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가주…….”
사천당가의 가주씩이나 되는 인물이었다.
그가 주호 앞에 허리를 깊게 숙이며 진심 어린 사과하는 모습에 남사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마음 같아선 주호에게 한두 마디 부탁이라도 하고 싶지만, 독패의 이름을 걸고 내뱉은 말이었기에 외인(外人)인 그는 섣불리 개입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털썩.
하지만 당정학은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모자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달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도리와 인의를 저버리지 않는 선에서 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겠네. 제발, 제발 내 딸을 살려주게.”
“…아버지.”
당천유는 제 아버지를 원리 원칙에 입각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 이득은 오로지 가문을 위한 것이었으니, 가주라는 이름의 표본이 되는 존재라 보았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일어난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이때까지 평생 보아왔던 근엄한 언행과는 정반대였다.
주호 앞에 무릎까지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간절함을 호소하는 모습은 그의 마음을 울컥하게 했다.
“…교관님, 저도 부탁드립니다.”
당천유 역시 제 아비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그저 자비를 빌었다.
“…일어나시지요. 애초에 도우러 온 것입니다.”
주호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일절 없었다.
의심한 것이야 부모의 입장이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넘기려 했거늘. 갑작스럽게 무릎마저 꿇어오는 두 부자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 친구가 불편해하지 않습니까. 어여 일어나시지요.”
“…미안하네.”
당정학은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천유 역시 그 뒤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바.
“그러면, 바로 가지요.”
주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두 부자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이윽고 멈춰 선 곳은 내원에서도 제일 깊숙이 위치한 곳이었다.
“…….”
그 앞에 선 주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온 사방에 약재 향이 가득했다.
그것뿐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약재 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농밀한 죽음의 냄새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는 것이었다.
“들어오시게.”
두 명의 여인이 그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다.
당정학이 눈짓하자 그녀들은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고, 주호는 곧 침상에 누워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이건.’
당천유의 동생인 당소혜는 주호의 동생인 주예향과 같은 나이의 소녀였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난 목내이(木乃伊)를 보는 것 같았으니.
분명 간호를 소홀히 하지 않았을 터인데, 피부 밑으로 살은 하나도 없었고 앙상한 뼈마디만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소혜야.”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당천유가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이미 눈과 귀가 기능을 정지했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떻게라도 조금 더 숨을 붙여 놓는 것뿐이었어.”
“으흐흑…….”
당천유는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동생의 그러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당정학은 초췌해진 얼굴로 그런 아들의 어깨를 감싸더니, 이내 등을 다독거려주며 위로했다.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남사일은 참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하기엔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바. 아무리 독을 정화한다고 하여도 되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싶었다.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주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침상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상태창을 호출했다.
신상을 포함해 그 신체의 정보가 상세히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정말로 숨만 붙여 놓았구나.’
이상이 없는 곳이 없었다. 오히려 제 기능을 하는 부위를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그 전신에 시뻘건 신호가 떠올라 있었다.
“하루만 늦었어도 독기가 백회에 닿을 뻔했습니다.”
“…손쓸 도리가 있는가?”
“생각보다 상태가 너무 나빠서 정공법으로 치료하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원래 주호는 정상인 부위부터 살리며 치솟아 오른 독기를 제거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 소녀의 육신은 너무나도 미약했으니.
“그러면…….”
당천유가 절망스러운 얼굴로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호는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찍어 누르는 것이 안 된다면, 그 뿌리부터 뽑아버리면 그만입니다.”
“뿌리부터?”
“무형지독의 시작은 발끝입니다. 이미 장악한 곳들은 독의 관성으로 그 상태가 유지되는바. 독성이 절정으로 치달은 머리 쪽보단 차라리 다리부터 하는 것이 가능성이 있습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주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곧 푸른 불꽃이 그 위에서 일렁거리며 천천히 당소혜의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건, 생각보다.’
청룡신공의 정순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그 몸을 좀먹던 무형지독을 정화해나갔다.
하지만 무형지독은 무형지독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중독되었던 터라 마치 원래부터 이 육신과 하나였던 것처럼 동화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피폐한 몸에 강한 힘을 실어 독성을 제거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 부담이 누적되어 역풍을 맞을 위험도 있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소량의 기운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형지독의 독성을 제거해나가며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지켜보던 이들 역시 긴장에 긴장을 거듭했다.
숨소리 하나 내지 않으려 했고, 그저 부릅뜬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한 시진, 한나절,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가 되어서야 주호는 당소혜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동안 한 모금의 물조차 마시지 않고, 찰나의 시간 동안도 쉬지 않았던 그다.
