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툭, 투둑.
이마에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턱 끝에 맺혀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축축한 느낌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천후는 피를 닦아낼 여유가 없었다.
“후우…….”
깊게 숨을 내쉰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장내로 난입한 괴한은 단둘이었다.
적색 무복 위로 혈룡(血龍)이란 글이 새겨진 것을 보니 혈천신교 소속 고수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이라면 상대의 전력이 예상한 범주 안쪽이라는 것. 천후는 한 발자국 먼저 나서서 인원의 분배를 했다.
그 자신은 당천유 한 명을 데리고 왼쪽의 혈룡을 상대했고, 나머지 다섯은 오른쪽에 있던 혈룡을 상대로 팽팽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교관은 아닌 듯한데. 관생치고 제법 잘 버틴다만 그 정도는 살아가기 무리일 따름이다.”
혈룡은 피를 뚝뚝 흘리는 천후를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지만, 더는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간의 격차가 뚜렷했기에 천후와 오십여 합을 넘게 드잡이질을 하면서 몇 번이고 결정타를 가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서 있는 당천유의 존재가 눈엣가시였으니.
실제로 그를 무시하며 공격을 감행하려 한 적이 있었지만, 사각에서 짓쳐오는 사천당가의 암기에 헛바람을 토해내며 번번이 물러났다.
‘암기는 제법 날카롭지만, 조심한다면 별것 아니다. 신경 써야 할 것은 당가의 독이니.’
혈룡은 당천유가 사천당가의 직계임을 알고 있었기에 암기뿐만 아니라 독 쪽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독에 중독된다면 순식간에 미명을 달리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천후를 비롯한 일곱 후기지수가 두 혈룡을 상대하는 사이, 아까 섬으로 들어오는 목교를 넘었던 혈천신교의 무인들이 이쪽을 공격해왔다.
고작해야 이류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서른에 달하는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바.
“막아-!”
다행이라면 담화운을 비롯한 천무 학관의 후기지수가 정신을 차려 합세했다.
더욱이 곳곳에 숨어 있던 다른 후기지수들이 팽팽한 전황에서 희망을 보고 한두 명씩 합류해오고 있었으니.
쿵-.
그 반대편에서 혈룡의 일 검을 막아낸 악비산은 굳은 얼굴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묵직하다.’
일전 선발 대회 때 싸웠던 천후의 공격보다 무겁기 그지없다.
만일 주호에게 단련을 받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의 그 일격으로 창과 함께 썰려 나갔을 터.
그 여파를 전부 흘려내지 못한 것인지 내부의 기운이 들끓었다.
혀끝으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정도의 내상이었지만, 악비산이 공격을 받아낸 덕분에 다른 이들의 활로가 열렸다.
타닷-!
선우연과 철대환이 혈룡의 양옆을 파고들었다. 상의한 바는 없었으나, 더없이 자연스러운 합공이었으니. 주호가 봤다면 감탄하며 칭찬할 정도의 연계였으나, 혈룡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림없다.”
쿵-.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몸을 회전시킨 혈룡이 선우연과 철대환의 공격을 막아내고 도리어 역공까지 가해왔다.
“컥!”
악비산조차 겨우 막아낸 공격이었다. 그보다 부족한 경지의 그들로는 어림도 없었으니, 둘 다 적지 않은 내상을 입으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웅웅웅-.
그때 청명한 검명(劍鳴)이 사위를 휩쓸었다. 혈룡의 신경이 선우연과 철대환에게 쏠린 틈을 노린 남궁연이 그 지척까지 쇄도한 것이었다.
“만천(滿天)-.”
창궁무애검법의 정수가 그녀의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시릴 정도로 푸른 검기가 허공을 뒤덮으며, 그야말로 만천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기세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흡-!”
혈룡 역시 그것은 경시하지 못하겠는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다잡았다.
핏빛 검기가 허공에 아스라이 채워지고 떨어져 내리는 남궁연의 검과 부딪쳤으니. 이내 커다란 폭음이 연신 터지며 그 주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큭.”
동수에 가까웠으나, 다음의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했다.
그 이전에 다른 세 명이 상대의 힘을 깎아준 것을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연은 미련 없이 그 반탄력을 이용해 뒤로 물러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분하지만, 뒤를 부탁드릴게요.”
“기꺼이.”
그녀와 교대하듯 앞으로 쇄도한 위천강이 옅은 미소와 함께 순식간에 혈룡의 지척으로 파고들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 유려한 외모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지만, 그 시커먼 눈동자에 서린 것은 흉포한 살기였으니.
