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담우양과 지상으로 복귀 후, 다음 관문의 준비를 위해 숙소에서 정비하고 있던 주호는 천각 내부가 묘하게 부산스러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혈천신교의 일도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슬며시 차오르는 불안감에 예정보다 조금 이르게 출발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숙소에 찾아오는 이가 있었다.
“자네.”
“수석교관님?”
교류 대회는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바. 그 가운데 제일 바빠야 할 터인 팽대환의 등장에 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야기는 들었는가?”
“방금 돌아온 차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다급한 목소리에 주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사단이 일어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학관이 습격당했네.”
“…예?”
하지만 뒤이어 나온 내용은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반각 전에 학관 쪽에서 연락이 왔다네.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더군. 관주께서도 부상당하셨다고 하니 여간 심상치 않은 일이 아니네.”
“그런…….”
주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들이 교류 대회 기간에 움직일 것은 예상한바. 하지만 이곳 말고 학관 자체를 습격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문제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천무 학관 쪽도 공격을 당한 것이지. 피해는 그쪽이 더 크네. 그래서 지금 악가 그 친구도 돌아갈 이들을 꾸리고 있어.”
“이곳은 어찌합니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팽대환 쪽도 학관으로 귀환할 마음이 가득한 것 같았다.
주호의 물음에 그는 씁쓸함을 삼키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엔 맹의 고수들이 있지 않은가. 관주님이 부상을 입으신 이상, 내 복귀는 기정사실이라네. 그래서 그런 것인데…….”
팽대환은 주호의 어깨를 붙잡으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회는 이미 중지됐지만, 아직 적지 않은 인원이 이곳에 남아 있네. 그러니 유사시에는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군.”
“…양동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계시는군요.”
“맹에서 인원을 더 파견해주기로 했네. 그러니 큰 걱정은 없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고 싶네.”
팽대환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학관 쪽은 어지간해선 외부에서 공격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 비교하자면 무림맹과 같은 맥락이었다.
강호의 온갖 문파의 인원이 모이는 집합인 와중, 그곳을 습격하다 신원이 노출된다면 전 무림의 공적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간혹 예외가 있었으니.
‘습격의 배후가 마교라는 이야기가 있었거늘, 아니었으면 좋겠군.’
예로부터 마교가 중원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때 그 시작은 항상 정천 학관의 기습이었다.
가장 가까운 몇십 년 전만 해도 소수의 마두가 은밀히 하남에 스며들어 불시에 학관을 습격했고, 무려 세자릿수가 넘는 피해를 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부탁하세.”
관주인 설진우가 부상당한 와중, 그 수습을 할 수 있는 자신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유사시엔 제가 나서지요.”
결연한 그의 표정에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팽대환과 악진명은 교관 중 인원을 추려 각자의 학관으로 돌아갔다.
교류 대회는 당연히 중지되었다.
교관들은 탈락한 후기지수들을 한곳으로 모두 불러 모았고, 빠진 인원이 없는지 서둘러 확인에 나섰다.
“천무 학관은 삼차 관문으로 들어간 서른을 제외하면 모두 있소.”
“정천 학관도 서른여섯을 제외하면 모두 있네.”
임시로 남은 교관의 수장을 맡은 풍운검 강무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호 쪽을 바라봐왔다.
“밖의 정리는 우리가 하고 있겠네. 자네는 지하의 교관과 후기지수들을 마중 가줄 수 있는가.”
“알겠습니다.”
주호는 마침 지하에 있는 제자들이 걱정되던 차였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지하로 내려갈 찰나, 묘한 기시감이 그의 발목을 잡아끌었다.
“……?”
장내엔 교관과 관생뿐만이 아니라 행사의 진행을 돕던 사용인까지 함께 있었다.
하지만 개회 첫날 보였던 혈천신교의 간자들은 어느새 전부 모습을 감춘 후였으니.
찬찬히 한명씩 상태창을 확인해보았지만,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소연신 교관은 학관으로 돌아갔습니까?”
“소교관? 아니. 그 친구는 다른 교관들과 함께 남아 있는 이가 없는지 돌아보고 온다고 하였는데.”
“…….”
강무석의 대답에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소연신과 혈천신교의 간자들이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닐 터.
‘설마.’
지하로 향한 것일까.
그것에 생각이 미친 주호가 막 몸을 돌릴 찰나.
콰아아아아아앙-!
거센 폭발이 사방에서 일어나 지축을 뒤흔들었다.
“윽?!”
장내에 있던 이들은 모두 주춤하며 자리에서 멈춰 섰다. 곧 시커먼 연기가 천각 곳곳에서 피어올랐고, 크고 작은 폭발이 연이어 터지며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다들 조심하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강무석이 소리쳐 교관들의 정신을 다잡았다.
쿵-.
하지만 그 노력이 허무하게도 한쪽 벽이 무너져 내리며 일단의 무리가 장내로 난입했으니.
“…마교.”
교관 중 누군가가 괴한들의 복장에 새겨진 흉신악살의 문양을 보곤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주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상태창으로 보이는 정보엔 그들이 혈천신교가 아니라 정말로 천마신교의 마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척.
