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래서, 화산이 아니라 당가로 가겠다는 것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남사일은 침음성을 흘렸다.
원래는 주호와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과 화산을 방문하기로 결정되었던바.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들은 화산이 아니라 당가로 가겠다고 양해를 구해왔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쪽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기에.”
“기분이 상하기는, 괜찮네. 동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면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테니.”
마음에 걸리는 점은 이제 홀로 화산에 가야 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서신에는 그간의 공백을 묻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지만, 허울뿐인 둘러댐이 분명했다.
필시 화산으로 돌아가면 크게 곤욕을 치를 터. 그런 불상사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아니, 가만히 있어 보자.’
사천당가.
당가의 현 가주와는 작은 친분이 있었다.
매화선풍검이란 별호를 얻고 강호를 주유할 때 잠깐이나마 당가의 식객으로 머물렀던 적도 있지 않았는가.
“…험험. 그나저나 자네 혼자 후지기수들을 이끈다면 손이 부족하지 않겠나? 가뜩이나 마교의 습격으로 세상도 흉험한데.”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조금 걸리는 구석이 없잖아 있었지만, 자신이 동행한다고 하면 그들로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리라.
그렇기에 슬쩍 말문을 트자 주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괜찮으시다면 동행을 부탁드리려 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흉흉하니까요.”
“물론, 내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그러니, 우연아.”
“예, 장로님.”
남사일의 부름에 주호의 등 뒤에서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작게 웃고 있던 선우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이렇게 되었구나. 내 아직 붓을 들기엔 손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니 네가 대신 서신을 보내야겠다.”
“…장로님이 다치신 곳은 등이랑 기맥 쪽이 아니였…….”
“그래서, 못하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곧바로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가늘어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오는 남사일의 모습에 선우연은 차렷 자세로 힘차게 대답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호는 쓴웃음을 짓다가 이내 깜빡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참, 시간의 여유가 없는지라 내일 당장 출발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네. 내 이미 전부 회복한 지 오래야. 화산을 가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않겠나.”
“그렇지요. 그러면 내일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주호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선우연은 처리할 일이 있다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난바. 그 역시 숙소로 돌아갈 찰나,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다.
똑똑-.
-들어오십시오.
그가 향한 곳은 다른 병실이었다.
남사일이 머무는 곳처럼 일인실이 아닌 삼인실이었으나, 안으로 들어가니 한 명분의 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다 퇴실했나.”
“예, 전부 그리 심한 상처는 아니었으니까요.”
읽고 있던 서책을 침상 옆에 내려놓은 천후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해왔다.
“몸은 좀 어떻지? 듣기로는 제법 회복됐다고 하던데.”
“외상은 거의 치유됐습니다. 내상 쪽은 아직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급할 필요가 없으니 천천히 하려 합니다.”
“그런가.”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교류 대회의 습격 이후 혈천신교와 마교의 끄나풀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즉, 무언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인데 정말로 그것이 자신들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함일 뿐이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을 따름이었다.
“…기관 진식에 관심이 있었군.”
주호의 시선이 침상 옆에 놓인 서책으로 향했다.
학관에 들어온 뒤로 수련을 하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던바. 의외의 취미에 말을 건네자, 천후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옛적부터 있었는데 마음 놓고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이렇게 여유가 생겼으니 조금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알고자 함은 좋은 것이지. 특히 기관 진식은 앞으로도 활용할 곳이 많을 테니 말이야.”
천후는 공부를 칭찬받아 기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손끝으로 제 서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참, 사천으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천유의 동생 일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소식이 빠르군. 조금 전에 결정된 일인데.”
“철대환 그 친구가 와서 알려주고 갔습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 놓고 가려니 미안했나 보더군요.”
“그런가.”
살짝 의외의 조합이었으나, 후기지수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간 말끔히 회복해놓겠습니다.”
“알겠다. 조만간 네 스승이 돌아오면 이쪽에 들리라, 말을 전해놓을 테니 그리 쓸쓸하진 않을 것이야.”
천우희는 사라진 혈천신교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바.
며칠 있지 않아 돌아올 것이기에 사신문의 지부를 통해 연락을 남겨놓았다.
용건이 끝났기에 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바로 학관을 나서야 하기에 그도 준비해야 하는바.
그렇기 문을 나설 찰나, 침상에 기대 있던 천후에게 물었다.
“참, 기념품으로 가지고 싶은 거라도 있나?”
“기념품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지 천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잠깐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이내 제 뺨을 긁으며 말해왔다.
“기관 진식하면 사천당가의 것이 유명합니다. 괜찮다면 그곳의 서적을 받고 싶습니다.”
“노력해보지.”
그 말에 가볍게 손을 흔든 주호는 이내 병실을 나섰다.
