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10화 (110/300)

#110화

“내게 인정을 받아라. 그리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그 말에 주호는 입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겨우 숨겼다.

‘정말로 귀신 같군.’

화산에 도달하기 하루 전.

목적지의 지척까지 이른 상태에서 그들은 마지막 노숙을 하던 중이었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슬슬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남사일은 주호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당가에 있을 땐 호언장담을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실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래. 스승님은 괜찮지만, 장문인은 날 고깝게 보는 면모가 있어서 말이지. 아마 이런저런 수작을 부려올 것이 분명해.”

“수작이라니, 설마 그렇게까지…….”

“나도 괜한 우려로 끝나면 좋겠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않은가.”

남사일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에 있을 때도 몇 번이고 올려다본 풍경이었다.

하지만 화산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어딘가 익숙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화산의 밑에는 방문객이나 관계자들이 묶는 마을이 있다네. 우리는 그곳으로 가서 하루 정도는 쉴 것이야.”

“곧바로 올라가지 않고 말입니까?”

“여유를 두고 하는 것이 낫네. 괜히 조급하게 움직였다간 저쪽에서 어떻게 해올지 예상하기 힘들어지거든.”

“그렇습니까.”

“하여튼. 첫날은 그곳에서 푹 쉬세. 둘째 날이 되면 내가 위쪽으로 연락을 보낼 걸세. 아마 그 전날에 이미 내가 마을에 도달한 이야기가 위쪽에 들어갔을 테니 한 시진 안쪽으로 사람을 보내올 테지.”

“그러면 마중 나온 사람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군요.”

“아니, 그들을 따라가면 안쪽으로 들어가기 힘들걸세. 잘해봐야 수련동에 갇히는 것으로 끝나겠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호의 물음에 남사일은 잠시간 생각에 잠긴다. 머릿속에서 대강 흘러가는 상황을 그려 유추해본 그는 이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누가 오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네. 뭐, 가장 유력한 건 조 사숙일 테지.”

“조 사숙이라면…….”

“매화 검객 조원일. 현 매화검수의 수장으로 들어본 적은 있겠지?”

“당연합니다. 한때 동경했었으니까요.”

“한때의 이야기라 다행이군. 워낙 꼬장꼬장하긴 한대,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야. 다혈질인 면모에 제가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성격인지라 잘만 구슬리면 이용하기 좋은 부류이니.”

그 말에 주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선 사문의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그 일면엔 조소가 담겨 있었다.

“조 사숙이 오면 내가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바람을 잡겠네. 그 이후에 이제 딱 자네의 존재를 부각하는 것이야. 사숙은 새로운 만남에서 시작되는 결투 같은 것을 좋아한다네. 아마 자네의 실력을 알아본다면 필시 손이 근질거리겠지.”

“그러면 장문인을 뵙는 조건으로 비무를 걸으라, 이 말입니까?”

“음.”

남사일은 살짝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이내 뺨을 긁으며 입을 열었다.

“장문인은 화산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한 핑계이네. 사실은 만날 필요가 전무해.”

“만나기 싫으신 것이군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네. 그분이 날 아니꼽게 여기는 것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니.”

“헌데, 그러면 자소단은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까?”

“자소단은 내 사부님의 거처에 있네. 그러니 그곳에 들어가면 전부 끝이야. 위치는 기억하고 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걸세.”

“…그.”

“아, 뒷감당 괜찮겠냐고? 어차피 먹지도 않는 것이야. 확인도 하지 않을 테니 괜찮아. 아마 향후 십 년 안쪽으로는 없어진 것도 모르시겠지.”

주호는 작게 헛웃음을 토해냈다.

화산의 장로가 할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 덕분에 자소단을 얻게 되어 다행이었다.

“요지는 이걸세. 자네가 조 사숙과 비무로 적당한 무위를 보인 다음 인정을 받아야 하네. 그러면 장문인을 만난다는 핑계로 그 심처에 들어선 뒤, 내가 스승님의 거처로 들어가 자소단을 빼내오면 그것으로 끝이네.”

“그리 어렵지는 않군요.”

“사숙은 화산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수이네. 방심하면 안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음.”

남사일은 잠시간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곤 퍼뜩 떠올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대화는 일절 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세하게나.”

“…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것에 남사일은 구체적으로 예시까지 들어 설명해주었다.

“화산에 대해서, 누가 데리러 올 것인지, 매화검수에 관해. 다 그곳에서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행동하세.”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마을 도처에 그들의 귀와 눈이 깔렸네. 화산에는 간사한 자가 많아. 괜한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다.”

‘화산에 간사한 자가 많다니.’

자기 사문에 대고 할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화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한바. 하지만 남사일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끝냈다.

“…….”

여러모로 미심쩍은 요소가 많았지만, 주호는 그리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자소단 하나뿐, 그것만 얻으면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주호는 객잔의 안에서 조원일과 대치하고 있었다.

객잔의 주인 및 다른 손님들은 싸움에 익숙한 것인지 모두 음식을 들고 밖에 나가거나 자리를 옮긴 상태.

