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주호는 옅게 숨을 토해내었다.
단 한 번이었다.
노인은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그와 조원일의 기세를 와해시켜버렸다.
“…사형.”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매화검수의 장인 것을 떠나 화산 전체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니 그 행실을 바로 하라고.”
“허나, 장문인의 명이었습니다.”
“장문인의 명이라면 그릇된 일도 감수하겠다는 뜻이더냐.”
노인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을 짓누르는 서슬 퍼런 기세는 조원일은 물론이고 주호까지 기겁할 만한 것이었다.
“대답하라.”
그 손끝이 가볍게 들렸다.
검이나 창이 들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 어느 날붙이보다 더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며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
조원일은 이를 악물었다.
들고 있던 검 역시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움켜쥐더니, 이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힘을 풀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존명.”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멍하니 있던 매화검수들은 짜증이 잔뜩 서린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꼴은 구파일방의 거두인 화산을 대표하는 이들이라기엔 많이 부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흠.”
주호 역시 검을 거두었다.
신검을 검집에 넣고 고개를 들자, 조원일은 그들을 한 번 흘깃 바라보고는 망설임 없는 태도로 자리를 떠났다.
매화검수들 역시 꽁무니에 불이 붙은 것처럼 그 뒤를 따랐고, 곧 주위는 적막에 잠겼다.
“휴, 잘 끝나서 다행이군.”
옆쪽에서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남사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걸음에 그 지척에 이른 노인이 하늘 높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퍽-!
“……!”
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노인의 주먹이 남사일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바.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호가 입을 벌리며 당황을 토해낼 찰나,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처박힌 남사일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제자야. 장장 십오 년을 떠돌다가 겨우 돌아와 놓고는 제 스승에게 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느냐.”
“…컥, 컥!”
남사일은 필사적으로 바닥에서 제 머리를 빼내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노인은 오히려 그 위를 지그시 밟으며 남사일이 빠져나오는 것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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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선청우
별호: 매화검선
직업: 화산파 일장로
나이: 예순일곱
소속: 화산파
무공: 이십사수 매화검법
경지: 화경(二/十)
호감도: 中中
‘…매화검선.’
매화검선 선청우.
남사일의 스승으로 세월이 흘러 많이 퇴색되었지만, 현역 당시에는 매화선풍검보다 더 선풍적인 유명세를 자랑했던 고수였다.
지금은 화산의 일장로로 무공 수련에 열중인 장문인을 대신해 직무를 다하고 있다, 라고 알려져 있었다.
“자네가 근래 그 위명이 자자한 검절인가. 아직 젊은 나이에 대단하군.”
선청우는 처음으로 주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동자에 흥미가 일렁거리는 것을 보니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닌바. 주호가 내심 안도하고 있자니, 기어코 바닥에서 머리를 뽑아낸 남사일이 제 머리를 짓밟고 있는 발을 밀어냈다.
“제길,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제길?”
선청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사일은 제 말실수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절 어린애 취급을 하실 겁니까. 그것도 남이 보고 있는 와중에 이런 식이면, 제자의 체면이 서질 않지 않습니까!”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며 강하게 밀고 나갔다. 선청우는 그런 제자를 보며 잠깐 신음을 내뱉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오랜만에 만난 제자의 모습이 기꺼워 너무 친근한 모습을 보였구나. 그러면 화산의 일장로로서 맞이해주마.”
“큼, 앞으로 유념해주십시오.”
제 이야기가 잘 먹힌 것 같아 남사일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숨기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지만 선청우 역시 옅은 미소와 함께 제 손을 들어 올렸으니.
“그러면 제 직분을 망각하고, 십오 년 동안 사문에 들어오지 않은 것에 대한 죄질을 따져보아야겠군.”
“…예?”
“내 제자로서 훈계를 내린다면 그저 몇 대 쥐어박고 끝내겠지만, 화산의 장로로서 그 직분을 망각하고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은 다른 이야기지 않느냐.”