그리고 그 선두에 익숙한 푸른 가면을 쓴 이가 나섰으니.
청혈도제 사마천.
기다란 언월도를 손에 쥔 그는 주호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담화운의 조는 선우연 일행보다 하루 먼저 이곳에 당도했다.
삼차 관문은 다른 이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바. 그렇기에 미로 안쪽에서 쌓인 피로를 풀 겸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한들로 인해 피비린내로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다, 단 네 명이었네. 열이 넘는 교관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으나 전부 열 합을 버텨내지 못했어.”
담화운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날의 기억을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했다. 괴한들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교관들이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졌고, 후기지수들은 공황에 빠져 도망치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음 관문을 진행하기 위해 상급 교관님들이 내려오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도 이미 죽었겠지.”
일차 관문을 통과한 직후 마주쳤을 때는 그리도 기운이 넘쳐 보였지만, 지금은 그사이 몇 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 미간 사이로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다른 이들은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네. 경황이 없던 와중 같이 도망친 것은 우리 셋뿐이었으니.”
담화운의 이야기가 끝나자 선우연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단 넷으로 교관님들을 전부 꺾었다, 라.”
한쪽 구석에서 잠자코 경청하고 있던 천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호를 제외하고도 각 학관 소속의 교관들은 수준이 낮지 않았다.
적어도 초일류에서, 많게는 절정까지 이르렀으니. 단 넷으로 그들 모두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습격자들의 경지가 최소 절정 초입은 넘었다는 것이리라.
“할 수 있겠는가?”
선우연의 물음에 천후는 고개를 들었다.
다른 이들 역시 침중한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그 이상은 필패(必敗)네.”
습격자 중 두 명 이상이 남아 있다면 이곳의 전력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섬에 들어왔을 때 뒤따라오던 이들이 있지 않았나.”
“…그랬지.”
선우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족히 서른은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그리 뛰어난 경지는 아닌 듯해 보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조차도 벅찰 따름이었다.
드드드드-.
그때 천장에 잘게 진동하며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가늘어진 눈으로 위쪽을 응시하던 위천강은 이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 정도 진동이면 화약이 터진 것 같은데, 위쪽에도 소란이 한창인가 보군.”
“그렇다면 당장 지원을 바라기엔 어려운 상황인가.”
지상에도 소란이 있었으니 그만한 인원이 관문을 넘어 자신들의 뒤를 쫓아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물러날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이르자 장내에 있던 모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축 처져 있을 시간은 없어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궁리를 짜내야 해요. 적어도 교관님이 오실 때까지는.”
남궁연은 그런 그들을 질책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패색이 짙은 모습이지 않은가.
“그래, 교관님이 오실 때까지만 버티면 되겠지.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악비산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혈천신교의 무리들이 습격해오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 아닌가.
주호나 무림맹에서도 대비를 해놓았다고 했으니 머지않아 위쪽 상황을 수습하고 자신들을 도우러 내려올 터.
짝.
선우연 역시 양손으로 제 뺨을 두들겨 정신을 차렸다.
자욱한 피 냄새와 담화운의 절망에 물들어 잠시간 정신이 흔들렸던바. 그렇기에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네.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이들과 합류하는 것이겠지. 뿔뿔이 흩어지는 것은 좋지 않으니…….”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후와 위천강의 몸이 움찔하며 동시에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콰아앙-!
벽면이 그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른 가운데, 절정의 기세를 풍기는 두 명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으니.
“여기 있었군,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제 동료를 팔아 도망간 것이 고작 여기밖에 되지 못하더냐.”
“으아아아-!”
사방을 짓누르는 압력과 농밀한 살기에 담화운과 천무 학관의 후기지수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자지러졌다.
그들과는 격이 다른 고수였다.
보통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감히 그 앞에 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터.
하지만 천후를 비롯한 그 일행은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꿋꿋이 그 기세에 저항했다.
“…….”
선우연은 낮게 호흡을 내뱉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이 압박감을 견뎌내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주호에게 실전과 같은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으니 전보다 더 의연한 태도로 그 앞에 설 수 있었다.
“호오.”
자신 앞에 선 일곱 명의 후기지수에 두 고수는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명백히 우릴 경시하고 있군.’
천후는 천천히 제 홍령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허점을 찌르기에는 제격인 상황.
단순한 전력으로 보면 비등비등했지만, 지원이 제때 오지 않는다면 결국 유리한 것은 상대 쪽이 될 것이다.
그러니 초장에 최대한 그 허점을 찔러야 했다.
쿵-!
제일 앞에 선 천후가 크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건물 바닥이 터지며 다시금 자욱한 먼지를 피워 올렸고, 그 장내를 뒤덮었다.
“천유-! 자넨 나와 합공하세!”
파아아앗-!
주작도법의 열양지기가 공기를 후끈하게 달아 올렸다.
천후의 지시에 따라 당천유가 그 뒤로 따라붙었을 때, 나머지 이들 역시 필사의 기세를 풍기며 천후가 노린 반대편의 고수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