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동이 터오는 새벽.
주호와 남사일은 화산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비공식적인 행사이기에 다른 이들은 부르지 않은바. 오직 당정학만이 세가의 정문에서 그들을 배웅해주었다.
“…자네에게는 예전부터 신세를 지는군.”
“언제 제 신세를 지셨다고 그러십니까. 십 년 전에 마인들의 함정에서 저를 구해주시고, 오갈 곳이 없었던 저를 거두어 주신 빚을 지금에서야 갚는 것인데.”
당정학이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표하자, 남사일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때의 자넨 너무 천방지축이긴 했지. 내가 아니면 누가 자넬 거두었을까.”
“그러니 그때 이자까지 합쳐서 후하게 갚는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당정학은 옆에 있던 주호를 바라보았다.
“…뭐라 감사를 표할 길이 없네. 마음 같아선 사위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이미 배필이 있는 몸이라 들었네. 정말 아쉽기 짝이 없군. 원한다면 당가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도 있는 터인데…….”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주호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배필은 없었다. 그리고 당가의 일원이 될 마음은 더더욱 없었으니.
“만일 저희가 예정 보다 늦는다면 어떻게든 현상만 유지해주십시오. 아무리 늦어도 하루 이틀 내에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믿고 기다리겠네.”
당정학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선 그가 직접 화산에 찾아가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남사일이 말하는 대로 화산이 쉽사리 자소단을 내줄 리가 없을뿐더러, 가주인 그가 움직인다면 정치적인 이유로 해석할 것이 분명했기에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면.”
주호와 남사일은 지체할 것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사일의 장담대로 예정된 시간 안에 자소단만 얻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강행군이 될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이보게, 날 누구라 생각하는가.”
남사일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역시 절정에 이른 무인인바. 그렇기에 주호는 망설이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파바바밧-!
장기간 오래 움직이는 것을 생각한다면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좋으나, 지금은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공을 아끼지 않으며 땅을 박찼고, 일보가 내디뎌질 때마다 수십 장씩 허공을 격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일까.
본디 말을 갈아타며 이동해도 열흘은 족히 걸릴 거리를, 무려 나흘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이 오악(五岳) 중 한 곳인 서쪽의 화산(華山).”
주호는 눈앞에 펼쳐진 장엄한 풍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깎아내린 듯 가파른 산맥 위로 구파일방의 수좌 격인 화산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만 아니라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푹 쉬세.”
담우양이 기진맥진한 얼굴로 말했다.
당가에서 온갖 영약을 먹으며 기력을 충전했던 주호는 나흘 동안 내공을 펑펑 써대며 달려왔어도 그리 힘든 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속도를 맞춰야 하는 남사일로서는 그야말로 고역이 따로 없었다.
자존심이 있어 우는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화산의 밑에 자리한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침상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긴 수면과 운기조식으로 다시 원기를 회복한 남사일은 화산의 청구를 통해 자신이 돌아왔노라며 연락을 보냈다.
머지않아 화산파에서 사람이 내려와 자신을 맞이하러 올 터.
하지만 막상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부터 왜인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로 잡으러 내려오진 않겠지?’
일신의 사정으로 사천당가에 간다며 선우연을 통해 답신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 엉덩이가 무거운 노인네 두 명이 설마 진짜로 자신을 잡으러 오리라 생각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스스로의 발로 화산의 앞까지 찾아오지 않았는가.
“왜 그러십니까?”
“그냥, 조금 싱숭생숭해서 그러네.”
무려 십오 년간 돌아가지 않았던 사문이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했지만, 설마 이런 형태로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묘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내 스승님께서 이번 휴관 때에 사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직접 날 잡으러 오신다고 하셨네. 정말로 그러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직접 두 발로 돌아왔으니 화가 풀리셨겠지?”
“음…….”
그 말에 주호는 애매한 침음성을 흘렸다.
남사일의 사정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무려 십오 년간이나 사문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무언가 이유가 있었다고 예상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설마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를 그리 박하게 대하겠습니까.”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각오는 하고 있게. 내가 이래봬도 화산의 장로이니 매화 검수들이 마중을 나올 터인데, 붉은 무복을 입은 홍매화면 괜찮으나, 하얀 무복을 입은 백매화면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터니.”
“차이가 있는 겁니까?”
“매화 검수라고 해서 모두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가 아니라네. 이제 막 매화 검수가 된 제일 밑의 계급을 청매화, 그리고 어느 정도 숙련된 이들을 홍매화, 백매화에 이르러선 그야말로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들이라 할 수 있지. 모두 오십 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그들 한명 한명이 전부 초일류에서 절정에 달하는 고수들이라네.”
“흰색 무복 말입니까. 혹시 저들이……?”
“농담하지 말게나. 재미없네, 이 사람아.”
남사일은 손사래를 치며 주호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정말로 자신의 뒤편을 향해 있었으니.
