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귀환-103화 (103/300)

#103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주호는 당황했다.

불린 것은 남사일일 텐데 왜 자신이 동행해야 한다는 것인가.

“화산이네. 구파일방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화산. 가고 싶다고 하여도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남사일은 필사적이었다.

본래라면 돌아오라는 연락은 언제나처럼 가볍게 무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선우연이 건넨 서찰엔 만일 이번 역시 화산으로 돌아오지 않을 시 장문인과 그 사제인 남사일의 스승을 필두로 매화검수 전원이 하산하여 그를 잡으러 온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사일은 학관에 적을 두고 있기에 함부로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저들이 하산해 이곳으로 닥쳐온다면 강제로 연행되어 본산의 수련 동에 폐관 수련이란 명목으로 갇히게 될 수도 있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겠지.’

선우연을 통해 이런 식의 서신까지 보내온 것을 보니 이번엔 정말로 진심인 듯 보였다.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그간의 공백은 따지지 않겠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하지만 혼자 사문으로 돌아갔다가 그대로 코가 꿰일 수도 있으니 그것도 아니 될 일이었다.

“가면 장문인도 만날 수 있을 턴데, 어떤가.”

그렇기에 남사일은 주호를 끌어들였다.

그 정도의 고수라면 사문의 이목이 그에게로 쏠릴 터. 그렇다면 아무리 장문인과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리라.

“음.”

주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번 휴관 기간 때에는 본가인 산동에 내려가려 했다.

일이 바빠 동생인 주예향의 생일을 챙기지 못해 그것을 벌충하고, 내년에 입관 시험을 대비해 무공을 손봐줄 생각이었다.

“내친김에 자네 휘하 후기지수들 전부 데려가면 어떤가. 우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문으로 말입니까. 좋은 생각 같습니다!”

선우연은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관에서 친해지게 된 친우들을 스승님에게 소개도 할 겸 자신이 나고 자란 화산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다.

“괜찮지 않습니까?”

주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서부터 화산까지는 왕복으로 두 달 가까이 걸리는 여정이었고, 자신의 고향인 산동은 그 반대편이었다.

‘학관 일정이 예정보다 일찍 끝난 덕분에 내년까지 다섯 달 정도까지 있으니…….’

어림짐작해 계산해보니 도중에 발이 묶이지만 않는다면 그래도 여유롭게 일정을 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보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겠다.”

“예!”

주호의 대답을 받은 선우연은 우렁찬 대답을 하곤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

“거진 일 년 만의 귀향인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살짝 들뜬 기분이 되었다.

그렇기에 병동을 나와 곧바로 연무장이 있는 방향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학관의 일정은 전부 정지되었지만, 그들은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교류 대회 쪽에서 관문을 겪고, 그 뒤에 마인들과 싸우며 깨달은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들 상처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맹렬하게 수련에 매진했다.

특히 당천유는 천후의 부상이 심한 것이 모두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크게 자조했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진지한 기색으로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보게!”

연무장 안으로 들어선 선우연은 제 친우들을 불렀다.

“……?”

그들은 막 몸을 풀며 서로간의 비무를 준비하고 차였다. 그런 와중에 신난 기색으로 연무장에 들어온 선우연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악비산의 물음에 선우연은 지체할 것 없이 본론을 꺼냈다.

“자네들 화산에 가지 않겠는가?”

“…화산?”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악비산이 되묻자 선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전에 남궁세가에 초대받았을 때와 같은 맥락일세. 남장로님께서 오랜만에 사문으로 돌아가실 겸, 주교관님과 동행하시기로 했네. 거기서 자네들의 의향을 물어보라고 하셨는데, 혹 괜찮다면 어떨까 싶군.”

“교관님도 가신다고.”

잠시 생각하던 악비산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차피 휴관 동안 학관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홀로 수련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으나, 교관님과 더불어 이들과 함께 간다면 더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터.

“나도 괜찮네.”

“나도.”

“저도 문제없어요.”

위천강, 철대환, 남궁연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해왔다.

“자네는 어떤가?”

“…나는.”

당천유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화산은 분명 매력적인 이름이었지만,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학관에서 머무르는 것은 괜찮았으나, 화산이 있는 섬서까지는 왕복으로 두 달 가까이 걸렸다.

단순히 화산의 이름만 보고 가기엔 저어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 자네. 일전에 보니 영약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던데, 내 자소단은 무리지만 매화단(梅花丹) 정도라면 얻어다 줄 수 있네.”

“정말인가?”

선우연의 말에 당천유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이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바. 교류 대회가 흐지부지 끝나 아쉬웠던 찰나다. 그 가운데 자소단 만큼은 아니지만, 원기 회복에 뛰어난 효과를 보인다는 매화단을 손에 얻을 수 있다면 두 달이란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고 남는 일이었다.