***
이른 새벽.
두 대의 마차가 학관을 나섰다.
앞의 마차에는 주호와 남궁연, 그리고 남사일과 당천유가, 뒤쪽 마차에는 선우연, 악비산, 철대환, 위천강이 나눠 탑승했다.
“사천이라. 거의 이십 년만이로군.”
창밖으로 동이 터오는 풍경을 보던 남사일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십 년 전이면 한창 매화선풍검의 위명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가 아닙니까.”
“그렇지. 사천에 있는 마인 무리를 때려잡음으로 그 별호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야. 자네 부친께선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신가?”
“예? 저희 아버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 그분과는 소싯적에 적잖은 인연이 있었지. 사천의 마인을 때려잡은 것도 자네의 부친과 함께한 것이라네.”
남사일은 추억에 젖은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자신은 젊었으며, 패기가 있었고, 하늘이 높은 줄 모를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렇기에 겁도 없이 마교의 지부를 습격한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고, 지부를 주시하고 있던 당천유의 부친이 아니었더라면 이름을 떨치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비명횡사할 뻔했다.
“내겐 여러모로 은인이지. 뭐, 나 또한 만만치 않게 은혜를 갚았으니 피차일반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나저나 이제 보니 자네는 부친의 얼굴을 꼭 빼다 박았어.”
“하하하…….”
당천유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어릴 적인 당가의 기재라 불리며 뭇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지만, 동생이 그렇게 되고 나선 부자의 사이가 어색해졌다.
서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놓고 친하게 굴기엔 살짝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호탕하신 분이셨지. 그분도 나처럼 자유롭게 강호를 주유하는 것이 꿈이라 하셨네. 아쉽게도 당가의 유지를 이어야 하는 탓에 그러진 못했지만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당천유가 보기에 자신의 아버지는 천생이 사천 당가의 가주였다.
원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했고, 매사를 결정하는 일엔 항상 가문의 이익이 있어야 했다.
‘그런 아버지가 강호를 주유하는 것이 꿈이었다니.’
솔직히 남사일의 말이라고 해도 믿기엔 어려운 이야기였다.
“교관님.”
“무엇이지?”
그때, 옆에 있던 남궁연이 주호를 불렀다.
“휴관 기간까지 합치면 여섯 달 정도 쉬는 것이지요?”
“그렇지. 다만, 내 쪽은 업무 때문에 보름 정도 더 일찍 돌아가겠지.”
“그러면 당가에 다녀온 다음엔 다시 학관으로 돌아가시나요?”
“아니, 본가로 내려갈 생각이다. 그리하기로 약조했으니.”
“그런가요.”
본가라는 이야기에 남궁연이 두 눈을 빛냈다. 그것에 살짝 불안해진 주호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전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요?”
“…….”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따라올 생각이 가득한 얼굴이지 않은가.
“하남에 아직 검제께서 머물고 계셨지.”
“아버님은 무림맹의 일만 끝나시면 바로 돌아가신다고 하셨어요. 본가를 오래 비워두면 그것도 별로 좋지 않으니까요.”
“너는?”
“저야 제 마음이죠. 사천을 가든, 섬서를 가든, …산동을 가든.”
“산동엔 갈 이유가 없을 텐데.”
“…가, 같은 세가 연합인 산동악가가 있어요. 오랜만에 악가의 가주께 인사도 드릴 겸 방문하면 되겠네요.”
“참고로 말해주자면 악가와 내 고향은 산동에서도 극과 극에 가깝다. 하루 이틀 거리가 아니지.”
“…교관님도 남궁세가에 방문하셨잖아요. 그렇다면 그 반대가 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요?”
“나는 초대를 받아서 갔다만.”
“그러면 저도 초대해주시면 되겠네요.”
그 뻔뻔스러운 태도에 주호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완전 막무가내로군.’
어지간해선 말로 밀려본 기억이 없던 그였지만, 애초부터 논리를 빼놓고 대화를 걸어오니 이길 도리가 없었다.
“…자네, 혹시 저 둘…….”
잠자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남사일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는 주호와 남궁연을 보곤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당천유를 바라보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교관과 관생 사이에 연정이라니.
더욱이, 가만히 앉아 살펴보니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남궁연의 쪽이지 않은가.
주호는 연신 애를 쓰며 말을 돌리려 했지만, 그녀는 노골적인 태도로 그 옆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검제 남궁한의 딸에 대한 사랑은 강호에서도 유명한바.
아무리 뛰어난 사윗감이라 할지라도 그 성에 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자네도 고생이 많겠군.’
아직 홀몸인 남사일로서는 부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앞에 펼쳐진 가시밭길에는 명복을 빌어주었을 따름이었다.
남궁한이 벌써 그를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