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주호는 가라앉은 두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필시 좋은 의도로 길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리라. 실제로 그들 사이에선 자신을 향한 들끓는 전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 사숙. 어찌하여 앞길을 막은 것입니까.”
“앞길을 막다니. 우리는 그저 근래 강호에 명성이 높은 신진 고수와 교류를 하고 싶은 것이라네.”
“…….”
남사일의 낯빛이 굳었다.
당연히 허울 좋은 핑계였다. 어느 누가 교류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길목을 막고 이런 흉흉한 기세를 보인단 말인가.
그는 무의식적으로 제품에 있는 목함을 만지작거렸다.
‘설마 스승님 때처럼 우리의 목적을 알고?’
사천당가에서 자소단을 요청한 것은 조원일 역시 알고 있을 터. 그러니 자신들이 화산에 방문한 것에서부터 유추하여 그 목적을 파악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과 달리 조원일은 사뭇 정중한 모습으로 포권을 올렸다.
“경황 중에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소. 매화검수의 수장으로 검절(劍絶)을 맞이하게 되어 기쁜바. 괜찮다면 한 수 선보이시어 제자들에게 개안할 기회를 주시지 않겠소?”
태도는 정중했지만, 거절은 용납지 않겠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사숙. 저희도 그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아쉽게도 일이 바빠서 말입니다. 나중에 시간을 다시 내서 올 테니 지금은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쪽은 한시가 급한 와중이었다.
그 사정까지 이해해달라고 할 순 없었지만, 바라지 않는 비무까지 청해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 오래 붙잡진 않을 것이네. 말한 대로 서로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니. …그리고 무려 십오 년 만에 돌아와 놓고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서 오겠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이야기더냐?
조원일의 눈빛은 싸늘했다.
깃든 내색은 당장에라도 그 목덜미를 잡아다가 수련동에 처박아 넣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지 못하니 참고 있다고 말해오는 것 같았다.
“…….”
주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보는 이목이 이렇게도 많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보통이었다면 후일을 기약했을 터다. 검절의 위명이니 정천의 교관으로서의 명예니 하는 것은 그다지 상관없었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자소단을 사천당가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자신을 순순히 놓아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됐습니다, 남교관님.”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제 의사를 피력했다.
“…….”
그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는 남사일의 이가 갈렸다.
언제부터 화산이 이런 식으로 보복적인 행동을 했던가.
겉으로는 명문 정파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결국엔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 그 허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작태였다.
그렇기에 남사일은 사문을 떠났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강호를 떠돌았고, 끝내는 자신을 원하는 수많은 문파의 손길을 거부한 채 후학의 양성을 돕기 위해 정천학관에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무려 십오 년 만의 귀환이 아니던가. 하지만 변함없이 뻔뻔하고 후안무치하기 그지없는 조원일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분명 장문인의 명령이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개인을 향한 부조리한 핍박이자 폭거이지 않은가. 화산의 정예라는 백매화의 고수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나올 법했지만, 그들은 당연하단 얼굴로 이 앞을 가로막으며 방관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무림의 말학이 화산의 검을 견식하고자 합니다.”
남사일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 사이, 주호는 담담한 표정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매화검객은 배분으로만 따져도 까마득한 우위에 있다. 그렇기에 짐짓 정중한 모습으로 가르침을 청했지만, 그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예사 것이 아니었다.
‘속전속결로 끝낸다.’
말처럼 가르침이니 뭐니 들을 생각은 없었다.
가능하다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누르고 싶었으나, 상대는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 중 하나이다.
어찌 본다면 이전에 싸웠던 청혈도제 사마천이나 은영혈귀대주 단목우현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 있었다.
척.
둘은 서로 마주 섰다.
폭풍 전야와도 같은 고요함이 그사이에 내려앉자, 주위에 있던 이들은 모두 거리를 둔 채 훌쩍 물러났다.
“부디 좋은 비무가 되길 바라네.”
“…노력하지요.”
옅은 미소가 서린 그의 말에 주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전력을 낸다면 이 구역이 초토화될 것이다. 그러니 잠정적으로 어느 정도의 손속을 두자고 합의한 것과 같았다.
스릉-.
신검(神劍)이 뽑혀 나와 세상에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조원일은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으나, 신검이 발하는 심상치 않은 기운과 서늘한 예기에 두 눈을 빛냈다.
“예사로운 검이 아니로군.”
주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옅은 미소만을 머금었다.
주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옅은 미소만을 머금었다.
조원일은 그 무언(無言)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과연, 검절(劍絶)이기에 검조차 평범하지 않다는 것인가.”
스릉-.
조원일이 제 검을 뽑아 드는 것으로 둘 사이에 진중한 기세가 내려앉았다.
