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남사일은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옛적부터 스승을 속일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약이 올라 골탕 먹일 준비를 하면 마치 자신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던 것처럼 유유히 흘려넘기며 조소를 지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줄 알았다.
십오 년 만의 갑작스러운 귀환이었기에 자신에게 신경이 쏠려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차를 내오라는 말에 얼씨구나 싶어 물을 끓이며 뒷마당으로 달려갔지만, 그곳에 고이 묻혀 있어야 할 자소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수십 년간 내버려 두신 것 아닙니까. 어찌 지금에서야…….”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보관해둔 것이었다. 자소단의 이름이 그리 가벼운 줄 알았더냐.”
선청우는 코웃음을 흘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
주호는 말없이 그 둘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생각보다 크게 틀어져 버렸다. 화산의 안쪽으로 들어온다면 자소단을 얻을 수 있다는 대전제로 실행된 계획이었지만, 선청우가 그것을 내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무력으로는, 어려울 것 같군.’
이전에 보았던 조원일이라면 어떻게든 승부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화검선은 격을 달리하는 수준의 고수. 아직 주호의 경지로선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한 생명이 피어나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응당 사람이라면 동정을 품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네가 지나온 길에 지키지 못한 사람이 몇 명이더냐. 수십? 수백? 아니 그보다 더 많겠지. 허면 그들의 죽음에는 어찌 그리 발 벗고 뛰어나지 않았느냐?”
“어리석었고, 우매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으려 합니다.”
“우답(愚答)이로다. 네놈 주제에 그러할 자격과 능력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알량한 공적으로 세간에서 매화선풍검이란 별호로 불리니 그 마음에 헛된 공명심이라도 들었는가?”
“그리하면 스승님께서는 제가 남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제 몸 하나조차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우매한 녀석이 남을 걱정한다는 행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한 치의 물러남이 없는 문답이었다.
다만, 주호는 선청우의 말에서 무언가 의미심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자소단을 가져다 사용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으로 귀결될 다른 결과를 우려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곧 적중했다.
“…정녕, 장문인의 자리에 뜻이 없는 것이냐.”
“외인(外人)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 제 스승이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남사일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장문인 말씀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 말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청우는 잠시 주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세간에서의 자소단은 그저 신단이라 불리는 영약일 뿐이다. 갖가지 질병을 없애주고, 신체를 강건하게 하며, 막대한 내공을 한 번에 얻게 해주지. 하지만 화산에서 자소단이 갖는 의미는 단 한 가지뿐이다.”
장문인, 혹은 그에 따르는 이에게만 허락되는 자격.
“자하신공을 위한 것이지.”
자하신공(紫霞神功).
화산의 최고 절기로 오직 장문인과 그 계승자만이 익힐 수 있다는 신공이었다.
보통의 내가기공은 유년기에 이루어지지만, 자하신공은 이미 한 사람으로서의 무인으로 완성 단계에 이르러 새로이 수련하게 되었다.
물론, 이미 타기(他氣)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 새로운 내가기공을 익히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자소단이었다.
장문인의 계승자는 자소단의 기운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내공을 자하신공의 기운으로 바꾸는 것으로 그 적법한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 자소단은 십칠 년 전 네가 화산 회의에서 다음 대의 장문인으로 내정되며 스승인 내가 맡아 놓은 것이다. 무슨 이야긴지 알겠느냐.”
즉, 자소단이 없어지면 장문인 자리의 계승 자격을 박탈당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화산의 외부자인 주호가 생각하기에도 심상치 않은 폭풍이 몰아칠 것이 자명해 보이는 일이었다.
‘설마 그런 것을 알고도…….’
주호는 남사일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 모든 것을 알고도 그는 자소단을 가져오려 했던 것인가.
“이미 옛적에 말씀해주셨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 것쯤이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정에는 변함이 없다고?”
“예.”
남사일의 대답에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선청우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당장은 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보이는구나. 하지만 자소단은 줄 수 없는 노릇이야. 당가의 여식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화산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그런……!”
남사일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찰나, 선청우는 고개를 돌려 가늘어진 눈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근래 화산은 여러 일로 인해 소란스럽다. 그 와중에 네가 이런 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면 또 시끌시끌해지겠지.”
매몰찬 축객령(祝客令)이었다.
남사일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미안하네, 이런 상황이 되어서.”
“아닙니다. 다른 방법을 갈구해봐야지요.”
하지만 선청우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소단은 아니 되지만, 당가주에겐 빚이 있었지. 네놈이 천둥벌거숭이같이 세상을 돌아다닐 때 크게 도움을 받지 않았더냐. 제자의 빚은 스승의 것과 같으니. 적함의 두 번째 서랍을 찾아보아라. 내 긴히 쓰던 약재 몇 개가 있으니 나름대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지요.”
선청우는 곧 방을 나갔다.