“애초에 화산에서 던져주듯이 준 직함이 아닙니까!”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요긴하게 써먹은 이름인 듯싶더구나.”
“이왕 손에 들어온 검을 휘두르지 않는 것은 낭비이지요.”
선청우는 말 한마디 지질 않는 제자의 뻔뻔스러운 모습 때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남사일이 어떠한 이유에서 사문을 등진 것인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는바. 그렇기에 더 이상의 말씨름은 그만둔 채 위쪽을 가리켰다.
“손님도 계시는데 이런 곳에서 계속 서 있기가 그렇군. 어서 올라가자꾸나.”
“그러지요. 화산이 어디 시정잡배도 아니고 다짜고짜 검을 빼 드는지.”
남사일은 툴툴거리며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 그들은 화산파로 향하는 길목에 올랐다.
주호는 원래 화산이라함은 가파른 산길을 생각했지만, 이곳은 산길인 것을 제외하면 잘 닦인 가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화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여러 곳이 있네. 이곳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을 위한 평로(平路)고 무인들이 가는 무로(武路)나 수련을 위한 행로(行路)는 다른 곳에 있지.”
“그렇습니까. 무공을 익히지 않는 이들도 화산에 드나드는 것이군요.”
“으레 그렇듯 화산에서도 여러 사업을 하지 않겠는가. 아무렴 사람이 사는 곳이니.”
오악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화산의 풍경은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일반적인 걸음으로 올라왔다면 시간이 오래 걸렸겠으나, 세 사람 다 절정을 뛰어넘은 경지였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화산파의 입구에 도달했다.
“들어가세.”
소란을 우려한 것인지 선청우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들을 발견한 화산파의 무인이 다가왔지만, 이내 그가 손을 휘젓자 고개를 꾸벅이며 물러나 다시 제자리를 지켰다.
“…….”
그 뒤에도 계속 비슷한 양상이었다.
십오 년 만에 돌아온 남사일의 복귀에 마주치는 이들마다 다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걸어오려 했다.
하지만 선청우는 그것을 용납지 않았고, 그 서슬 퍼런 기세에 다들 주춤하며 물러났을 뿐이었다.
“호오.”
주호로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유력 문파 중 그가 다녀간 곳은 남궁 세가뿐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말 그대로 세가(世家)로 무림맹과 그리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화산의 골조는 도가에서 유래한바. 그렇기에 남궁 세가의 세속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정숙하고 장엄한 모습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다 왔네. 저 앞이야.”
곧 그들이 도착한 곳은 화산의 심처, 그 갈래에서 뻗어져 나간 산골짜기 중 하나였다.
조금 더 안쪽으로 가니 가파른 절벽 위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신선이라도 살 것 같은 분위기이군요.”
주호는 나지막한 감탄을 흘렸다.
마치 신선도(神仙圖)를 그려 놓은 듯한 풍경이었다. 절벽 위의 초가집, 그리고 그 앞으로는 화산의 장대한 산맥이 자랑하며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화룡점정으론 저 중간엔 희뿌연 안개까지 끼어 신비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내 어릴 적의 모든 시간이 이곳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네. 하산하기 전까지는 이 산맥을 뛰어다니며 열심히 수련했지.”
남사일은 감회가 색다르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려 십오 년 만의 귀환이었다.
저 자신은 돌아오기 싫었다느니 툴툴거렸지만, 막상 고향을 눈앞에 두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움직인 듯싶었다.
“그래, 차 좀 내오너라. 오랜만에 제자 솜씨나 보자.”
“…오자마자 부려 먹기입니까.”
초가집에 도착하자 차를 내오라는 그 말에 남사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옛 향수를 느낀 것인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아간바. 주호는 선청우의 인도에 따라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외관은 초라하지만, 내부에 있을 건 다 있지. 어떠한가.”
그 말대로였다.