“이전과는 다를 터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것이네.”
선공을 양보한다느니 같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주호를 향한 경고를 내뱉음과 동시에 조원일의 검이 허공에 유려하게 휘둘러졌다.
화산의 절기인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단초가 그 끝에서 펼쳐졌으니, 주호 역시 청룡검법의 잠운(潛雲)으로 그것을 맞이했다.
“…허어.”
한옆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남사일은 무심코 새어 나오는 감탄을 막을 수 없었다.
시작은 비록 불합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둘은 마치 옛적에 짠 것처럼 함께 어울리며 검무(劍舞)를 추고 있었다.
감탄한 것은 남사일 뿐만이 아니었다.
소란에 이끌려 나온 화산의 제자들 역시 각자의 경지에서 볼 수 있는 시선으로 둘의 경합을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쿵-.
산들바람 같던 분위기가 반전한 것은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전반 열두 초식 그리고 청룡검법의 칠 초식이 전부 끝난 순간이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은 그 이름 그대로 스물네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바, 그것을 열두 개로 나누어 전반과 후반 초식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 진가는 후반 초식에 있었다.
전반 열두 초식은 꽃봉오리의 개화(開花)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것이었다.
매화검법의 요지는 그 향에 있었으니, 꽃봉오리가 개화한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매화검법의 시작이었다.
“매화점점(梅花漸漸)-.”
순백의 백매화를 품은 봉오리가 허공에 점점 번져나간다. 일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그것은 활짝 피어올랐고, 이내 절정에 이르렀다.
“…아.”
코끝을 스치는 진한 매화 향에 누군가 황홀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계절은 이미 추계에 접어들어 그 이파리가 전부 시들어 있었지만, 이곳엔 활짝 피어난 매화꽃에서 풍겨 나온 향이 가득할 따름이었다.
“현검-.”
주호 역시 검을 다잡았다.
이전에 청룡검식을 꺼냈던 것은 매화검법의 절초인 매화만리향에 대항해서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후반 열두 초식 중 첫 번째 초식이 나왔거늘 자신 역시 절초인 청룡검식의 초식을 꺼내 들어야 했다.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쿠우웅-.
무거운 압력이 사방을 짓눌렀다.
무른 땅은 움푹 파여 들었고, 흘러가는 바람조차 발목을 붙잡혀 가라앉았다.
조원일의 매화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만개한 꽃에서 흩날리던 꽃잎은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바람을 타고 흐르던 매화 향은 그 자리에 맴돌 뿐이었다.
“…….”
조원일의 얼굴이 굳었다.
서로 손속을 제한했다곤 하나 그 속에 펼친 무리(武理)는 제 전심을 다해 펼쳐낸 것이었다.
상대의 초식이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낮거나 부족함을 보인다면 여지없이 매화 향이 그 틈새를 파고들 터.
하지만 작금의 현실을 보아라. 오히려 자신의 검이 밀리고 있지 않은가.
‘어찌 저 나이에 저런…….’
이순(耳順)에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무공에 매진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약관을 넘어선 젊은 청년과 동수를 이루고 있다는 현실에 조원일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기에 검을 다잡았고, 그렇기에 망설임을 저버렸다.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검 위로 이제껏과 비교할 수 없는 기운이 깃들었다.
순백의 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옅은 자색의 강기가 그 위에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파아아앗-!
매화의 봉오리가 만개(滿開)했다.
은은히 내려앉던 매화향에 선명함이 깃들었고, 주위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그 농밀함에 취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주호는 짐짓 인상을 찌푸렸다.
비무나 대련의 성격으로 칭할 수준을 넘은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 본인은 싸움에 취해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바. 자신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 익숙지 않지만…….”
이십사수 매화검법에 후반 열두 초식이 진가를 발휘하듯, 청룡검식 역시 후반 칠 초식이 있었다.
말했듯 아직 미숙하기 그지없지만, 지금 단계에서 주호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청혈도제의 초식을 와해시키고 그 목숨을 앗아간 첫 번째 초식뿐이었으니.
“만검(滿劍).”
매화 향이 세상 가득 채워나가는 가운데, 휘몰아치던 주호의 기세가 정돈되었다.
신검을 몸 중앙으로 끌어당긴다. 균형의 중심을 가슴에 놓고, 왼손으로 검신을 집은 채 그 끝을 왼쪽 등 뒤로 향했다.
청룡검식(靑龍劍式)
만검(萬劍), 경계의 검
그간의 수련에서 거둔 성과 덕분일까, 이전처럼 막대한 내공이 소모되진 않았다.
더는 몸을 비틀거리는 일도 없었고, 현기증이 올라오지도 않았다.