자리에 남은 남사일만이 떠나간 제 스승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으니.
“…남교관님. 혹시 매화검선의 말씀은…….”
“그래. 그런 것이겠지.”
남사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면에 있던 적함으로 다가갔다.
위아래로 있는 다섯 개의 서랍 중 두 번째 서랍의 고리를 잡고 당기자 새하얀 천에 둘러싸인 약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주호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가 떠나며 내뱉은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내심 이곳에 자소단을 놓아두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다.
하지만 서랍 안에 있던 것은 정말로 약재뿐이었으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내 스승님은 정말로 부끄러움 쟁이네 게다가, 솔직하지 못한 분이시네.”
“예?”
남사일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가 반문했을 찰나, 그는 손을 들어 첫 번째 서랍의 고리를 잡아당겼다.
“…이건,”
자색 목함이 그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사일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지며 그 뚜껑을 열자, 비단에 감싸인 자색의 단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소단.”
상태창에 떠오르는 내용을 보니 자소단이 틀림없는 바. 주호는 막연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남사일은 잠시간 그것을 지켜보더니 이내 목함의 뚜껑을 닫았다.
“…나는 옛적부터 심술 맞은 제자였네. 이 작은 화산이 갑갑했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어. 그랬기에 스승님께 투정도 많이 부렸고, 이것이 갖고 싶다, 뭐가 하고 싶다 조르곤 했지.”
“그러셨습니까.”
주호는 그 이야기에 살짝 놀랐다.
매화선풍검이라 함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두각을 보인 기재가 아닌가. 그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기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그때마다 나를 엄하게 혼내셨지. 순간의 욕망에 흔들리면 결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노라 말이야. 그 이후에 밤이 되어 홀로 방 안에서 훌쩍거리고 있노라면 밤중에 몰래 들어오셔서 머리맡에 당과니, 인형이니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놓아주고 가셨지.”
추억에 잠긴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목함을 품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이번 일로 큰 반향이 일어나겠지.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네. 눈앞의 아픈 사람 한 명 구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협(俠)의고 무엇의 의(義)인가.”
“설령 장문인의 계승 자격이 박탈당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자네만 있어서 말하는 건데, 솔직히 나는 장문인이 되기 싫었어. 갑갑하지 않은가. 그 허여멀건 수염만 쓰다듬으며 이곳에 처박혀 있기엔 내게 세상은 너무 넓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해오는 남사일의 모습에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 역시 가문을 잇기 싫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강호로 뛰쳐나오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남사일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참, 다른 서랍도 보아야지.”
“자소단은 챙겼지 않습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심술궂은 제자였다고. 원래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네. 이렇게까지 제자의 마음을 졸이게 했으면 스승님께서도 그 업보를 받으셔야지.”
곧 남사일과 주호는 적함의 서랍뿐만 아니라 방안의 모든 서랍을 뒤졌다.
그러자 거의 수십 개는 될 법한 약재와 영약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에, 나이가 많아질수록 욕심도 많아진다니. 세상 귀한 건 혼자 다 쟁여놓고 계셨군.”
“이렇게 굵은 산삼은 처음 봅니다. 과연 화산이로군요.”
남사일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산삼의 굵은 뿌리 몇 가닥을 찢었다. 그러곤 그 일부를 주호에게 내밀며 자신 역시 입에 물었다.
“받게. 웃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화산의 산삼이라네.”
그렇게 말하면서 방안에서 찾아낸 약재와 영약을 모두 챙겨 들었다. 혼자 들기엔 너무 많기에 주호 역시 나눠 받았지만, 우려 섞인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괜찮겠습니까?”
“자소단을 훔쳐 가는데 이런 잔잔바리들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리고 방금 보았다시피 스승님께선 아직 정정하시네. 반평생을 이렇게 기운이 좋은 곳에서 보내셨으니 품고 계신 내공이 몇 갑자겠는가. 어차피 놔두면 흙으로 돌아갈 것들 좋은 곳에 쓰이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겠지.”
궤변도 이런 궤변이 따로 없었기에 주호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이제 그들은 화산에 온 목적을 완수한바. 그렇기에 초가집을 나와 다시 당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남사일은 아련한 눈빛으로 제 사문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살아갈 장소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은 화산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자소단을 가져가는 것도, 장문인의 자리를 내팽개치는 것도 정도(定道)는 아니지만, 모두 순리라 여겼다.
“자, 서두르세. 그 아이의 상태가 어찌 될지 모르니.”
남사일은 마음 한구석에 있는 미련과 죄책감을 끊어내고자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기세는 그들이 화산을 벗어나기도 전, 일단의 무리에 의해 멈춰지고 말았다.
“…조사숙.”
매화검수장 매화검객 조원일.
그리고 그 휘하 매화검수 백매단(白梅團) 일백(一百).
화산의 최고 정예 조직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