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선우연을 비롯한 정천 학관의 후기지수들은 앞으로 향해 있는 외길을 쭉 걸어나갔다.
이윽고 널찍한 공동에 도착했고, 그 앞에 먼저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인원을 볼 수 있었다.
먼저 자리한 이들은 전부 천무 학관의 후기지수였다.
무작위로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조를 만든 정천 학관과는 달리 천무 학관 측은 모든 조가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규격화된 배분으로 필시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에 조직적으로 움직인 것이 분명한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었지만, 오히려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니 지적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었다.
“이거, 명성이 자자한 소신룡 아닌가. 생각보다 늦었군?”
“…….”
천무 학관 측 후기지수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연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호쾌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공동 안으로 들어오는 선우연을 비롯한 이들을 보며 천천히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옆에 있던 당천유가 물었다.
짐짓 보이는 인상은 시원시원한 것이었으나, 그 눈에 서린 빛은 어딘가 간사한 느낌이 들었다.
대충 누군지는 짐작이 갔지만, 구태여 물은 것은 저쪽에서 해온 도발을 받아치기 위함이었으니.
“청성의 담화운이라 하네. 별호는 정명검(正明劍)이지만, 속은 비좁기 그지없는 남자지.”
“…….”
옅은 미소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다가가던 담화운이 발걸음을 멈췄다.
속삭이듯 말한 것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정도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한 자가 없었으니.
담화운은 짐짓 태연한 척 다시 발걸음을 옮겼으나, 모욕감에 떨리는 입술과 붉어진 귓불은 숨길 수 없었다.
“생각보다 늦었군. 자네 정도라면 예선 정도는 손쉽게 통과할 줄 알았는데.”
굳이 다시 한번 늦었다고 말한 것은 서로 간의 우열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선우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으니. 그는 피식 웃으며 담화운 뒤쪽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자네들이 생각보다 빠른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보면 첫 관문을 치르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겠어.”
“글쎄. 고작 첫 번째 관문이지 않은가. 그 정도는 손쉽게 통과해주어야지.”
“자네들 쪽에는 눈이 좋은 이가 있나 보군.”
한 치의 밀림 없는 설전이었다.
더욱이 선우연은 교묘히 그들의 불공정함을 지목했다.
첫 번째 관문은 물이 방안에 차올라 벽면의 그림이 보이기 전까지는 구조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실제로 그림을 발견하고 탈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보다 훨씬 빨리 이곳에 당도했다는 것은 그 이전에 미리 관문의 요소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치졸한 수작이지 않은가.
말로는 공정한 대회를 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부터 출발 선상을 달리하다니.
황금세대니, 뭐니 했지만, 결국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아 한심스러울 따름이었다.
“다들 모였군.”
그러던 차,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담교관님.”
교관 중에서도 온화한 성정으로 유명한 담우양의 등장에 정천 학관 측의 후기지수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첫 관문을 통과하느라 모두 고생 많았다. 이 구역에서는 탈락자가 없나 보군.”
정천 학관 세 개조의 스무 명.
천무 학관 세 개조의 열다섯 명.
그 인원을 전부 헤아린 담우양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첫 번째 관문에서 탈락한 이들이 있습니까?”
“각 학관마다 세 조씩, 총 여섯 개의 조가 탈락했다.”
방 하나에 세 개 조가 함께 들어갔으니, 두 개 방에서 탈락자가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다음 관문을 설명하지.”
담우양은 좌중을 바라보며 이 앞을 가로막고 선 기다란 벽을 가리켰다.
“이 안쪽은 각종 기관진식이 설치된 복잡한 미로다. 너희는 사흘 안에 그 함정들을 통과해 이 미로 너머의 출구로 향해야 한다.”
“…기관진식의 수준은 어느 정도 됩니까?”
정천 학관의 후기지수 중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은 누군가가 손을 들어 묻자 담우양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해주었다.
“방심하다간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물론 각 구역별로 교관이 대기 중이니 기권을 희망하는 자는 언제든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그 말에 다들 살짝 밝아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기관 진식만 설치되어 있다면 그리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으니.
하지만 담우양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조마다 깃발이 배부될 것이다. 너희는 이 안쪽에서 자신의 깃발을 지키며 총 세 개의 깃발을 획득해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저희끼리 싸워야 하는 겁니까.”
“그러면 순순히 넘겨줄 건가?”
담우양의 물음에 질문을 던진 후기지수는 어림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서로 간에 교전도 선이 있다. 살상이 일어날 정도는 금지며, 각 구역에 있는 교관의 재량에 따라 중지될 수 있으니 명심하도록.”
담우양은 그 이외에 세세한 규칙을 알려주었다.
벽을 넘거나 다른 후기지수에게 과도한 공격을 하는 것 정도만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이 허용되는바.
“기관진식이라.”
선우연은 턱을 쓰다듬으며 앞을 가로막은 기다란 벽을 바라보았다.
“더불어 안쪽 곳곳에 식량이 준비되어 있다. 하루 정도로 빠져나오기 힘들 테니 분배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지. 그러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각 조에 한 명씩 나오도록.”