외관은 어디 청렴한 고승이 살 것같이 초라했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널찍한 크기에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확실히 매화검선(梅花劍仙)이란 이름에 잘 어울리는 곳 같습니다.”
“그렇지? 지금은 추기(秋期)가 지나가 이미 꽃이 다 저물었지만, 봄에 활짝 피어난 매화꽃이 뒤덮은 절경이 따로 없다네.”
“꼭 보고 싶군요.”
“내년 즈음에 시간이 된다면 제자 놈과 한 번 오게나. …그래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가.”
갑작스럽게 닥쳐온 질문이었다.
‘이것 때문에 남교관님께 차를 내오라 하신 건가.’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미 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원래는 사천에 있었는데, 남교관님께서 이곳까지 온 이상 사문에 들르고 싶다 하셨습니다. 다만, 혼자 가시는 것이 조금 그렇다고 하셔서 동행을 부탁해오시기에 따라나선 것이죠.”
“자네에게?”
“예. 저로서는 화산을 견식할 수 있는 기회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선청우는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남사일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려 십오 년 만의 제자가 손수 끓인 차입니다. 그리우셨지요?”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면 다행이렸다. 그간 세간에서 매화선풍검인지 흑풍검인지 추켜 받으며 이러할 일은 없었을 테니.”
“……?”
선청우와 남사일은 곧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그 모습은 이곳으로 올 때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었지만, 주호는 조금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언가 초조해하고 있다?’
제 스승에게 차를 건네주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은 이전과 같았다.
하지만 이전까지 여유가 넘치던 남사일의 눈동자에 어딘가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왜 돌아온 것이냐. 서신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서 당가에 가야 한다고 하더니.”
“…아무리 그래도 근처까지 왔는데 얼굴은 비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십오 년이나 등한시해놓고?”
“십육 년이 되기 전에 마음이 바뀌었나 봅니다.”
마찬가지로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대화였지만, 뭔가 다른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
선청우는 얼마간 눈을 감고 차의 향과 맛을 음미했다. 그러곤 천천히 그것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면 썩 녹슬지는 않았구나.”
“당연하지요. 제가 스승님 차만 이십 년이 넘게…….”
“그러면 뒷마당에 묻힌 자소단을 찾으러 온 것일 테지.”
“…….”
갑작스럽게 내뱉어진 말에 남사일과 주호 모두 숨이 멎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더욱이, 남사일은 제 스승이 자소단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을 것이리라 장담하지 않았던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래. 어쩐지 차를 내오라 할 때 발걸음이 가볍더구나. 그사이에 캐내려 했던 것이겠지.”
주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남사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갔을 땐 이미 사라진 상태였네. 이곳에 올라올 간 큰 이는 없으니 스승님께서 예측하신 것이겠지.”
“너는 언제까지고 내 손바닥 안에 있노라, 제자야.”
선청우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던지 씩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뻔하지 않으냐. 당가 쪽에 무슨 일이 있어 사문에 오지 못할 것 같다며 구구절절 이야기해놓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다니.”
“그렇다고 해도 자소단 때문이라고는…….”
“네가 날 보러 올 것 같지는 않으니, 대충 유력한 것을 꼽았을 뿐이다. 거기에 네가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지.”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좋으시겠습니다. 항상 제자를 이겨 먹으셔서.”
“네가 날 따라잡으려면 백 년은 멀었다. 그래서 자소단이 필요한 것은 당가의 그 여식 때문이겠지?”
“그런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남사일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당소혜의 일은 당가에서도 그 직계와 수발을 드는 이들밖에 모르는 비사라 했다.
가주가 철저히 입을 막아 외부로 이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금지했다고 했거늘.
“일전에 당가의 가주가 자소단을 얻을 수 있느냐 부탁해온 적이 있었다. 그러니 대충 사정은 알고 있지.”
“그렇다면…….”
남사일은 입술을 깨물며 제 스승을 바라보았다.
“안 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소단을 줄 순 없다.”
하지만 선청우의 말은 제자의 기대를 배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