“…….”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에 남사일의 얼굴이 굳었다.
척.
열 명.
드러난 것은 열 명이었다. 그들은 균일한 발걸음으로 이쪽 객잔에 들어오더니 이내 주호와 남사일 앞에 섰다.
“화산의 장로, 남사일.”
“…조 사숙님.”
그 부름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사일이 사숙이라 부를 만한 이는 현 매화 검수의 수장인 매화검객 조원일 뿐이었으니.
“장문인의 명으로 널 구속하겠다. 얌전히 따라오도록.”
“…예?”
오랜만의 해후를 풀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이야기에 남사일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십오 년 만에 보는 사질에게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런 살벌한 이야기입니까?”
“나는 오직 장문인의 명에 따른다. 남사일 장로. 네가 아직 화산을 사문이라 여기고 있다면 순순히 우리를 따르라.”
“…허, 참.”
대화가 일절 통하지 않는 꽉 막힌 태도였다.
슬쩍 주호를 한 번 바라본 남사일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들어나 봅시다. 이 어여쁜 사질을 묶어다가 어쩌실 생각입니까.”
“장문인은 수련동에 한 일 년쯤 가둬두라 하셨다. 그리하면 대충 정신을 차릴 테니 대화는 그다음에 하신다면서.”
“…본인은 정천 학관의 교관으로 적을 두고 있거늘, 그 길을 막겠다고?”
“장문인이 직접 학관에 사과하러 가신다고 하셨다.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허, 참.”
남사일은 그 말에 기가 찬 듯 허탈한 웃음밖에 내뱉었다.
“전할 이야기는 끝났다. 그리하면…….”
챙-!
조원일이 손을 들어 매화검수들에게 명령을 내릴 찰나, 그보다 더 빨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남사일이 검을 뽑아들었다.
“…지금 장문인의 명령을 거역하는 건가?”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진심인가 보군. 자네, 계획을 바꿔야겠네. 이대로 화산에 들어가 장문인과 직접 담판을 지어야겠어.”
“…알겠습니다.”
그 말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사일이 붙잡혀 정말로 수련동에 갇히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주호 본인은 화산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바. 갑작스럽게 쳐들어가 자소단을 내놓으라 한다면 최악의 경우 무림 공적으로까지 몰릴 수 있었다.
“흐음…….”
조원일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호를 바라봤다.
자신과 남사일 사이엔 메꿀 수 없는 경지의 차이가 있는바. 원래라면 만난 순간 제압을 해서 그대로 끌고 올라가려 했었다.
수련동에 일 년 운운한 것 역시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일 년까지 가진 않겠으나, 족히 몇 달은 면벽 수련을 하며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것을 참회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남사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젊은 청년 때문에 모두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청년은 누군가. 또 강호를 떠돌더니 기묘한 인연을 맺어 왔군.”
“근래 항간에 유명해진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검절(劍絶)이라고 말하면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검절? 검절 주호? 이 청년이?”
조원일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역시 검절에 대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는바.
고작 스물여섯의 나이에 내로라하는 고수들과 비교해 부족하지 않은 경지에 오른 검객이라 알려졌다.
‘하지만 이건…….’
으레 그렇듯 소문은 소문이라 여겼거늘, 과장된 소문조차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였다.
“무림의 말학이 매화 검객을 뵙습니다. 정천에 교관으로 적을 두고 있는 주호라 합니다. 긴한 일로 장문인을 찾아뵙고 싶은데,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직접 장문인께 이야기를 전해주지. 하지만 남사일은 내가 데려가겠다.”
조원일은 제 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항거할 수 없는 기세와 신묘한 변화가 손끝에서 휘몰아치며 남사일의 목을 붙잡아갔으니.
탁-.
하지만 그것은 제 목적을 다하지 못한 채 손등을 얻어맞으며 뿌리쳐졌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일신의 사정상 그리 여유가 없습니다. 가능한 대선배 되시는 분과 싸우고 싶진 않지만…….”
조원일은 헛웃음을 흘렸다.
먼저 의견을 피력한 것은 자신이었거늘, 어느새 이쪽의 공격을 막은 채 도리어 압박까지 가해왔다.
‘하지만 그 무공은 진짜이니.’
화산의 묘리는 환(幻)이며 산(散)이었다.
조원일은 방금 매화검법을 금나수로 펼친 것이었지만, 주호는 단 한 번의 직선으로 그 모든 변화를 파훼하며 깨뜨린 것이었다.
“…좋구나.”
조원일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매화검수의 장으로 화산을 지키고 있지만, 그 역시 태생이 무인인바.
피를 끓게 만드는 싸움은 싫어하지 않았다.
스릉-.
조원일은 오랜만에 흥분되는 마음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곤 그 끝을 주호에게 겨누며 말했으니.
“내게 인정을 받아라. 그리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니.”
그 말이 기꺼웠던 것은 오히려 주호와 남사일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