담우양의 호출에 조마다 한 명씩 앞으로 나왔다. 미로에 들어갈 순번을 정하는 것으로, 대표로 나간 선우연은 제일 마지막 순번을 뽑았다.
끼이익-.
일정 시간을 두고 후기지수들은 미로 안으로 향했다.
곧 마지막 차례가 되었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로에서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에 당천유는 슬쩍 안쪽을 살피며 말했다.
“…누군가 기다리지 않을까? 가령 그 담 머시기라든가.”
“그 친구의 성격이 워낙 교활해서 말이야. 우리가 정천 학관의 최상위권으로 이루어진 조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쓸데없는 교전은 피하고 싶겠지. 아마 이미 저 멀리 도망갔을 거라네.”
선우연의 말처럼 미로의 입구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어지간한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도 각자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던바. 그렇기에 그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위천강의 시선이 슬쩍 미로의 벽 위로 향했다.
담우양의 말처럼 구역마다 벽 위에 교관들이 기척을 숨긴 채 잠복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기에 조용히 그 위치를 살폈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을 간파해낸 천후와 시선이 마주쳐 서로 머쓱한 표정만 지었다.
“기관 진식이라. 다들 알다시피 이건 또 내 전문 분야지.”
당천유는 자신만만한 표정과 함께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그의 출신인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를 주로 다루는바. 그와 동시에 동류로 취급하는 것이 바로 기관진식이었다.
당천유 역시 당가의 직계로 기관진식에 적잖은 조예가 있었다.
그렇기에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으나, 이내 그 뒤쪽에 있던 천후가 그의 발밑을 보곤 경고했다.
“발밑을 조심하게.”
“음?”
하지만 당천유의 발은 이미 내디뎌진 이후였으니.
달칵.
무언가를 밟는 느낌과 동시에 양측 벽면에서 쇠와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곧 등골을 울리는 짜르르한 감각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찰나.
철컹, 쐐애애애애액-!
벽에서 생겨난 수십 개의 구멍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심해!”
선우연의 외침에 그들은 각자 방비에 나선다. 악비산은 제 창을 크게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고, 그 나머지도 자신에게로 닥쳐온 화살을 쳐냈다.
슈우욱-.
쏘아지는 화살이 그쳤을 때, 벽의 구멍 위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곧 원래대로 메워지더니, 이내 다시 평범한 벽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촉은 둥글군. 담교관님 말씀대로야.”
“그렇다고 해도 맞으면 뼈는 시리겠군. 쏘아지는 기세가 제법 날카로웠으니.”
바닥에 널브러진 화살의 잔해를 주워든 선우연이 쓴웃음을 짓자, 철대환이 벽을 두들기며 말했다.
“…….”
함정을 발동시킨 당천유는 그 가운데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공을 들인 기관 진식인 것 같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쭉 이런 식으로 되어 있으면 확실히 골치 아프긴 하겠네요.”
남궁연은 가라앉은 두 눈으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미로의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함정에 걸려 그것에 대응하면 괜찮겠으나, 조금 전처럼 다른 이가 함정에 걸린다면 아차 하는 순간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언제까지고 사방을 경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역시 상당한 심력을 소비하는 일이었다.
“뭐, 괜찮네. 내 이번은 실수했지만, 다음에는…….”
당천유는 심기일전하며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발에 닿는 익숙한 감촉에 멈춰 섰으니.
달칵.
“…어.”
구우우웅-.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깊은 구멍이 나타났다.
“으아아아아-!”
뒤이어 따라오던 이들은 황급히 뒤로 물러날 수 있었지만, 제일 앞에 있던 당천유는 손쓸 틈도 없이 구멍에 빠져버렸다.
“자네! 괜찮은가!”
구멍의 가장자리에서 몸을 기울인 선우연이 밑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구멍의 입구로부터 그리 깊지 않은 밑쪽 벽에 비수를 꽂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당천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휴.”
선우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핫, 그 와중에 벽에 매달리다니. 순발력 하나는 인정해야겠어.”
그 옆으로 다가온 악비산이 웃음을 터트린다. 다른 이들 역시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연이어 함정에 걸린 당천유를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웃지 말고 어서 구해주기나 해.”
정작 그 본인은 민망한 표정으로 위쪽을 올려다보았을 뿐이니.
“끄응.”
곧 악비산은 제 창끝을 내밀어 당천유를 구멍에서 빼내 주었다. 그러자 갈라진 바닥은 다시 닫혔고, 전과 같이 원형으로 되돌아갔다.
“…허어.”
당천유는 그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한 모습이었다.
진이 다 빠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였다.
“확실히 당가의 출신이라 그런지 함정은 귀신같이 찾아내는군.”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악비산이 농을 던졌다.
“…….”
당천유는 붉어진 얼굴로 제 친우를 노려봤지만, 악비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휘파람을 불며 고개를 돌렸다.
“자네.”
선우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 옆으로 다가가자 당천유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앞장서겠네. 그러니 뒤에 있게.”
“…끄응.”
더는 할 말이 없어진 당천유는 그저 신음만 끙끙 앓았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