“나도 잘 부탁하겠네.”

“그러면 전부 가는 걸로 알고 있겠네.”

마지막으로 당천유까지 긍정의 표시를 하자 선우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후기지수들의 화산행이 결정되는 듯했다.

물론 곧바로 출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산행의 주체가 되는 것은 남사일이었으니, 그가 내상을 회복하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화산에서 영약을 보내줬기에 원래 기간보다 더 짧게 줄어들었고, 이제 하루 후면 화산으로 출발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흡-!”

후기지수들은 마지막 날까지 수련을 열심히 하였다.

이동을 시작하게 되면 아무래도 수련을 하는 시간이 짧아지는바. 그렇기에 그 간극을 줄이고자 구슬땀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

주호는 연무장 한쪽에서 제자들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학관의 일정이 모두 중지되었다곤 하나, 이들을 내팽개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책임감이 없진 않을뿐더러, 먼저 부탁해온 것은 저들 쪽이었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그것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실례합니다.”

그러던 중 연무장 문가로 낯선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의 절반을 덮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용한 분위기의 여성으로, 소매에는 당가의 출신임을 알리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가혜 누님?”

“천유 도련님.”

당천유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방문이라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당가혜라 합니다. 당가의 출신으로, 학관의 이 년 차입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와 좌중에 인사를 한 당가혜는 종종걸음으로 당천유에 다가갔다.

“여기엔 어찌…….”

“본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

그 말에 당천유의 얼굴이 굳었다.

곧 떨리는 눈으로 당가혜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침중한 낯빛으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아아.”

곧 서신을 건네받은 당천유는 황급히 그것을 읽어나갔다.

제발 아니길 바라는 표정이었으나,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따름이었다.

“…선형, 미안하오. 아무래도 화산엔 가지 못하게 생겼소.”

“어? 뭐? 갑자기 왜 그러는가.”

“개인적인 사정이오. 미안하오.”

그 말을 끝으로 당천유는 자리를 떠났다.

뒤이어 당가혜 역시 이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황급히 그 뒤를 따라나섰다.

“…무슨 일인지 아는가?”

“…….”

선우연은 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악비산에게 물었다.

후기지수 중 학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인연을 쌓고 있던 것은 악비산 밖에 없는바.

그렇기에 무언가 알고 있냐고 묻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 친구의 개인적인 일이네. 그러니 내 입으로 떠벌리고 싶진 않아.”

궁금하다면 그 본인에게 들으라는 말이었다. 그것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선우연은 잠자코 벽에 기대 있던 주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일단 일정을 조정해보겠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친구의 마음이 다시 바뀔 수 있으니까요.”

“알겠다. 당천유에게는 내가 물어보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살짝 걱정 섞인 물음에 주호는 괜찮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연무장을 떠났다.

당천유가 저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제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난관이 닥쳐왔다는 것이었다.

보통이라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을 터이지만, 그 심도가 깊어지면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주호는 벌써 저 멀리 나아간 당천유의 기척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박차고 어딜 가는가 싶더니 아직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관을 나가 주점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평소 즐겨 마시는 향이 좋은 술이 아닌, 독하디 독한 화주를 시킨 당천유는 그것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잠시간 밖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주호가 그에게 다가갈 찰나, 입구 쪽에서 이쪽을 기다리고 있던 당가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교관님이시죠.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어요. 당가혜라고 합니다.”

그녀는 주호가 따라오리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인사를 해왔다.

짧게 고개를 끄덕여 그것에 화답한 주호는 가늘어진 눈으로 안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라도 있는가?”

“…천유 도련님은, 주교관님을 깊게 신뢰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저 역시 믿어도 되는 걸까요?”

살짝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니 아직 어찌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렇기에 주호는 시선을 옮겨 자신 앞에 자리한 당가혜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내가 먼저 너희의 신뢰를 저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필시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리라.

그렇기에 주호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대답하자 그녀는 짧게 한숨을 토해내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험하는 듯한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쪽 나름대로 중요한 사안이기에.”

“이해하마.”

당가혜는 잠시간 숨을 골랐다.

그러곤 조금 후, 어딘가 결연해 보이는 눈빛으로 주호를 올려다보았다.

“천유 도련님이 어째서 독을 쓰시지 않는지, 알고 계시나요?”

“…본인 말로는 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당가의 이름을 떨치기엔 암기로 충분하다더군.”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한 말이었다.

암기보다 더 독(毒)에 대한 상징성을 가진 사천당가의 직계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니.

“…….”

그녀는 주호가 그렇게 말하리라 예상한 듯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둘러대셨군요.”

“둘러대었다?”

그렇다면 독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 의문에 당가혜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도련님은, 제 소중한 사람을 중독시킨 자신의 독을 해독하지 못하셨어요. 독을 쓰지 않는 것은 아마 그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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