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후기지수 중 제일 먼저 눈을 뜬 것은 선우연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무공이 뛰어나거나 독에 내성이 있었던 이유는 아니다. 그저 제일 먼저 중독되었기에 깨어나는 것이 빨랐을 뿐이었다.
“끄으윽.”
전날 거나하게 음주를 한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기 그지없다. 그렇기에 헛구역질과 함께 신음을 토해낸 그는 잠시간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공간이 그를 반긴다. 평소 강의를 듣는 강의실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방 안이었다.
시커먼 색의 벽은 모두 막혀 있었고, 천장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은은한 빛만이 안을 밝히는 광원이었다.
“……!”
잠시간 멍한 눈초리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든 선우연은 우선 제 몸을 살폈다.
“문제는, 없지 않나.”
사지는 전부 멀쩡하다.
다친 곳 역시 없는 듯했지만,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내공이 움직이질 않는군.”
단전에 힘껏 힘을 주어보아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필시 쓰러지기 직전 연회에서 먹은 술과 음식, 그리고 갑작스럽게 뿜어진 연기 때문일 것이리라.
“이보게들, 일어나야 하네.”
방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인 여섯을 비롯해 같은 학관의 소속 후기지수인 열셋까지 총 스물이 바닥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으으.”
선우연이 몸을 흔들어 깨우자 하나둘씩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와 같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에 나섰다.
“문은 없는가. 벽은 강철로 돼 있군.”
“부수고 나가기는 힘들 것 같네.”
위천강과 철대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내공을 운용할 수 있는 이가 있는가?”
선우연은 제 일행을 비롯한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단전에 자리한 내공이 움직이지 않던바. 그렇기에 설마 하는 기대를 담아 시선을 옮겼지만, 여지없이 전부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흠.”
천후와 악비산은 제 손에 도와 창을 쥔 채 벽을 바라보았다.
“자넨 어떨 것 같나.”
“…힘들 듯싶군.”
악비산의 물음에 천후는 고개를 저었다.
내공만 있다면 쇠로 만들어진 벽 따위는 손쉽게 베어낼 수 있겠으나, 단순한 완력으로는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직접 부딪혀 보아야 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붕붕붕붕-!
악비산이 제 창을 격렬하게 휘둘렀다.
단순한 찌르기보단 회전을 가미해 일점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 위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장소가 협소했던 탓에 그 나머지는 반대편 벽으로 물러나야 했지만, 모두 기대감을 품은 시선으로 그런 악비산의 거구를 바라보았다.
“흡-!”
쩌어엉-!
창끝이 벽과 충돌하자 광음과 함께 잘게 부서진 쇳조각이 흩날렸다.
“오오오-!”
지켜보고 있던 모두가 그 완력에 감탄을 흘린다. 하지만 창을 휘두른 그 본인인 악비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어림도 없군.”
어지간한 바위는 손쉽게 뚫어낼 위력임에도 불구하고 벽 위엔 대략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깊이의 상흔만 남아 있었다.
저릿저릿한 팔을 부여잡으며 창을 내린 악비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제 일행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감촉을 보니 최소 세치 이상의 두께다. 내공 없이 뚫어내긴 힘들 것 같군.”
“그런가.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소리인데.”
당천유는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방을 둘러싼 벽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악비산이 낸 작은 흠집을 제외하면 아무런 특색이 없는 검은 단색이었으니. 무슨 특별한 표식이 있나 싶어 다들 흩어져 유심히 살폈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톡.
“……?”
그러던 중 남궁연은 돌연 제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몸을 움찔 떨었다.
무언가 싶어 손으로 그곳을 더듬어보자, 어째서인지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
고개를 들자 다시금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슬쩍 한걸음 움직여 그것을 피해냈지만, 이내 방울은 줄기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물이 흐르오!”
누군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런.”
천장의 가장자리로, 벽과 맞닿아 있는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곧 그곳에서 폭포처럼 물이 콸콸 흘러내렸고, 바닥은 이내 찰박거릴 정도로 잠기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단서를 찾아!”
당천유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흘러내리는 물을 피해 가운데로 모여 있던 이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다시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젠장.”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 오히려 조급해진 탓에 시야가 더 좁아지고, 아등바등하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전부 탈락하는 건가?”
“첫 관문은 예선의 성격으로 치른다고 했으니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군.”
위천강의 물음에 선우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첫 번째 관문도 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니 그간 열심히 수련해왔던 것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데.”
당천유가 경직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릎까지 차오르던 물은 어느덧 허리를 넘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기세는 전보다 더 거세진 상태. 점점 장내의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머지않아 그들의 머리끝까지 물이 차올랐다.
“후우, 후우…….”
물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자맥질하는 것도 힘겨워하며 거친 숨을 내쉰다. 이제 천장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
이제껏 말없이 상황을 살피던 천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일렁거리는 수면 너머로 보이는 시커먼 벽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밑의 벽 위로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네.”
“물밑? 벽?”
천후의 말을 따라 그것을 바라본 당천유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곤 물밑으로 고개를 넣었다.
“……!”
잠긴 벽엔 한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홍과 청으로 나뉜 두 세력이 전쟁 중인 상황으로 적나라할 정도로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다들 벽을 보세! 물에 닿은 부분에 그림이 나타났네!”