심지어 그 장본인인 남사일조차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한쪽 벽으로 물러난 와중이었다.

“…이 안에서 하면 주위가 휘말리지 않겠습니까?”

“화산의 일일세. 이들도 다 이해해줄 것이야. 건물이야 나중에 충분히 보상해주면 그만이지.”

“상당히 과격하신 말씀이군요.”

“화산의 일을 최우선으로 따질 뿐일세.”

주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말은 좋았지만, 어찌 되었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 또한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 아닌가.

‘사파와 다를 것이 없군.’

남사일이 사문을 나온 이유가 이러한 맥락이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스릉-.

주호는 이제 거리낄 것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상대가 저렇게까지 말해오는데 구태여 그들을 배려해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

슬쩍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에 있던 매화검수 중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척을 헤아리니 근처에 있던 이들이 휘말리지 않게 대피시키려고 하는 것일 터.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었으나, 오히려 이쪽의 족쇄를 풀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타닷-!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그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조원일에게 달려들었다.

눈부신 강기가 신검 위로 피어오른다. 하지만 조원일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해일과 같은 기세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켰다.

콰아아앙-!

언제 빼 들었는지 모를 검이 자신에게로 쇄도하던 공격을 막아냈다.

코앞에서 검을 맞댄 채 주호와 마주 보던 조원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검절이라 불릴 만은 하구나. 허나.”

쉬이이이익-!

조원일의 검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마치 한 자루의 검이 여러 개로 분열되듯 나뉘었고, 그 모든 방위에서 주호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산검(散劍)인가.’

환검(幻劍)과 더불어 화산의 정수를 담고 있는 묘리였다.

얼핏 보면 전부 허초로 보이지만, 그 하나하나가 어느 것보다 위험한 살초였으니 함부로 경시하다가는 큰코다칠 우려가 있었다.

“…….”

하지만 주호는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그것을 간파해냈다.

청혈도제와의 싸움 이후 그 역시 한 단계 성장한바. 이제는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콰아아앙-!

대신 애꿎은 객잔이 비명을 질렀다.

원래 있던 탁자나 의자는 이미 풍비박산이 나지 오래. 객잔 건물 자체도 이제 일합을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흠.”

주호는 가라앉은 눈으로 조원일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기세가 활화산과도 같았다면, 지금은 마치 고승의 득도한 깨달음처럼 깊고 고요한 흐름으로 주변을 뒤덮었다.

‘천변무쌍한 변화.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롭구나.’

선우연이 성장해 경지에 도달한다면 저러한 고수가 되는 것일까.

분명 조원일과의 경지는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검에 서린 기세는 제법 성가셔 보였다.

“이것까지 막아내면 내 인정하마.”

조원일은 제 검을 높게 들었다.

그 위에 서린 강기가 빛을 발하고, 이내 짙은 매화 향이 그를 중심으로 풍겨와 주호의 코끝을 간질였다.

‘이십사수 매화검법.’

주호는 그가 펼치려는 무공이 무엇인지 단 한 번에 꿰뚫어 보았다.

이미 일전에 선우연을 상대하며 수십 번은 봐왔던 검법이 아니던가.

특히 지금 사용하려는 초식은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절초인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이었다.

파아아앗-!

향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그의 검에서 솟구친 강기가 사방을 휩쓸었다.

주위는 일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과감한 손속. 하지만 주호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현검-.”

청룡검식(靑龍劍式)

현검(絃劍), 흐름의 검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진 초식의 발출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뿜어진 막대한 압력이 사방을 집어삼켰고, 곧 조원일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화향조차 일그러뜨리며 그 기세를 와해시켰다.

“…….”

조원일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깃들었다.

설마 자신의 기세가 밀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인정을 받으라, 인가.”

주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본인을 쓰러뜨려 승복을 받아낸다면 그보다 더한 인정이 어디 있겠는가.

쿠구구구궁-.

현검의 기세에 객잔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주호와 조원일만이 오롯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흡-!”

조원일은 다시금 검을 다잡았다.

현검의 기세에 억눌려 꺼져가던 매화만리향의 초식이 다시금 발현되었고, 이내 사방을 청아한 매화 향기로 뒤덮어 갔으니.

쿠웅-.

서로의 기운이 부딪쳐 공진이 발생했다.

그 주위를 지키고 있던 매화 검수 중 상대적으로 경지가 얕은 이들은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갈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이래도 인정받지 못한 겁니까.”

주호는 나지막한 소리로 고했다.

지금 보인 무위만 해도 어지간한 고수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원일은 기세를 거두지 않은 채 자신의 검을 더더욱 높이 들어 올렸다.

“그만들 하여라. 대체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이냐.”

“……!”

둘의 기세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마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인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팽팽히 맞부딪치던 공진이 깨어져 나가며, 그 사이로 누군가 끼어들었으니.

“쯧쯧쯧. 또 싸움에 눈이 멀어 주변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인상을 찌푸린 채 한탄스럽다는 듯 노성을 토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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