 마음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천유.”
“예.”
주호는 한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당천유를 불렀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바. 주호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많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될 것이다. 손을 잡아주거라.”
“…예.”
당천유는 조심스럽게 제 동생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머지는 자신의 손에 달렸을 따름이었다.
핏핏핏핏-.
주호의 손가락이 튕기며 여러 줄기의 지풍을 쏘아 보냈다.
임독양맥.
서로가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형태였다.
인중의 바로 밑과 입술 끝자락의 경계부터 시작해 목 그리고 가슴을 건너 단전의 밑을 지나 회음혈까지 이르는 경맥을 임맥이라 했다.
독맥은 그와 반대로 회음혈로부터 시작되어 등허리 척추를 타고 올라 백회를 지나 임맥이 시작된 입술의 경계까지를 칭했으니.
임독양맥을 타동하는 것은 흔히 생사현관을 지났다고 할 정도로 비약적인 일이었다.
웅웅-.
자소단의 기운이 식도에서부터 내려와 그 중앙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단아하고 청아한 기운이 퍼져나가며 메마른 대지를 적시듯 피폐해진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무형지독은 눈치를 보았다.
이전까지 당소혜의 몸을 좀먹고 있던 녀석은 청룡기(靑龍氣)에 밀려 제 세력을 대부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니 구석에 회복할 틈을 노리고 있었고, 갑작스럽게 들어온 자소단의 기운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주호는 두 손을 내밀어 당소혜의 단전에 제 기운을 불어넣었다.
웅웅웅-.
위에서 내려오는 자소단의 기운과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주호의 청룡기가 서로를 끌어당겼다.
자소단의 기운은 세맥 곳곳으로 퍼지며 몸을 회복시켰고, 주호는 그 틈을 타 골수에 찌들어 있는 무형지독을 정화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순한 독이었다면 그것으로 결말을 맞이했으리라.
하지만 무형지독은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울컥-.
가부좌를 튼 당소혜의 몸이 들썩이며 그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
당정학은 물론이고 당천유까지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음 같아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운기를 하는 주호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숨소리조차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
다행인 것은 뿜어져 나온 피가 사혈(死血)이라는 것이었다.
몸 안쪽에 뭉쳐 있던 죽은피와 함께 독소가 뿜어져 나왔으니 그 본인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일 것이 분명했다.
“후우…….”
주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손을 떼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당가에 돌아왔을 때가 분명 정오였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해가 뉘엿뉘엿 지며 샛노란 석양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몇 시진이나 지났나.’
그만큼 무형지독과의 싸움은 치열한 사투였다.
“어떻게, 어떻게 되었는가?”
당정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에 주호는 손을 들어 당소혜의 손등을 가볍게 그었다.
지이익-.
갈라진 피부 거죽을 따라 시커먼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
보통의 새빨간 선혈이 나올 때까지 그것을 쥐어짠 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끝났다는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무형지독은 전부 정화했습니다. 다만, 이때까지 쌓인 찌꺼기나 탁기도 상당 부분 이것으로 제거했지만, 아무래도 몸을 조금 더 회복한 뒤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자소단이라는 희대의 영약을 복용했으니 금세 회복할 수 있겠지요.”
자소단의 칠할 정도 되는 기운이 신체의 회복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래도 남은 삼할이 있으니 적어도 십 년 정도의 내공은 얻을 수 있을 터.
지금까지 몇 년이나 사경을 헤맨 대가로는 조금 부족한 것 같지만, 기연이라면 기연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사천당문이지 않은가.
무형지독에 절어있던 상태인지라 이제 어지간한 독에 저항력이 생겼다.
몸을 전부 회복만 한다면 그간의 공백을 메우고도 남을 잠재력을 지니게 되리라.
“고맙네, 고마워.”
“정말, 감사합니다.”
당정학과 당천유는 연신 감사를 표해왔다.
성심껏 보답하리라며 굳게 손을 다잡았고, 이내 서로를 보며 눈물을 훔쳤다.
“잘 됐군.”
한쪽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남사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탓에 피로가 쌓여 있었기에 살짝 지친 얼굴이었으나, 일이 잘 해결되어 미소를 지어왔다.
“…아!”
누워있던 당소혜의 눈이 실낱같이 뜨인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당정학이었다.
그는 잔상이 남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침상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곤 축 늘어진 제 딸의 손을 붙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혜야, 정신이 드느냐.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사천을 대표하는 문파의 가주라고 할 수 없는 절실한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주호는 부모는 어디나 다 똑같노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게. 천금같이 얻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당정학은 곧 사람을 불러 약재와 영약들을 준비하게 했다.
제 역할을 끝낸 주호와 남사일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사천당문의 이름값이 있는 만큼 피폐해진 당소혜가 정상으로 회복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터.
‘내년에 신입생으로 만나겠군.’
그날이 제법 기대되는 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