“그림?”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당천유의 외침에 다른 이들이 두 눈을 크게 뜬다. 그러곤 이내 그와 마찬가지로 물속으로 들어가 벽을 살피기 시작했다.
“…….”
남궁연은 가라앉은 눈으로 벽에 새겨진 그림을 살폈다.
죽고 죽이는 잔혹한 전쟁의 풍경.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쉬이 알아차릴 수 없었다.
“푸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인 듯 몇 번이고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한계에 다다랐으니.
“…….”
곧 천장 끝까지 물이 가득 찼다.
더는 숨을 내쉴 수 없게 된 이들의 얼굴엔 정말이 가득 찼고, 더러는 힘을 아끼고자 그 상황에서 가만히 웅크렸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남궁연을 비롯한 일곱 명의 후기지수뿐. 하지만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들 역시 머지않아 한계에 이르렀다.
“…….”
그때, 당천유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몸부림쳤다. 옆에 있던 선우연과 남궁연은 그의 숨이 다해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당천유는 다급한 손놀림으로 그림의 가운데 칼을 든 장수의 얼굴을 가리켰다.
“……?”
한 명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그 장수를 비롯해 모든 이들의 얼굴을 지목한바.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오직 남궁연만이 그 뜻을 알아들었다.
‘…시선!’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보통이라면 전쟁하는 상황 자체에 무언가 타개책이 있으리라 생각할 터.
하지만 정말로 단초가 되는 것은 무질서 안에 심겨 있는 질서였으니.
남궁연은 가늘어진 눈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그림 안의 사람들은 전부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으나, 작게 찍힌 눈동자는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모두 이어 대략적인 궤적을 유추해냈고, 이내 생문(生門)을 찾아낼 수 있었다.
쿵-!
주먹을 움켜쥔 남궁연은 홍군(紅軍) 진영에 있는 화롯불을 힘껏 가격했다.
그러자 이전과 달리 그 부근이 움푹 들어가며 균열이 생겨났으나, 물의 저항과 내공의 부재 때문에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 힘들었다.
턱.
그런 그녀의 어깨를 악비산이 붙잡았다.
‘내가 하겠소.’
그 의미를 이해한 남궁연이 뒤로 물러나자, 악비산은 제 창을 붙잡은 채 바닥에서 자세를 취했다.
그는 악가에 있을 무렵 수중에서도 수련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리 내공을 사용할 수 없었고, 호흡마저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기회는 딱 한 번.’
무게 중심을 앞으로 낮춰 몸이 뜨는 것을 막는다. 그러곤 창끝을 날카롭게 세워 물을 꿰뚫는 것이 아니라 빗겨 흘려내는 것으로 그 저항을 줄여냈으니.
콱-!
창끝이 일점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남궁연이 만들어낸 그 흔적 위로 새로운 균열이 뒤덮었고, 이내 생문이 열렸다.
파가가각-!
뚫린 구멍을 중심으로 벽에 무너져 내렸다. 철벽은 부서지지 않고 쓰러져 내렸지만, 그 덕분에 안에 가득 차 있던 물이 순식간에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푸하.”
“컥, 컥…….”
후기지수들은 저마다 목을 붙잡으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신음을 흘렸다.
한계까지 숨을 참았던바. 조금만 더 시간이 지체되었더라면 정말로 의식을 잃을 뻔했기에 간발의 차라고 할 수 있었다.
“…후우.”
남궁연은 짧게 숨을 토해내며 머리에 흥건한 물기를 짜냈다. 문제라면 옷이 전부 젖은 덕분에 몸에 달라붙어 그 형태가 여실 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곧 정신을 차린 다른 이들이 그녀를 흘끔흘끔 바라봐온다. 하지만 곧 그 뒤를 지키고 선 선우연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서슬 퍼런 시선에 주춤하며 모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여기는. 지하인가?”
시선 관리 똑바로 하지 않으면 그 눈에 박아 넣겠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 암기를 움켜쥐고 있던 당천유가 곧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공간이었다.
천장은 가로막혀 있었으나, 빛이 내리쬐어 사방을 밝혔다. 저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 또한 들었지만, 일단 지금 태세를 정비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 내공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러오.”
제일 먼저 금제가 풀렸음을 깨달은 것은 선우연이었다.
곧 그의 말에 따라 다른 이들이 제 내공이 돌아온 것을 확인했고, 서로 번갈아 호법을 서며 지친 육신을 가다듬었다.
“…….”
금제가 풀린 것은 천후와 남궁연도 마찬가지였다.
‘오셨으면 얼굴이라도 보여주시지.’
선우연이 내공이 움직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자마자 등 뒤에 닿는 따끔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연은 슬쩍 뒤쪽을 바라보았으나, 무너진 벽밖에 보이지 않아 아쉬움을 표출했을 따름이었다.
쉬이익-.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학관에서 선발된 우수한 후기지수였다.
열양지기를 일으키는 것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는 경지였기에 모두 물기를 털어내며 다시 처음과 같은 모습을 되찾았다.
“그럼, 출발하지.”
제 일행을 둘러본 선우연은 선두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에 불과한바. 그들 앞에 준비된 관문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