‘가급적 신공은 사용하고 싶지 않은데.’
보는 눈이 많은 상황이다. 아무리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하다고 하더라도 신교의 무공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엔 주호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즉, 그가 익힌 무공 중 천마신공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위력을 지닌 무공을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월(日月)-.”
무월십이검(無月十二劍).
일월(日月), 화마의 달.
족히 반년 만에 다시 펼치는 무공이었으나,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검기가 마치 불꽃처럼 타오르며 사방을 휩쓸었고, 이내 그 목을 물어뜯으려 몸부림쳤다.
“큭…….”
혈룡은 막 남궁연의 절초를 막아내며 호흡을 상당히 소비한바. 그렇기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찰나 동안 태세를 가다듬은 악비산이 혈룡의 뒤로 제 거구를 들이밀었다.
“흡-!”
근육이 가득한 팔 위로 시퍼런 힘줄이 솟아오른다. 물러날 기색이 전혀 없는, 얼핏 보면 손해를 생각하지 않은 동귀어진의 한 수.
하지만 악비산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 여겼다.
‘적은 강하고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주호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옥쇄를 각오한 채 창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혈룡은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앞뒤가 막혀 피할 곳이 없는 진퇴양난인바. 그렇기에 잠시간 멈칫했지만, 자존심보단 목숨이 더 귀한 것이었다.
쿠당탕탕-!
그는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하수들이나 펼치는 뇌려타곤의 수법. 덕분에 죽지는 않았지만, 왼팔과 얼굴 절반이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이 개새끼들-! 전부 죽여버릴 테다!”
분노에 찬 혈룡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땅을 박찼다.
상처 입은 야수가 가장 위험하다고 했던가.
비록 한쪽 팔이 망가졌지만, 이전보다 더 폭발적인 기세로 그들에게 닥쳐왔다.
“…그딴 인내심으로 마인을 흉내 내다니.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
다른 이들은 전부 거리를 벌리며 피해냈지만, 위천강은 혈룡이 닥쳐드는 정면에 마주 섰다.
그러곤 가만히 검을 들며 조소를 흘리자, 혈룡의 두 눈이 커지며 농밀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가벼운 격장지계에도 눈이 뒤집히는가.’
스스로 신비 조직을 자처하는 이들의 특성이 이랬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정보가 노출된다면 눈에 불을 켜고 상대를 죽이려 달려 들어오는 꼴이라니.
정말로 신교의 마인이었더라면 불호령으로 엄히 다스렸을 차였다.
“위형!”
혈룡의 매서운 기세에 뒤에 있던 선우연이 애타는 목소리로 불러왔다.
하지만 위천강은 물러나는 일 없이 두 손으로 제 검을 다잡았다.
“일식(一式).”
무월십이검의 기운으로 펼쳐내는 천마신공의 극의. 곧 눈부신 일 섬이 그의 검 끝에서 터져 나왔다.
서걱-!
살과 뼈가 갈라지는 선명한 피륙음이 울려 퍼진다. 그 이전에 둘의 신형은 이미 교차한 뒤였다.
“…컥.”
혈룡은 무심코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곤 두 눈을 크게 뜨며 제 목을 매만졌다.
스르륵-.
핏빛 실선이 그 위에 새겨진다. 이윽고 몇 방울의 피가 튀어 오르더니 이내 머리와 목이 분리되어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후우.”
위천강은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더 싸움을 끌면 이 뒤가 어찌 될지는 몰랐다.
홀로 몸을 빼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그놈의 정이 무엇인지 어지간하면 일행 전부를 살려가고 싶었다.
가급 적이면 신공을 사용하지 않고 싶었으나, 가장 적절한 때의 가장 적절한 무공이었다.
그렇기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한 것이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따름이었다.
“위형, 방금…….”
선우연의 입이 서서히 벌려졌다.
눈으로 보았으나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경지였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경악에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그 분위기에 흡족해진 위천강은 제 검을 어깨에 걸치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네.”
“…큭!”
그 말이 내뱉어짐과 동시에 피투성이의 천후가 그들 사이로 굴러왔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긴 했지만, 몸 곳곳에 난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천형, 괜찮소?”
곧 뒤따라 뒤로 물러난 당천유가 다급한 표정으로 외친다. 그것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천후는 목이 잘려 쓰러진 혈룡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었다.
“…빌어, 먹을.”