심력 또한 상당히 소모했기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바. 그렇기에 손을 떼자마자 뒤로 물러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어떻게 되었는가.”
당천유는 이미 뻗은 지 오래였지만, 단 한시도 옆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당정학은 핏발선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당장의 고비는 넘겼습니다.”
“아아…….”
당정학은 비명인지 환희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그러곤 긴장이 탁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칠게 호흡을 내쉬었다.
“고맙네, 정말로 고마워.”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그 중심에 있는 독성을 제거하지 못하면 다시 전신에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것을 독성을 완벽히 제거할 수 있나?”
그 말에 다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당정학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기에 주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영약이 필요합니다.”
“영약이라면 많네. 얼마든지 가져다 쓰…….”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안 됩니다. 괜히 어설픈 것을 썼다가 독성이 그것을 흡수한다면 오히려 악재가 될 겁니다. 적어도 대환단이나 자소단 같은 신단 부류에 속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그 말에 당정학은 소리 없는 신음을 내뱉었다.
강호 무림에 신단이라 불리는 영약은 몇 없었다.
소림의 대환단, 화산의 자소단, 무당의 태청단.
모두 죽은 사람조차 살릴 수 있다는 효능을 지녔기에 신단(神丹)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각 문파는 신단의 유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간혹 어떤 계기로 그것들이 세간에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해당 문파에서 인원이 나와 그것을 회수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구파일방이나 세가 연합 급의 단체와 대적하고 싶어 하는 곳은 없기에 만일 거래가 된다고 하여도 아주 은밀한 곳에서 값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보름, 보름 안에 신단 급 영약을 먹여 마지막 승부수를 띄워야 합니다. 만일 그때까지 손을 쓰지 못한다면 독성은 다시 전신으로 퍼질 테고, 그때는 더 이상의 치료는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생과 사의 경계를 가르는 기한까지 십오일.
당정학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돈으로 구할 수만 있다면 제가 지닌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사올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할 수 없었으니 무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교류 대회의 자소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더라면.’
그만큼 교류 대회의 우승 상품으로 자소단이 내걸린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
간간이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온 남사일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네만, 나는 나름대로 화산의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다네. 이번에 사문에서 들어오라는 것 역시 그에 관한 회의를 하려는 것일 테지.”
“그러면…….”
“화산으로 가겠네. 그쪽의 요구를 수락할 테니 자소단을 달라고 한다면 주지 않고 배길 수가 있을까.”
사실 그리 쉽게 풀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남사일은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어차피 신단급 영약을 구할 수 있는 길은 그것밖에 없는바.
“나도 같이 가세. 내가 지원해준다면 조금 더 일이 수월해지겠지.”
당정학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서려 했다.
하지만 남사일은 냉정히 그것을 거절했다.
“가주께서 절 따라오신다면 장문인과 스승님은 절대 자소단을 내어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금지할뿐더러, 제 의지에 당문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실 테니 도리어 상황이 복잡해지겠지요.”
“…그러면.”
남사일은 가볍게 미소 지은 뒤, 벽에 기대 서 있던 주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 친구만 데리고 갔다 오겠습니다.”
“…예?”
주호는 기진맥진한 차였다.
당소혜의 몸을 좀먹은 무형지독을 제거하느라 심력과 기력 모두 상당한 양을 소모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바. 그것을 눈치챈 남사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세. 지금 당장 출발한다는 것은 아니야. 적어도 하루 정도 쉴 여유는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가주께선 준비해둔 영약을 이 친구에게 주시지요. 빨리 원기를 회복해서 화산에 다녀온다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로 준비하겠네.”
결정을 내릴 새도 없이 남사일의 주도로 진행된 일에 주호는 휘말려 버렸다.
그가 굳이 자신과 동행하려는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이렇게까지 말해오는데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주호는 당정학이 준비해준 영약을 모조리 섭취하고, 하룻동안 푹 쉰 끝에 전날 소모했던 기력과 심력을 모두 회복했다.
[내공의 양이 소폭 증가합니다.]
[내공의 양이 소폭 증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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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의 양이 소폭 증가합니다.]
도리어 기연이라면 기연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당정학 정도 되는 인물이 준비한 영약 역시 보통 수준은 아닌바. 그것들 모두 섭취한 주호는 적지 않은 내공을 추가로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사천으로 발품 판 값은 확실히 충당하고 남겠군.”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