오로지 두 눈에 시퍼런 귀화를 피워 올리며, 제 영역을 응시했을 뿐이었다.
“…….”
그 기세를 정면에서 받은 조원일은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루어 말하기 힘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치 거대한 벽을 마주한 듯한 그 막막함이었지만, 조원일은 그것을 부정하며 이를 악물었다.
‘화산의 검은, 중원의 제일이다.’
정신을 올곧게 세웠다.
마음(心)을 정립하고, 몸(身)을 가다듬었다.
무공의 가장 근간이 되는 심기체가 서로 균형을 이루면, 그것이야말로 경지를 이루는 것이니.
샤아악-!
하지만 그 각오가 부질없게도 조원일의 강기는 주호의 곁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소멸했다.
“……!”
조원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하나, 둘, 열,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수십 개의 매화 잎이 흩날리며 주호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 여지없이 끝에서부터 형태를 잃어버리며 허공으로 스러졌다.
“…쾌검?”
두 눈에 내공을 끌어올려 안력을 집중한 조원일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얼핏 보면 그저 허공에 녹아드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체는 몇 번이고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베이는 것이었다.
자신 정도의 고수가 집중해야 겨우 볼 수 있는 고절한 수법. 하지만 주호의 검은 언제까지나 같은 자세로 그곳에 자리했을 뿐이었다.
“…….”
조원일은 입술이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강하게 깨물었다.
두 번째였다.
또 자신의 절초가 깨어져 나갔다.
하지만 수많은 이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단순히 개인의 자존심 이전에 이렇게 맥없이 물러날 순 없었다.
이십사수 매화검법은 자하신공을 제외한 화산의 최고 절기. 그러니 그것이 꺾이는 것은 자하신공 이외에는 없어야 하는 일이었다.
절그럭.
조원일은 검을 다잡았다.
매화만리향은 만개한 매화꽃이 그 향을 천하에 널리 퍼트리는 것을 요지로 삼은 초식이었다.
그렇기에 그전까지의 스물세 초식이 필요한바. 즉, 여력이 허락하는 한 언제까지고 그 향을 풍겨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더는 향을 풍기는 것을 포기한 채, 그 꽃잎을 전부 흩날린다면.
단 한 순간이지만, 떨어져 내리는 매화의 꽃잎들은 스물네 개의 어느 초식보다 강한 위력을 선보였다.
“산화(散花)-.”
죽음을 선고하는 조원일의 말에 매화가 시들었다.
꽃이 저물고 수십, 수백에 달하는 잎이 떨어져 내린다. 자신의 존재를 바탕으로 펼쳐내는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스물다섯 번째 초식이었다.
“꽃잎으로 이루어진 만천화우라. 운치가 없진 않구나.”
그 모습을 올려다본 주호는 나지막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상대는 너무 성급했다.
제 본질을 버린 검법 따위는 사도(邪道)에 지나지 않았으니, 더는 매화검법이라 부르기에도 얕은 것이었다.
‘하늘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휘말리지도 않을 테니 말이지.’
주호는 검을 거두어들였다.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것은 조금 전까지 매화 향이 가득했던 하늘인바. 청룡의 운명을 품은 그로선 더없이 익숙한 정경이었다.
웅웅-.
가볍게 회전한 신검 위로 파멸적인 기운이 깃들었다.
이때까지 주호가 발한 초식이 흐름과 순리를 따랐다면, 지금은 그저 날 선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청룡신공 멸천(滅天)
쿠구구구구궁-.
눈앞의 모든 것을 멸하며 승천하는, 청룡의 몸부림이 하늘을 향해 펼쳐졌다.
떨어져 내리는 꽃잎 따위는 그 단단한 비늘을 꿰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날카로움에 찢겨 나갔다.
뒤이어 하늘 높은지 모르고 솟아있던 매화의 뿌리를 짓이겼고, 기둥을 뽑았으며, 가지를 분질렀으니.
“…아아.”
곳곳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더러 심약한 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멍하니 그것을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
조원일 역시 낭패 서린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이미 선(線)을 한참이나 넘었다.
여기서 더 했다간 정말로 목숨을 주고받는 생사결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이긴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었다.
절그럭.
먼저 검을 거둔 것은 주호였다.
그 역시 여기서 더 비무를 이어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바. 그렇기에 매무새를 정돈하고 조원일을 비롯한 그 주위에 있는 화산의 무인들에게 가볍게 포권을 올리며 말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직설적인 비아냥도, 돌려 말하는 은유도 없었다. 그저 담백한 인사와 함께 비무를 끝냈을 따름이었다.
“…아, 사숙.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호의 시선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남사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말했다.
“그럼 이만.”
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화산을 벗어났으니, 더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