그가 상대하던 혈룡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전신은 화상으로 얼룩졌고, 등이나 팔뚝엔 갖가지 암기가 꽂혀 덜렁거리고 있었다.
“가세하겠네. 자넨 뒤로 물러나서 조금 숨을 고르게.”
“…부탁하지.”
위천강의 말에 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천무 학관 측의 후기지수들 역시 혈룡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기운을 얻은바.
점점 이쪽으로 승기가 기우는 상황이었다.
“이것 봐라. 안쪽의 교관들을 정리하고 온 사이에 재미있게 돌아가네.”
그러던 차.
담벼락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으니. 천후를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위에 자리한 괴한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제길”
선우연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 또한 이제껏 싸워온 혈룡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진사휘! 어서 나를 도와라!”
“쯧, 한심스럽긴.”
궁지에 몰린 동료의 필사적인 외침에 진사휘라 불린 혈룡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담벼락에 걸터앉은 자세로 가볍게 손짓하자, 그 너머에서부터 수십에 달하는 인원이 안쪽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했다.
“물러나! 진열을 다시 구축한다!”
지척까지 닥쳐온 새로운 적들을 막아낸 선우연이 큰소리로 외쳤다.
안타깝게도 상대의 지원이 먼저 도착했다. 아직 기존의 적조차 전부 정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원이 가세하자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했으니.
“……후.”
짧게 숨을 뱉어낸 천후는 다시금 홍령도를 움켜쥐었다.
혈룡을 상대하느라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지만, 더는 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기울어버린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었으니.
“네가 이들의 구심점이구나.”
“……!”
하지만 천후의 기세가 후기지수 중 가장 출중한 것을 꿰뚫어 본 진사휘가 순식간에 그의 지척으로 닥쳐왔다.
쐐애애액-!
천후는 거의 본능적으로 도를 휘두르며 몸을 내뺐지만, 아쉽게도 제 상태가 아닌지라 반응이 조금 늦고 말았다.
꽈아아악-!
진사휘의 손이 천후의 목을 움켜쥐었다.
더욱이 그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외쳤다.
“동료를 죽이고 싶지 않다면 모두 무기를 버려라! 그리하면 네놈들의 목숨 역시 보장해주겠다!”
“……천형-!”
선우연이 이를 악물며 앞으로 뛰쳐나왔지만, 진사휘는 웃음을 토해내며 천후의 몸을 흔들었다.
“의기는 대단하다만,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객기가 될 뿐이지.”
“…….”
선우연을 비롯한 그들은 이를 악물었다.
전황이 압도적으로 기울은 상태에서 천후마저 인질로 붙잡혀 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바. 더 이상의 피해를 내지 않기 위해선 투항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끅, 끄윽.”
천후는 제 목을 붙잡은 진사휘의 손을 떨쳐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 단단함은 바위와도 같았고, 어찌 된 영문인지 한 올의 내공조차 끌어올릴 수 없었다.
목을 졸리고 있는 탓에 더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른바.
‘스, 승님…….’
천후는 마지막으로 스승을 보고 싶었다.
평생 그 뒤를 따라가겠노라 맹세했거늘, 아쉽게도 그것은 지키지 못할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
아마 삶의 끝이 될 순간의 끝에서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 죽음에 스승이 너무 절망하며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도 곁에 믿을 만한 남자가 있으니 한시름을 놓은 채 눈을 감을 수 있었…….
서걱-.
흐릿한 시야로 새하얀 빛이 그를 휘감았다. 동시에 목을 조이고 있던 압박에서 해방되었고, 막혀 있던 숨이 뚫리며 죽어가던 감각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끄아아악-!”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잘려나간 팔을 붙잡고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는 진사휘의 모습을 들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제자야.”
뒤이어 들려온 그 익숙한 목소리에 천후는 무심코 눈물을 흘릴뻔했다.
하지만 나중에 놀림 받는 것이 싫었으니 필사적으로 그것을 눌러 참으며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말로, 늦으셨습니다.”
“힘들어 보이는데, 이번에야말로 안아줄까?”
“…됐습니다. ”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농을 던져오는 스승의 모습에 천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
천우희는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천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정말로 간발의 차이였다.
이곳으로 오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자식과도 같은 제자를 잃을 뻔했다.
“자, 그러면.”
입으로는 제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을 던졌지만, 그녀의 가슴은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태였으니.
“내 제자를 넘본 값은 비싸게 받아낼 거야.”
뿌득.
천우희는 이때껏 이런 적이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며 주작신도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